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명박산성이 영원할 수는 없다. 비록 2008년 촛불의 행진은 명박산성에 막혔지만 이제 시민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용산 레아, 홍대 두리반, 4대강 공사 현장,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등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현실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움직임이다.
물론 짜잘하게 부딪쳐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냉소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통계 수치나 이론, 정책을 들먹거리며 자신을 믿고 '큰 거 한방'에 기대를 걸라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공한 사건(?)만을 기억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MB, JP, DJ같은 약자로 얘기되는 정치인과 사조직처럼 움직이는 정당들의 전유물로 얘기된다.
갑작스런 사건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군불이 없다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정치의 군불을 때는 방법을 다룬다. 한나 아렌트와 어빙 고프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골드파브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상호 작용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작은 것들의 정치>(제프리 골드파브 지음,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골드파브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상호 작용에 내재한 자유로운 공적 공간의 중요성"을 간파하면 식탁, 책방, 살롱, 공장, 학교 같은 일상 공간이 정치의 장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공간에서 상황을 스스로 새로이 규정하며 시민들은 대안적인 정치의 싹을 키운다. 마치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시민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일상적인 유형, 즉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요소를 사실상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의 '가카'처럼 부조리한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하고 미디어의 입을 막으며 공식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식적인 공간에서는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믿는 척했지만, 식탁의 주위에서, 독립적인 책방에서, 살롱에서, 그런 강요된 관계는 의문시되었다." 의심받기 시작한 권력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시민들은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이 권력을 정의하며 대항 지식, 대항 권력을 형성한다.
특히 골드파브는 인터넷이 좌파 운동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얘기한다.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민주당의 하워드 딘과 <무브온>, 미국의 반전 운동을 예로 들며 골드파브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것들의 정치를 펼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서로 만났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올렸고, 서로에게 반응했으며,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행위를 조율했다. 그들은 상황을 재정의했다. 상황은 그들의 정의에 따라 변화했다." 이야기와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정치를 큰 정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물이다.
그렇다고 작은 것들의 정치가 곧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흔히 시민사회의 중요성이라는 통념으로 요약되는)가 권력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제도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동적인 운동들은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변화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출현하자마자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상황을 정의하는 힘은 제도화되지 않으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대안들이, 기존의 두 지배 정당 가운데 한 정당(예컨대, 민주당―옮긴이)에서 제도화된다면, 그와 같은 대안들은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제도화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장기적으로 생존하는데 핵심적인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제도화는 정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매우 다양한 사회 제도들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처럼 교육과 미디어 제도들은 특히 중요하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말로만 떠들지 않고 골드파브는 'deliberately considered'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민들과 소통하고 일상의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골드파브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꼼수다>의 유행과 '닥치고 정치'라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바로 작은 것들의 정치이다.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정치
이런 골드파브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정규군이 큰 것 같지만 어떤 때 가면 정규군을 다 동원할 수도 없어요. 쥐는 고양이가 잡게 생겼지 황소가 못 잡는단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신문에서라든지 잡지에서 못하게 되면 차 마시러 들어가서 다방에서도 얘기하고, 친구 만나 음식점에 가서 얘기하고, 기차 타러 가서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게 게릴라전 아니냐. 정규의 언론 기관은 아니지만, 정규의 언론 기관이 다 맥이 빠져서, 권력에 팔려서, 종이 돼서 할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다면 우리끼리 어디서든 만나는 대로 해야 돼."
함석헌의 이런 얘기는 이미 핵심을 짚었다. 그리고 골드파브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활동으로 함석헌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글과 강연에 매료되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한국의 시민들이 능동적이지 못해서? 한국 사회 시민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몇몇 스타를 낳을 뿐 긍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겠다는 인물들만 있었지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제도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정치인과 정당들, 시민 운동 활동가들조차도 작은 것들의 정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시민들의 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시민들이 직접 꿈을 꾸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촛불 집회의 끝물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편견과 망각의 정치'라는 글을 실었다. (☞관련 기사 : 편견과 망각의 정치) 3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원순닷컴이 한나라쩜 오알쩜 케이알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외려 그의 능력을 알기에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걱정스럽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없어도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게 서울 시장 당락과 무관한 박원순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냉소주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열정을 경험한 뒤에 돌아가는 곳은 억압적인 학교와 공장,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정치의 장에 가두는 사고야말로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학교와 공장, 가정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정치는 삶터의 장을 넘어 일터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은 작은 정치의 희망을 꽃피우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의 무덤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가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보자. 골드파브가 극찬하는 폴란드는 왜 민주 혁명 이후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렸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가 왜 시민들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 핵폐기물 처리장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는 정치 논리로만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골드파브의 글에서 그런 통찰력을 찾아보긴 어렵다. 정치는 내용이 아니라 틀만 짜야 하기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제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이제 정치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에, '삼성공화국을 해체하라'는 요구에 답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골드파브는 아렌트의 이론에 많은 점을 기대고 있지만 그녀가 현대 정치에서 감지한 위기감을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렌트는 근대와 현대의 차이를 핵의 발명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다루는 정치는 전쟁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할 뿐 아니라 자연 자체를 새로이 만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약속>에서 아렌트는 핵무기의 등장이 "정치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바로 그것, 즉 모든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가능성을 위협"하는 모순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아렌트는 정치와 진리를 연관 짓는 걸 거부하지만 정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모순을 핵의 발명에서 찾았다. 이것은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의 기반인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일정한 진리 앞에 서야 한다.
허나 골드파브는 이를 거부하는 듯하다. 골드파브는 책 제목을 따온 아룬다티 로이를 거론하며 "테러주의와 반테러주의에 대한 대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로서의 로이보다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를 참조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허나 나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만큼 반세계화 활동가로서의 로이(로이는 활동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도 좋아한다.
"만약 후세인 정권이 쓰러진다면 바스라 거리에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지 모른다. 그렇다면 만약 부시 정권이 무너진다면 세계 전역에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정의인가?
핵 발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의 정치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아직도 원자력의 신화를 믿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반핵(反核)을 지지해야 한다. 작은 것들의 정치, 제도 정치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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