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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방생한 명태는 어디로 갔는가?

[꽃산행 꽃글·20] 가을 깊은 산에서 더 깊은 곳으로…

가을 깊은 산에서 더 깊은 곳으로 떠나다

1

개천절 연휴였다. 파라택소노미스트의 마지막 꽃산행이 가평의 유명산에서 있었다. 단풍이 들면 꽃들은 이제 더 피어나지 않는다. 꽃은 잎과 다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을 기약하며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갖는 야생화들. 이제 슬슬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풍들 준비를 하는 유명산 골짜기는 그런 고요와 명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도 자연의 이런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 휴양림 입구 주차장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들자 시원한 청량감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물길을 타고 넓은 세상 구경 떠나는 나뭇잎들도 한가로웠다. 어느 비스듬한 골짜기에는 가을 햇살이 내리꽂히는 게 그대로 보였다. 그것은 하늘로 통하는 수직의 통로였으니 그야말로 개천(開天)이 아닌가.

자연이 주는 흔감한 광경에 눈을 바삐 굴리며 조금 뒤에 처져 걸어갔다. 입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바위 앞에서 일행이 모여 사진을 찍느라고 바빴다. 얼른 다가보니 젖은 바위틈에 무늬족도리가 간신히 달려 있었다. 무늬족도리는 원줄기 없이 바로 뿌리에서 얇은 홑잎이 올라온다.

▲ 무늬족도리. ⓒ이굴기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족도리풀과 오늘 처음 보는 무늬족도리는 꽃이나 줄기가 아주 흡사한 한국 특산 식물이다. 그 잎은 심장형이고 잘생긴 하트 모양 같다. 족도리풀은 큰 나무 아래나 그늘에서 많이 자란다. 대개의 꽃은 줄기의 상부에 핀다. 특이하게도 족도리풀의 꽃은 그 잎의 아래에서 핀다. 그래서 꽃은 지면과 아주 가까이에 있기에 흙을 묻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행은 다음 꽃을 찾아 모두 올라가고 나만 혼자 남았다. 그 바위 옆의 고로쇠나무가 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고로쇠나무는 흔한 나무이다. 나의 눈길을 잡아챈 것은 그 나무가 아니라 줄기에 달려 있는 흰 물체였다. 무늬족도리를 찍고 한 걸음 물러나 바위를 보니 바위는 조금 옴방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정성을 가지런히 모은다면 마음이 기대고 싶음 직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 고로쇠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물체는 누가 이곳에서 고사를 지내고 남긴 흔적 같았다. 산속에서 어쩌다 만나는 요란한 현장과는 달리 그 흔적은 아주 간소했다. 누군가 와서 간결하게 치성을 드린 것 같았다. 고로쇠나무 기둥에는 곱고 고운 흰 종이로 정성스럽게 싼 것이 흰 실로 묶여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말린 명태이리라. 명태는 거친 물결을 호흡하면서 날렵하게 헤엄치던 그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수의를 입은 채 하늘로 향해 나아가겠다는 듯 비스듬한 포즈였다.

▲ 고로쇠나무에 달린 흰 물체. 명태로 짐작된다. ⓒ이굴기

족도리풀의 잎이 맨맨한 녹색인데 비해 무늬족도리에는 흰 무늬가 있다. 무늬족도리의 잎에 뻗어 있는 주맥과 측맥 그리고 흰 무늬를 보면서 내 손바닥의 손금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게 무늬족도리와 고로쇠나무에 달린 명태를 번갈아보면서 나는 문득 경주 너머 감포 앞바다로 갔다.

2

올해 정월 감포 대왕암릉 앞바다를 다녀온 뒤 "하늘로 방생한 명태"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글을 쓴 바가 있다.

"동해안 감포의 문무대왕릉 앞바다에 가면 특이한 풍경들이 있다. 부서지는 파도, 파도를 희롱하며 끼룩대는 갈매기, 먼 수평선은 여느 해변가의 풍경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이곳에만 있는 풍경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해안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텐트촌이다. 텐트는 크고 작은 것들이 있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흰색이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곁으로 가면 낭랑한 소리들이 울려나온다. 징소리가 나고 무언가를 외는 소리, 춤을 추는 소리가 간단없이 뒤섞여 들린다. 그렇다. 이곳에서는 문무대왕의 영험함을 빌어서 매일 굿이 벌어진다.

