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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최고 참모의 성공과 수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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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최고 참모의 성공과 수난의 기록

[프레시안 books] 後農 金相賢 자서전 <한국 정치 아리랑>

나는 김상현 씨를 아주 좋아한다. 정치인 가운데서 내가 갖추지 못한, 모자란 부분을 가장 풍성하게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건조하고 격정적이지 못하다면 그는 발랄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대의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닐 수 있는 열정을 가졌다. 그렇게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고, 고생스러운 가운데 그렇게 유머러스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닮아보려고 접근하는 것이다. 그런 지가 벌써 40년, 그러면서 "후농 같은 사람 다섯 명쯤 있으면 정권을 도모하겠다"고 일찍부터 말해왔었다. 나는 아직도 뜨뜻미지근하고, 그는 지금도 유쾌하고 활발하다. "저는 양아치올시다. 저는 천민이고, 상민이고, 서민이올시다."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화법이다.

중국학자 진보량(陳宝良)이 쓴 <중국유맹사(中國流氓史) : 중국 건달 사회사, 건달에서 황제까지>(이치수 옮김, 아카넷 펴냄)는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우리가 잘 아는 <초한지>의 유방은 본래 패현 저잣거리의 건달(중국에서는 유맹, 협객, 강호 등 여러 표현이 있다)에서 출발하여 한(漢)나라의 황제에까지 이른 게 아닌가. <사기>에 "무뢰배로, 생산적인 일을 잘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또 명(明)나라를 이룩한 주원장도 역시 떠돌이 건달에서 황제가 되었다. 청나라 때 사서에 "대개 명 태조는 한 몸에 성현과 호걸과 도적의 본성을 사실상 겸하여 가진 사람이다.", "주원장은 유비에 비해 실로 한 수 더 높았다."고 되어 있다 한다.

중국 항주의 영은사에 가보니 사천왕 가운데 하나가 한 발을 들고 있는데, 설명인즉슨, 주원장이 거기서 사역승으로 있을 때 비질을 하면서 "이놈아, 발 들어" 하고는 내리라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려 아직도 엉거주춤 한쪽 발을 들고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도 <밴디트 : 의적의 역사>(이수영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로빈 후드와 같은 의적들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일본을 보면 난세에 졸개에서 천하 대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 건국 초기에 궁궐지기에서 영의정에 오른 한명회가 있다. 브라질의 전 대통령 룰라도 노동운동 출신이지만 그에 앞서 구두닦이, 세탁소 점원 등 안 해본 게 없다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5년 전쯤에 김상현 씨에게 정말 적나라한 자서전을 한번 써보든지, 작가에 구술하여 만들든지 해보라고 적극 권유했었다. 잘하면 현대판 <수호지>나 <삼국지>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출신인 전라남도 장성군은 홍길동의 고향이라고 내세우고 있는데 현대판 <홍길동전>도 좋겠다. 그리고 한국 현대정치를 연구하는 데 생생한 교과서인 현대 한국 <군주론>이 되리라 싶었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한국판 말이다.

▲ <한국 정치 아리랑>(김성동 지음, 동녘 펴냄). ⓒ동녘
그래서 나온 것이 김성동이 쓴 <한국 정치 아리랑 : 한 정치인이 살아온 대한민국 현대사>인 것으로 안다.

내가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이라는 글을 <국회보>에 연재하면서 "수호지적·삼국지적…정치인 행태학"이라는 한 편을 넣고 만화가 정운경 씨에게 삽화를 부탁했더니 DJ 김대중 씨가 김상현 씨를 옆에 두고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저 그림 속의 사과도 빼내어 먹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만화를 넣었다. 나는 본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는데 언론에 유포되던 풍문을 정 화백이 잡은 것 같다.

그만큼 후농 김상현 씨는 재주가 비상하다.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쁜 이미지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실은 그가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현실 정치의 정곡을 찌른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존경을 받고 있음도 독서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상징이 되는 말이 정치인은 여우와 사자의 특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DJ는 현대 한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마키아벨리다.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다. 후농(後農)은 DJ의 後廣(후광) 아호에서 한 자를 빌려서 후농이라고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도로 DJ를 닮으려 했고 존경했으며 거의 평생을 추종해왔다. DJ가 큰 뜻을 세웠을 때 따라나선 국회의원은 후농 한 사람뿐이었다. DJ 이도령에 후농이 방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후농은 DJ에 거의 버금가는 마키아벨리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DJ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마지막 판에는 DJ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한 내막을 이번 자서전에서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충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정독을 하였다.

