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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이 된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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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이 된 경찰

[해방일기] 1946년 10월 3일

1946년 10월 3일

9월 30일 우익 테러 단체들은 날개를 달았다. 용산기관구의 파업단을 유린한 그 날 오후 자유신문사와 공산당 본부가 습격당했고, 이튿날은 민전과 전평이 습격당했다. 용산기관구의 합동 작전을 통해 경찰과 우익 테러 단체 사이의 유대 관계가 공식화된 것이었다.

남조선 일대의 총파업으로 말미암아 인심은 극도로 흉흉한 중에 또한 테러가 횡행하여 언론 기관 좌익 단체 등을 습격하여 더 한층 민심이 날카로운 바 있었다.

30일 오후 4시 40분경 영락정 자유신문사에 모 청년 단체의 완장을 한 100여 명의 청년이 트럭 30대에 분승하고 습격해 와 동사 편집국장 외 3씨를 난타하는 한편 문선활자를 뒤엎고 유리창 책상 등을 파괴하였으며 또한 동일 오후 5시경 약 100명의 청년 단체는 남대문 앞 공산당 본부를 습격하여 동 빌딩 옥상에 걸린 붉은 기와 간판을 철거하였다.

그리고 1일에도 오후 5시 반경 안국정 민전사무국 중앙인민위원회 민청 등 사무소에 무장 경관이 경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의 테러단이 침입하여 후문 간판과 민전 깃발을 파괴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5시 40분경 서울 역전 전평회관에 모 단체원이 습격하여 간판을 떼고 기구 기타를 파괴하고 갔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5일자)

이 분위기는 10월 4일 속간된 <동아일보> 지면에도 연장되어 있다. "鐵道罷業과 其後動態"란 제목의 기사 중 "배후에 정치 모략"이란 중간 제목 밑에 이렇게 적었다.

검거한 용산 파업철도국원 1700여 명 중 파업 선동 주모자는 100여 명이었고 이들은 북조선과도 연락을 하는 한편 정치 단체의 지령에 움직였던 것도 속속 판명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각종 지령 서류와 계획서 등도 다수 경찰에 압수되었고 외부로부터 이를 선동 지도하려고 잠입한 분자도 다수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 중에는 "역 구내에 인민재판소도 설치"라는 자극적인 중간 제목도 들어 있다. 그리고 인명 피해 발생에 관해서는 "이번 사건으로 철도 종업원 측에서 즉사자 2명과 쌍방에 약간의 부상자를 내었다."고 했다. 진압 당일 장택상의 발표에서 "검거 당시 종업원의 저항으로 경관 7~8 명이 부상당하고 종업원 중에도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난 모양"이라 한 것과 대비된다. 며칠 지난 후의 신문에 "쌍방에 약간의 부상자"라고 한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파업의 기본 이유보다 정치적 배후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시 언론 중 <동아일보>의 특이한 자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기사 모두를 볼 수 있는 신문이 <동아일보>와 <자유신문>뿐인데, 10월 3일 속간된 <자유신문>에서는 정치적 배후에 관한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자료 대한민국사"에 발췌되어 있는 10월 2일자와 3일자 <조선일보> 기사 중에는 민생고만을 파업의 이유로 부각시키는 한독당, 인민당, 사회민주당의 담화가 소개되어 있다.

마침 <조선일보> 얘기 나온 김에 한 마디. 요즘 "조·중·동"이라 하여 3개 신문의 부정적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 많이 퍼져 있는데, 1946년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극단적 반공 노선에 집착하며 언론의 기본자세에서 벗어난 기사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극우 신문이었던 반면 <조선일보>는 <서울신문>과 별 차이 없는 중도적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의 신문 자료를 활용하는 데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이다.

총파업을 계기로 우익 테러 단체와 경찰의 고삐가 풀렸다. 이것이 10월 1일 밤부터 벌어진 대구 사태의 중요한 배경 요인이었을 것이다. 대구 사태의 상황은 10월 3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가 10월 4일 신문에 실리면서 비로소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구 중심으로 파업단 소동-경찰서를 습격 점거-경북 일대에 삼엄한 계엄령"

1만여 군중과 경찰이 충돌되어 경찰서를 점거한 소동이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 1대 각지에 발생되었다. 9월 25일 이후 대구에서는 40여 공장에서 파업을 단행하여 생산 각 부문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바 1일 밤중에서 2일 아침에 걸치어 파업 중에 있던 노동자들과 전문중등학교 학생 및 일부 시민들이 합류된 2만여 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를 습격 포위하여 장시간 경찰대와 대치 격투를 한 후 드디어 2일 상오 10시에는 경찰서를 점령하고 말았다.

