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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레즈비언·트랜스젠더…'사람'을 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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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레즈비언·트랜스젠더…'사람'을 빌려줍니다!

[親Book] 김수정의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이번 추석에도 집에서 TV를 보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중장년 합창단 오디션에서 아는 사람이 나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무대를 나풀나풀 걸어 다녔다. 심사위원들에게 장난도 쳤다. 반가웠다. 그 꺾이지 않은 삶의 의지라니. 살아온 인생대로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둘이 마주앉아 주고받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녀는 암을 앓을 때 너무 아파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런 몸으로 연극이라곤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지역에 가서 무료 공연을 했다. 마음이 상한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이 예순이 넘어 보건학 박사 학위를 땄다. 그녀는 내가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빌린 사람 책이었다.

"<리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린다는 것. 대출 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 목록(사람들 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김수정 지음, 달 펴냄). ⓒ김수정
김수정의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달 펴냄)는 영국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사람 책 이야기다. 저자는 어느 날 기사를 보고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겨 독자로 나선다. 원래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청소년 축제에서 비롯됐다. 시야도 넓히고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함께 성장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도서 목록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 남들과 약간 다른 독특한 이력 덕분에 '오해의 시선'을 받아온 사람들. 즉,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서로 잘 알지 못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고정관념을 줄이자는 의도로 기획된 행사였다."

저자는 싱글맘, 레즈비언, 우울증 환자, 트랜스젠더, 여자 소방관, 혼혈, 채식주의자 등 다양하고 발랄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편견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들이 들려주는 인생엔 지친 한숨과 터무니없는 자랑만 있는 게 아니다. 짓궂은 질문을 던져도 되레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어느 정도 자기 삶을 정리한 모습이다. 고통을 초월한 사람이 그렇듯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다. 다들 무언가에 간절하고 행복하다.

2010년, 우리나라에서도 국내 최초로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가 열렸다. 나는 각각 5명의 사람 책을 빌렸다. 고령의 배우와 시인, 여행 작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터민과 호스피스였다. 처음엔 서로 머쓱해 웃기만 했다. 자기 인생을 남에게 얘기한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단 30분 동안.

그러나 그들은 갓 스물 중반을 넘은 애송이 같은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사정, 자살하는 새터민들을 두고 볼 수 없어 조직을 만들었다는 얘기, 백혈병에 걸린 아이를 어제도 떠나보냈다며 말을 잇지 못한 읊조림,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는데 이혼을 요구받아 너무 고통스러웠다는 고백, 주위의 보살핌으로 새롭게 살게 된 사연까지. 그것도 모자라 깊은 대화를 끌어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내 눈을 응시하며 조용하지만 열정이 있는 것 같다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만약 사람 책이라면 나는 어떤 인생을 들려줄 수 있을까. 열아홉 살에 70만 원 받고 일하며 언니들 구박에 시달리다 사무실 복도에서 숨죽여 울던 기억? 독학해서 대입 배치표 보러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대견한 미소를 지어주신 일? 어렵게 장학금 받았지만 계속된 취업 실패? 1명 뽑을까 말까 하는 임용 고시가 무서워 도망치듯 대학원에 간 것? 교사 자격증 두 개여도 가까스로 비정규직 학교 회계 직원이 된 일? 평생 이름도, 권한도, 보람도 없이 허울 좋은 독서 교육의 보조로서 살지 모른다는 불안함?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삼포세대, 이름하여 우울한 청춘?

그 동안 사서로서 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고 우아하게 책이나 보고 앉아 대출 반납만 해줄 거라는 편견과 힘써 싸웠다. 심심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부글거리는 속내를 억눌렀고 바빠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면 괜히 안도의 숨을 쉬었다. 묵묵히 혼자 일하는 것도 좋지만 학교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동떨어져 있다 보면 가끔 외로웠다. 질문해도 대답이 없을 때, 점심시간 문을 열기 위해 밥을 10분 만에 먹어치울 때, 내가 알지 못하는 얘기를 하는 자리에 잘 낄 수 없을 때 더 그랬다.

살면서 왠지 모를 설움이 목까지 끓어오를 때 글을 썼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샌가 타이핑하는 손 위로 굵은 눈물이 흘렀다. 부끄러웠다. 하소연만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울고 나선 잠시 잊었다. 그게 내가 여태껏 걸어온 방식, 살아온 인생이었다. 누가 나란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면 무척 불편하고 침울해지리라. 나도 다른 사람 책처럼 당당하고 행복할 순 없을까.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을 한 때의 방황, 고민이라며 기분 좋게 헤쳐 나갈 순 없을까.

더 이상 이렇게 살긴 싫다고 생각할 즈음, 다시금 내 삶을 돌아보자 지금 이 삶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도움은 그저 아는 척 해주는 사소한 배려, 혹은 인사, 힘내라는 격려, 지켜보는 눈빛 정도였다. 대단한 도움을 받은 적도 없지만 대단한 방해를 받은 것도 아니다. 꼭 누가 알아주고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나가는 것은 아니다.

"대화를 함으로써 관계를 맺는 것. 누구나 자신과 관계가 있는 대상은 좀 더 이해하려 하게 되고 한 걸음 나아가 애정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 애정이 발전되면서 다른 사람 입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때로는 책보다 살아있는 육성이 더 감동을 준다. 막상 상대방과 얘기를 나누면 마음이 젖을 때가 많았다. 그들은 내게 약한 것 같으나 강하다고, 진실하다고 말해주었다. 내 비록 명랑하거나 씩씩한 여자는 아니나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 스트레스 받아가며 나를 억지로 바꾸거나 침체될 필요는 없으리라. 모쪼록 조용하지만 열정이 있는 것 같다는 그 말 무색하지 않게 삶이 뒷받침 해주면 좋겠다. 누가 나의 소식을 접할 때 반가워하며 충분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렇게 살면서 나도 지쳐 쓰러지지 않는 인생을 들려주고 싶다.

이 젊은 날에 방황
가난 바람 같은 인생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며 나를 위로했던 그때처럼
다 겪어 봤으니 꺾이지 않아
고통은 껌처럼 씹어
컴컴한 밤은 나를 다시 일으켜
나를 다시 일으켜

(리쌍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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