정치에 있어서 여와 야는 크게 보아 상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후농과는 반대되는 당을 했던 사람으로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도 생생하게 기록되고 있듯이 잔인무도하게 고문을 하는 등 야당을 탄압한 것은 그 상대성을 인정 않고 짓밟은 것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역시 말재주가 중요하다. DJ와 후농은 둘 다 웅변 학원과 관계가 있다. 식자들은 얼마간 얕잡아 보던 그 웅변 학원 말이다. 정치의 힘은 '말'이다. 돈도 있고 폭력도 있어야 하지만 말이 앞선다. 웅변 정도가 아니고 달변, 능변이며 거기에 기지가 더하여져야 한다. 웅변은 연습도 중요하지만 둘은 타고난 것 같다. 거기에 더하여 박정희, 김형욱, 전두환 등등을 만나서 대담한 것을 읽어보면 후농의 정치 신념, 정치 철학도 엿보인다. 그러한 바탕이 없는 말재주만으로는 사람을 정말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후농의 문화 감각도 돋보인다. 나도 얼마간 관여를 했었지만 <다리> 잡지를 낸 것은 훌륭했다. 초기에는 <사상계>에 버금하는 영향력을 가졌었다. 또한 소설가, 시인, 종교인, 국악인 등 문화계 인사와의 접촉도 매우 다양하고 그들 거의 모두가 그의 정치 활동에 요긴하게 도움이 되었다. 김지하, 고은, 황석영, 함세웅, 안숙선… 우리나라 대표적 문화인의 인명록 같다.

정치적인 전략·전술의 구사도 볼 만하다. 야당 정치, 민주화 투쟁의 고비마다 그는 훌륭한 전략·전술을 제시했으며 대개가 성공하였다. 그는 행동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객(說客)이었고, 책사(策士)였다. 거의 모든 면을 한 사람이 겸비하였다. 작은 DJ다.

"적에게 주도권 겉모양을 넘겨준 다음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최고 전략이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에서 그가 미국에 망명한 DJ를 대신해서 공동의장 대리를 했는데 그 민추의 결성 과정에서 그가 보인 지모(智謀)는 대단하다. 그밖에 고비 고비 그의 책략은 번뜩이는데 그중 한두 가지만 살펴보겠다.

책에 나오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변을 당했을 때 나는 당에서 정해준 당번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후농이 놀랍게도 나타나 나에게 DJ의 조문을 허가 받도록 주선해달라는 부탁이다. 마침 박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 씨가 현장에 있어서 친한 사이인 그와 정무수석인 유혁인 씨에게 일이 성사가 되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불발이 되었다. 계엄사의 비토란 이야기다. 후농은 DJ와 사전 협의 없이 혼자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한 것인데 만약에 그 조문이 성사가 되었더라면 DJ와 정권 실세들 사이에 어떤 돌파구 같은 것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 문제는 최규하 과도 정권 강화론이다. 후농은 야측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는데 참 앞날을 뚫어지게 보는 혜안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최 정권의 힘을 강화시켜줘야 됩니다. 최 정권을 강화시켜서 최 정권 스스로 민주 헌법으로 개정하도록 시간을 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민주 세력이 뒷받침을 해줘야 합니다. (…) 이처럼 강경하게만 나가면 결과적으로 군부에 명분을 줍니다."

참, 무릎을 탁 치고 싶은 탁견이다. 그때 여야 모든 정치인들은 최규하-신현확 정권 비난에 열을 올렸었다. 사실 그때 정치를 했던 나도 최 정권을 비판만 했었다. 물론 이원집정제 등 야릇한 낌새를 보여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생각해보면 후농의 최규하 과도정권 강화론이 옳았었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간단한 이야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을 옮겨보자. 전 전 대통령은 민정당 간부 몇 사람을 청와대 상춘재에 부른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그때 김종필 씨의 공화당과 또 유정회가 최규하 씨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밀었더라면 과연 누가 딴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거의 정확한 기억이다.)

후농의 정세 판단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 하겠다.

후농의 유머 감각은 출중하다. 남도 출신이라 창도 제법이다. 창을 하다가 요처요처에 재담을 섞어 넣는 것이 재미있는데 특히 살짝 음담패설을 넣으면 박수가 터져 나온다. "잡놈!"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잡놈'은 친근감이 가는 표현이다. 만 가지 재주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가 이병주 씨를 나는 '잡놈'이라고 하며 좋아했었다. 후농의 경우는 전라도 사투리가 양념이다. 그러고 보니 후농의 배경에서 호남이란 점이 중요했던 것 같다.

내가 어디다가 쓴 그의 에피소드 하나를 다시 소개하겠다.