이로써 경찰 측은 사망이 20명 부상 50명 행방불명이 30명이나 된다. 사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근 각 군에도 이에 유사한 일이 발생되어 당지 미군행정관은 계엄령을 실시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경찰서만은 다시 찾아 3일부터 집무를 하고 있는데 다른 곳은 아직 폭도에 점거된 채 있어 3일 충남북도의 경찰부에서는 700여 명의 경관을 응원 파송하고 한편 한종건 보안국장 외 모건 중위가 비행기로 현장 조사 수습차로 떠났다. 이처럼 큰 사건으로 그 진상을 중앙에서 잘 모르게 된 것은 통신관계의 지장 등인데 3일 조 경무부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였다.

"대구에서는 9월 30일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를 곧 제지하였었다.

10월 1일 파업 중에 있던 40여 공장 노동자들이 허가 받고 집회를 하였었는데 회를 끝마친 후 노동자들은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하여 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개시하자 경찰은 군중과 대치하게 되어 1일은 철야하고 2일 상오 10시 반을 중심하여 경찰서를 포위 한동안은 점거당한 일이 있었고 이와 아울러 인근의 다른 경찰서 지서도 무기를 강탈당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당하게 되었다. 이에 경북군정관은 계엄령을 내리어 사태 수습을 한 결과 대구부내에 한하여서는 미군의 응원으로 경찰 활동이 완전히 복구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른 경찰서 관내의 상태는 2일 하오 11시 현재로 복구 못한 상태에 있다. 현지의 소식으로는 민중의 사상은 아직 모르고 경찰은 사망자 20명 중경상자 50명 행방불명 30명이다. 이 긴급 사태에 있어 3일 충남서 400명 충북에서도 300명이 파송되었고 한 공안국장과 미군장교 등 4명이 비행기로 떠나서 사태수습총사령부를 두고 사태 수습과 경비에 만전을 다 하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4일자)

1923년 생으로 전평에서 활동하던 이일재는 당시 현장에 있었다. 사태 전환의 계기가 된 10월 1일의 경찰 발포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29, 30일에는 도청과 시청 공무원들도 파업에 들어갔어요. 그 즈음 철시가 되는 겁니다. 상인들까지 문을 모두 닫아걸었던 거죠. 그러더니 초하룻날 경찰 100여 명과 노동조합이 도 평의회 앞에서 대치한 거예요. 그 밑에는 세관이 있고 건물 하층은 운수노동조합이고 2층은 도 평의회. 내가 당시 도 평의회 간사를 했어요.

수배가 돼서 사무실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거기서 '남조선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라고 하는 현판을 걸려 하고, 미군정에서는 못 걸게 하고, 충돌의 발단이 거기서 시작된 거죠. 왜 못 걸게 해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잖아. 여하튼 경찰과 온종일 대치했어요. 그리고 해산될 무렵 노동자가 사살되었던 겁니다. 경찰이 철수하면서 시민들과 몸싸움 도중 발포했습니다.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75쪽)

이튿날 분노한 시민들이 피살자의 시신을 앞세우고 나선 '시체 데모' 앞에 경찰이 무너진 상황도 이일재는 회고했다. 경찰 지휘부에서 경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진해서 무장 해제를 한 데서부터 사태의 폭발적 확산이 시작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10월 2일 아침부터 대구의대, 사대, 상고, 고보, 여고 학생들이 하나로 뭉쳐 대구경찰서로 진격했어요. 여기서 이른바 '시체 데모'가 이루어진 거예요. 뭐냐 하면 경찰서로 향하기 전에 사대에서 모인 학생들이 어떻게 시위를 전개할 것인지 토론을 벌였어요. 그때 의대 학생들이 시체를 들것에 싣고 교내로 들어왔던 거죠. 전날 시위 현장에서 죽은 노동자의 시체였어요. 그것을 보자 토론이고 뭐고 필요 없이 합세해서 나아갔던 겁니다.

그때 경찰서에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 경북경찰청장 프레이즈 소령, 권영석 경찰청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성옥은 무장 해제를 원했어요. 말 그대로 무기고에 무기를 갖다 넣자는 겁니다. 하지만 프레이즈라는 놈은 자꾸 "쏘라"고 명령했어요. 그놈들이야 한국 사람들 죽는 거 생각할 게 뭐가 있겠어요. 껌 쫙쫙 씹으며 지프 타고 다니면서 사진만 찍는데. 결국 권영석 경찰청장이 대표자를 보내라고 해서 담판이 이루어졌어요. 우리 쪽은 아까 말한 이종하 선생님을 비롯해 채문식, 이재복, 송기채 같은 분들이죠. 권영석 청장이 무장 해제를 지시했어요.

