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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방법? 압구정 아니라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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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방법? 압구정 아니라 광장으로!

[철학자의 서재]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얼마 전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미용 성형을 주제로 토론 수업을 했다고 한다. 찬반을 나누어 자기 입장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남자애들은 모두 반대 입장, 여자애들은 모두 찬성 입장이란다. 남자애들은 자연미에, 여자애들은 인공미에 더 가치를 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이런 남녀의 미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용 성형이 이미 초등학생들의 토론 주제가 될 정도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자기 돌봄의 세태

압구정동에 가본 사람이라면 미용 성형이 일부 연예인들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미 미용 성형은 고급 미용실이 된 지 오래다. 신체 변형을 혐오하는 전통적 가치가 설 자리가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외모 지상주의라는 비판도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다. 이제 미용 성형의 문제는 자기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돼야 한다는 주장이 보다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성형으로 외모에 대한 만족감만이 아니라 대인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생기고 삶에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성형이 단순히 외모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성형은 성형하는 여성의 성격이나 사회생활에까지 그 영향을 실질적으로 미치며 이런 작용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여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남성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취직이나 대인 관계 혹은 열등감 탈피 등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성형을 고려한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성형은 '몸짱 열풍'으로 그 외연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성형보다 일정 정도의 자기 노력이 투여돼야 하는 '몸짱 만들기'에서 자기 정체성이나 자기 목적성이 보다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자신감의 확보이며 자신의 몸을 자신이 지배한다는 주체성의 획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돌봄의 또 다른 세태는 자기 계발이다. 자기 계발 붐은 아마도 외환 위기를 경험하면서 사회가 새로운 인재상(像)을 요구한 데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외환 위기 이전에는 창의적인 인재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성실한 노동자가 이상적인 인재상이었다면, 외환 위기 이후에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실험을 감행할 인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해서 각 개인들은 경쟁을 돌파하기 위해 자기 계발에 매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누구나 자기 계발서 하나쯤은 읽어본 경험을 갖게 되었다.

대체로 이런 자기 계발서들의 내용은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서 시작해서, 이를 위해 자신과 환경을 측정하고, 위기조차 기회로 여기도록 하는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퇴근 후 어학 학원으로, 자격증 학원으로 또는 학위를 위한 대학원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모두 나름의 목표를 세우고, 자기의 환경과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측정에 기반 하여 자기 계발에 나선다. 자기 계발은 인사 조정이나 제2의 외환 위기 같은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예비적 성격을 갖는 동시에 자기실현의 의미도 강조된다.

얼굴 성형이 기본이 되고 '몸짱'은 필수가 되었다. 자기 계발과 자기 경영의 앎이 유행하고, 독특한 스펙으로 무장한 이력서가 정체성이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얼핏 보면 푸코가 말한 자기 수련을 통한 주체의 구축과 다르지 않는 듯하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심세광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자기 돌봄(자기 배려)의 내용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 둘째, 시선을 외부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셋째, 자기 자신에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모시키는 것이다. 결국 자기 돌봄은 자기 내부로부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권력이나 지식에 의해 외부에서 만들어진 주체가 아닌 자기 내부로부터 구축되는 새로운 주체를 사고하고자 한 것 같다.

성형이나 몸짱, 자기 계발 등도 자기 노력을 통해 자기를 변형한다. 그리고 이 변형된 자기로 인해 타인이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는다. 그런데 과연 성형 등을 통해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훈육된 주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 돌봄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실천이라고 할 때 푸코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먼저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기란 무엇인가?'이고 둘째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실천으로서의 '돌봄은 어떤 것인가?'이다.

▲ <알키비아데스>(플라톤 지음, 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제이북스
먼저 '자기'의 문제를 <알키비아데스>(전2권, 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어떻게 말하는지 보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어떤 기술이 사람을 더 낫게 만드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긴 하겠는가?"(128e, 105쪽)라고 말을 꺼낸 소크라테스는 델피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고, 그만큼이나 자신을 아는 일은 쉽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 자신의 것들, 자신의 것들에 속하는 것들"(133d, 117쪽)을 나눈다. 여기서 '자신의 것들'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로, 예를 들자면 발이나 손이고, '자신의 것들에 속하는 것들'은 발이나 손에 속하는 신발이나 장갑이다. 결국 육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혼이라고 한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혼, 육체, 사물이라 이해해도 되겠다. <알키비아데스>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 보다 알기 쉬울 것이다.