날씨는 추웠다. 바람도 세게 불었다. 굿의 현장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해변을 돌아다녔다. 파도가 철썩거리는 곳에 사람들의 모여 있었다. 한 스님을 중심으로 몇몇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들은 파도의 낯바닥까지 가까이 가서는 양동이에서 뭔가를 꺼내 바다로 넣고 있었다. 좀 가까이 가서야 나는 그게 무슨 동작인 줄을 알았다. 그들은 방생법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썰물의 끝자락을 붙들지 못하고 모래밭에 낙오하여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있자 한 사람이 손으로 들고 멀리 던져주기도 하였다.

법회는 그리 오래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물러가고 나는 법회가 벌어진 현장을 가보았다. 그때 모래밭에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명태였다. 아마 누군가 굿을 하고 마련한 음식 중에서 흘린 것 같았다. 둘러보니 이곳저곳에 음식쓰레기들도 좀 있었다. 바짝 마른 명태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파도소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으로 들어보니 온전한 한 마리였다. 몸통에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고 축축했다. 명태의 사후(死後)가 참 치욕스럽게 보였다.

아무리 명태가 죽었다지만 이렇게 대접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입으로 들어가든가 저 굿판의 상석에는 놓여야 하지 않을까.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종이와 컵, 포장지들을 태우는 화톳불이 보였다. 나는 명태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방생이 어디 바다로만 하는 것일까. 지금 명태는 조건이 다르다. 그를 제 고향인 바다로 던져보았자 명태의 영혼이 빠져나간 명태는 그냥 물에 뜨고 말 것이다. 그러다 종내에는 팅팅 불고불어 또 다른 치욕을 오래오래 더 견뎌내야 할 것이다. 나는 명태를 불에 태우기로 했다. 화장(火葬)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명태를 하늘로 방생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눈으로 보기에는 숯검댕이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모래밭에 누워 있을 때보단 명태는 훨씬 맘이 편했을 것임을. 드디어 명태는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 세찬 바람에 섞여 하늘로 차례차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기만큼이나 가볍게 몸을 만든 것이었다. 석유 한 방울 안 끼얹고 소신공양하는 게 어디 또 있을까. 승천하는 명태는 노릿노릿하고 쫄깃한 냄새를 둘러선 조문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검은 숯에서 나온다고 냄새조차 검은 것은 아니었다. 검기는커녕 억수로 고소했다."

▲ 화톳불에 타고 있는 명태. ⓒ이굴기

3

다음 꽃을 찾아 서둘러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한참을 올랐을까. 낮게 흐르는 개울물 바로 가까이에서 왕씀배를 찾았다. 오늘 꽃산행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꽃이었다. 주로 물가에 자라는 기품 있는 풀. 풀은 다만 가만히 있었는데 모두들 자연스레 엎드렸다. 사진 찍는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 왕씀배. ⓒ이굴기

배를 깔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는데 많은 지식으로 도움을 주는 분이 나를 불렀다. 그분은 경주에서 오신 분이기도 하다.

"이것 좀 보세요. 백강균에 감염되어 죽은 메뚜기입니다. 백강균이 숙주에 침투해서 결국은 이렇게 흰 균사를 내뻗어 죽게 만든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 메뚜기는 흰 새끼줄에 칭칭 감겨 묶인 것 같기도 했다. 겉옷 한 장 걸치지 못한 채 맨몸으로 다릅나무의 허리춤에 붙어 있었다. 그래도 무슨 바스락 소리라도 나면 당장 어디로 폴짝 뛰겠다는 자세는 유지하고 있었다.

▲ 백강균에 감염된 메뚜기. ⓒ이굴기

개울을 건너 조금 올라간 곳에서 도시락을 폈다. 밥을 넣고 씹는 동안 졸졸졸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물은 돌을 만나면 얼른 형태를 바꾸었다. 급한 지형을 만나면 또 속도를 바꾸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물을 보는데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좀 전에 본 명태와 메뚜기. 차이는 있다. 명태는 수의를 입었고 메뚜기는 맨몸이었다. 명태는 고로쇠나무를, 메뚜기는 다릅나무를 붙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명태는 명태였고 메뚜기는 메뚜기였다. 그러나 같은 점도 있었으니 결국은 그들이 간 곳은 같은 곳일 것이다. 이렇게 물가에서 우물우물 씹고 있는 나도……그 언젠가는 가야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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