무장 해제가 발표되자 시위대는 함성을 지르며 대구 평의회 앞에서 발포했던 250여 명의 경찰관들과 대구경찰서와 파출소에서 달아난 경찰관들을 쫓았고, 잡히는 대로 구타하고 죽였어요. 그리고 군중들은 부유층이나 고위층의 집을 털어 가져온 쌀과 광목 등을 달성공원에 실어다 놓고 나누어줬어요. 경찰력이 없어졌지만 시민들 스스로가 질서를 잡고 있었던 거죠. 완장을 차고 도로 정리하고, 청년들은 자경대를 만들어 도둑들도 막았어요. 누가 주동한 것도 아닙니다. 조선공산당이 지도했다고 하는데 그걸 지도할 여력이 어디 있겠어요. 정신적인 여력도 조직적인 여력도 없었어요. (<8·15의 기억>, 177~178쪽)

이일재의 회고는 저항 세력의 입장에 쏠려 있다. 마지막 문단에서 "시민들 스스로가 질서를 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을 '질서'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자신의 기록을 보더라도 경찰관 제복만 입고 있으면 구타와 살해의 대상이 되는 판인데? 경찰이 무장 해제를 결정하는 데는 최소한의 '질서'에 대한 이종하 등 시민 대표단의 약속이 있었을 텐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27년생으로 경북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강창덕은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당시의 혼란상을 회고했다.

사람들이 모두 대구경찰서 앞에 집결했죠. 대열에 있던 사람들에게 저기 죽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었느냐고 물었더니 어젯밤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이놈의 새끼들 말이야 무엇 때문에 총을 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어요. 우리는 처음에 의과 대학생이 죽은 줄 알고 분개했고. 그래서 앞쪽으로 파고들어 결국 경찰서 정문까지 갔어요. 그때 경찰 간부 한 사람이 나와 무슨 연설을 하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신재석 경위라는 사람인데, 뭐 연설을 하고 모자도 벗고 하더라고요. 경찰에서 손을 때고 시위대에 합류한 것이지요.

(…) 또 가는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런데 유혈이 낭자하게 부상을 입고 넋이 빠진 채 말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몇 사람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더라고요. 간호해주는 사람도 없이 말이죠. 보기에 마음이 안 좋아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이 왜 저리 됐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뭐 못되게 하다가 그래 됐지"라고 했어요. 그날 대구 시내 분위기가 경찰이나 일본 놈 앞잡이를 하면서 상당히 미움 받았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 두드려 팼던 것 같아요. (<8·15의 기억>, 186~189쪽)

'인민재판'이라는 말이 난폭한 재판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 왔지만, 인민재판조차 없이 인명과 재산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강창덕 같은 선량한 제3자가 부상당한 사람을 구호해 주고 싶어도 맞을 만한 짓을 한 놈이라는 막연한 한 마디에 막혀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일재의 회고에서 공산당에게는 항쟁을 지도할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전평에서는 저항을 강화하는 '지도'는 하고 있었다. 경찰이 스스로 항복한 상황에서 혼란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있었을까.

두 사람의 회고에서 10월 1일의 발포 사태에 대해 경찰 간부들도 떳떳치 못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떳떳치 못한 짓을 시키는 자들이 있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리 체포-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 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 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인물과사상사 펴냄), 299쪽)

경찰 최고위 간부들 중에 경찰을 우익 테러 단체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경찰관 중에는 그들의 자세를 기꺼이 본받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자들이 직속상관들의 명령 없이 10월 1일의 발포 같은 짓을 저지르고 다녔을 것이다. 양심적인 간부들은 경찰의 시민 학살을 막기 위해 무장 해제를 결심했고, 그 결과는 시민의 경찰 학살이었다. 마침 이 시점에서 서울 시내 경찰서에 미국인 고문이 배치된 것은 경찰의 고삐가 풀린 데 대한 경각심이 조금이나마 일어난 결과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각서에 미군 고문"

행정권 조선인 이관으로 말미암아 경찰행정은 직접 간접으로 복잡다번할 것이 예상되는데 군정청에서는 이 경찰사무를 원조협력키 위하여 위선 시내 각서에 미인 고문을 배치하였다. 이는 다른 관서와 같이 미인의 소속장관으로 된 미인서장의 느낌이 없지 않으나 이번 배치된 취지는 전혀 그러하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적 경찰의 참된 협조자로서 시무하리라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3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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