소크라테스 : 그러면 나와 자네가 말을 사용해서 서로 사귈 때, 혼이 혼을 상대로 한다고 믿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알키비아데스 :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고 보니 이건 조금 전에도 우리가 말했던 것이군.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와 말을 사용해서 대화를 나눌 때, (내가 보기에는) 자네 얼굴을 상대로 해서가 아니라 알키비아데스를 상대로 해서 말을 한다고 말이지. 그런데 이 알키비아데스가 혼일세.
알키비아데스 : 제가 보기에 그런 거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알키비아데스 : 그런 거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 신체에 속하는 것들 중에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을 아는 사람이지. 자신을 아는 사람은 아닐세.
알키비아데스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 어떤 의사도, 의사인 한에서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어떤 체육 교사도, 체육 교사인 한에서는, 자신을 알지 못하네. (130c-131a, 110쪽)


소크라테스가 말한 '자기로서의 영혼'을 푸코는 "그것은 오로지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입니다. 즉 그것은 신체, 신체의 기관, 신체의 도구들을 사용한다는 한에서 영혼입니다"(<주체의 해석학>, 96쪽)라고 해석한다. 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영혼을 "다양한 감각기관이 흡수하는 정보를 고찰하고, 그 과정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멋진 능력"(<몰입의 재발견>(김우열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60쪽)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영혼 이해의 공통점은 영혼을 육체와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단지 행위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뭐 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영혼을 마음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음은 육체 없이 실재하지 않고 육체나 유전자 등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결국 자기 돌봄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라 하겠다.

돌봄이란 무엇인가

그럼 이제 두 번째 문제인 돌봄이란 무엇인가를 보자.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을지를 묻는 말에 답하여 "혼도 자신을 알려면, 혼을 들여다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혼의 훌륭함, 즉 지혜가 나타나는 혼의 이 영역을 들여다봐야 하며, 또 이와 닮은 다른 것을 들여다봐야 하네"(133b, 116쪽)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곧 절제요 정의라고 말한다.

푸코는 이 돌봄(배려)을 '자기로의 회귀하기'로 분석하면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기, 자신에게서 환희를 느끼기 등을 포괄한다고 말한다.(<주체의 해석학>, 119~122쪽)

결국 소크라테스나 이를 분석한 푸코나 자기 돌봄은 '자기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의 시선'에 기초한 미용 성형이나 몸짱 만들기 또는 자기 계발과의 차이이다. 미용 성형이나 몸짱 만들기는 '자기에게 스스로가 기쁨을 주기'나 '자기에게 자신을 주장하기'가 아니라 남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남을 의식해 남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아 줄 것인가에 집착하는 것이다.

헬스장을 경영하는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주로 팔운동만 한다고 한다. 팔은 얼굴 다음으로 많이 노출되는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란다. 결국 몸을 잘 관리해서 튼튼하고 건강하게 돌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외형적으로 남들에게 멋있게 보일까 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외형적으로 남들의 요구에만 집착하면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과도한 다이어트로 우울증에 시달린다든지 속성 근육 만들기 등을 위해서 약에 의존한다든지 하여 결국은 건강을 잃는다. 이것은 '자기에게 자기를 주장하기'가 아닌 '외부에게 자기를 주장하기'인 '외부로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계발과 자기 경영도 마찬가지다. 자기 목표 세우기를 보자. '자기에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면 자기 목표란 결국 남들의 목표와 대동소이해진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목표가 내면화되기 쉽다. 그 목표란 대체로 돈이 된다. 돈이 자기 확장과 자기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가 자본재 생산의 수단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자기 목표화하여 스스로를 수단화, 대상화해버린다. 예를 들자면, 우정을 중심으로 한 친구 관계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사업상 조언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래 관계로 재편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자기 돌봄의 의미

자기에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어떤 외부적 시선이나 대상을 위한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자기의 몸을 잘 돌보아 건강을 유지하고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것이고, 경제 생활을 충실히 수행하여 외부의 요인으로 몸과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연애술에도 주의를 기울여 사랑의 강도와 가치를 높여가는 것이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마음의 조화와 통제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조화와 통제는 자신의 내면을 단지 인식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경제 활동을 질서 있게 수행하는 가운데 성관계 등 감각적 쾌락을 활용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푸코가 알키비아데스를 분석하면서 주목한 부분이다.

결국 우리의 일상생활이 자기 돌봄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상생활이 자기의 의식 검점과 자기 수련의 수단이며 동시에 자기 성장과 확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자기 돌봄으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생활 관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된다.

자기 돌봄을 통해 자기 성장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칙센트미하이는 도전과 기술 습득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조금씩 다른 행동의 기회에 뛰어들게 되면서, 자신의 한계와 잠재력을 잘 알게 되고 더욱 독특한 인간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도전을 정복하기 위해 기술 습득이 필요하고 기술 습득을 위해서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영역인 '양생술', '가정 관리술', '연애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형이나 몸짱이 아니라 양생술이, 자기 계발이 아니라 가정 관리술이, 그리고 단순한 성적 쾌락이 아니라 연애술이다. 결국 자기 돌봄은 도전과 절제와 인내를 통해 자기 돌봄의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자기 성장을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도전과 기술 습득을 어떻게 시작할까?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돌봄의 의미를 깨닫게 된 계기는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이름을 부르고 응답함으로써 의미가 되는 만남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인맥의 한 고리를 채우는 대상화된 사물로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부름과 응답 속에서 서로의 한계와 잠재력을 알게 되는 서로주체로서의 만남, 만남 자체가 또 다른 도전인 그런 만남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촛불 광장의 만남도 희망 버스의 만남도 그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주변의 작은 만남이라도 찾아봄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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