나와 무척 가까운 김상현 전 의원이 일본 대사(오시마 쇼타로 大島正太郞)를 초청하고 한국 정치인들을 많이 부른 저녁 자리를 마련하였다. 김지하 시인이 운영하는 돈화문 옆의 '마고'에서였는데 국악 감상도 겸했었다. 그 무렵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관계가 얼마간 떨떠름한 때라 김 의원이 인사말을 어떻게 하는지가 관심이었다.

"내가 들은 옛이야기에 이런 게 있다. 일본의 일류 검객 쓰카하라 보쿠덴(塚原卜傳)이 여행을 하는데 어떤 검객이 도전을 해왔다. 쓰카하라는 도전에 응하면서 배 위에서 승부를 겨루자고 조건을 달았다. 배는 무인도를 향해 저어졌다. 도전자는 무인도에서 붙게 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섬으로 날쌔게 뛰어올라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쓰카하라는 갑자기 배를 돌리라고 명하여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결국 진검승부는 아무런 희생도 없이 끝났다는 것이다. 나는 한일 간에 설혹 난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김 의원의 인사말은 대강 그런 것인데 구두닦이 고학생에서 큰 정치인이 된 성공담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의 화법이 그런대로 재치 있었다고 여긴다.

여담. 일본 대사와의 모임이 끝난 후 후농, 나한테 2차를 꼭 가잔다. 인사동에 있는 '시인'이라는 대포집인데 김여옥이라는 해남 출신 미모의 여류 시인이 경영하고 있었다. 반골 문인들의 집합 장소처럼 되어 있는데 야측 정치인도 자주 온다. 문화와 정치가 교류하고 융합하는 현장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어날 때 후농, "형님, 자주, 자주 오시오잉. 그러나 주인은 절대로 노탓치입니다."

자서전을 읽으며 내가 큰 관심을 가진 부분은 정치 자금에 관한 것이다. 내가 자주 만날 때 들은 바로는 그는 정치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도 어디서 마련하였는지 몰라도 돈을 잘 마련하고 자기 계보를 관리하며 선거 때 지원하는 등 돈을 그런대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그것도 큰 재주구나,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사실 정치에 있어서 정치 자금 마련과 그 배분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닌가.

책에서는 받아서 될 돈, 받아서 안 될 돈 등을 구별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야당 의원으로 박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그가 주는 흰 봉투는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그런 분별을 지켰다. 붓글씨나 그림을 얻어서 자금을 마련하여 선거 때 20여 명을 지원한 이야기도 있다. 또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이 국회 내무위에 건설 공사 한 건을 주면서 돈으로 만들어 쓰라 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DJ와 갈라설 때 중요한 까닭은 돈 문제라고 소문이 났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만 적고 있다.

"박종률 씨한테 준 1억 원은 동교동 기금에서 5000만 원과 내가 임춘원 씨한테서 비공식으로 받은 5000만 원을 합친 것이었다. (…) 김대중 씨에게 사후 전체 보고를 했을 때 자금 문제로 지적을 당했던 유일한 경우였다."

글쎄. 정치 자금 문제는 장막에 가려진 것이기에 계속 궁금하기만 하다. 정치 자금에 관하여 이후락 씨는 "떡고물을 좀…"이란 화제를 남겼다. 장기영 씨는 "주방에서 갈비를 굽다 보면 한두 개 먹기도 하는 게 아닌가"라고 했다. 일반 서민에게는 분통이 터질 이야기다.

아주 최근의 <조선일보>(2011년 9월 16일)를 보니 이런 기사가 있다.

"최(규선) 씨는 2007년 김상현 전 새천년민주당 의원에게 쿠르드 유전 개발 컨소시엄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여 원을 건넨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었다."

김상현 씨의 정치 무대가 아직 막을 내린 게 아니다. 또한 사람이라면 숨기고 싶은 비밀이 꼭 있게 마련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비밀의 뭉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밀을 아주 몽땅 털어놓는 사람은 없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 인간의 정체성은 무너질 수도 있다.

이번에 야사(野史)를 기대했는데 정사(正史)가 되어버린 셈이다. 앞으로 훗날에 정말 적나라한 <수호지>나 <홍길동전>과 같은 <김상현전>이 나오길 기대한다.

끝으로, 그의 정치철학에서 귀중한 것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다음 구절은 생생하다.

"밥 그릇 싸움을 조정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가 구실이다. 각자 능력에 따라서 일한 만큼 밥을 먹자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의 정치 신념은 요즘 말로 진보적이다.)

후농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로서는 그의 자서전을 읽고 새로 알게 된 바도 많고, 배운 바도 많으며, 깨우친 바도 참 많았다. 그는 비상한 인물이다. 여러 가지 흠집에도 불구하고, 또 일부에서는 이 개화된 세상에서 아직도 그를 '천출'이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를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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