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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감염으로 '뱀파이어'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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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감염으로 '뱀파이어'가 되다니!

[親Book] 스콧 웨스터펠드의 <피프>

21세기 초 과학 소설(SF)의 화두는 장르 간의 결합이었다. '슬립스트림'이니 '스페큘레이티브 픽션'이니 '스트레인지 픽션'이니 하는 말이 비평이나 소설 서문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영국의 뉴 위어드처럼, 작가들이 앞장서서 자신들의 소설을 새로운 사조로 만들려고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변 소설, 경계 소설, 환상 소설 같은 말이 과학 소설에 붙어 나오곤 했다. 어쨌든 뭔가 이것저것 섞이다 보면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다시 한풀 꺾인 기세이지만, 이러한 논의는 예전의 '과학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던졌다. 이번에는 '어디까지가 과학 소설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1960년대 이후 과학 소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적 사고 실험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소프트 SF' 혹은 '사회적 SF(Social SF)'를 중심으로 팽창해 왔다. 과학 소설이라고 하면 독자들이 으레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물리학이나 천문학, 수학을 다룬 SF는 사실 처음부터 별로 많지 않았다.

어슐러 르 귄을 필두로 한 사회적 SF의 도약을 제하고 보아도, 정말 구체적인 과학적 사실은 과학 소설 시장에서 그다지 인기 있는 소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때는 21세기. 우주 개발은 유행이 지나갔고, 물리학이나 수학을 소설에서까지 보고 싶어 할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솔직히 몇이나 되겠으며, 보통 독자까지 사로잡을 만한 좋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하드 SF 작가 또한 한 줌인데다 대부분은 진짜 과학자 노릇에 바쁘다. 장르 간의 결합이라는 대세 앞에서, 낡은 하드 SF는 외따로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지식에서 소재를 뽑아내 이야기를 만든다'는 고전적인 하드 SF의 틀을 따르되, 모든 장르의 독자에게 '신선한' 소설이 이 흐름과 함께 나타났다. 스콧 웨스터펠드의 <피프>(이경아 옮김, 올 펴냄)가 바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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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프>(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이경아 옮김, 올 펴냄). ⓒ올
<피프>의 표지에는 '뱀파이어 추리 소설'이라고 쓰여 있다. 맞는 말이다. 이 소설은 뱀파이어 소설이고, 추리 소설이다. 그런데 미국도서관협회가 선정한 우수 청소년 도서이다. 게다가 전미과학소설작가협회(SFWA)가 수여하는 과학 소설에 수여하는 네뷸러 상 후보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1) 이 소설의 주인공 칼은 뱀파이어다. 게다가 (미남이라는 말은 없지만 뱀파이어니까 힘은 센) 젊은 남자 뱀파이어! (2) 칼은 나이트워치라는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한 미지의 여인을 추적한다. (3) 칼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뱀파이어가 되었고, 여전히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소년 같은 청년이다. 아, 물론 사랑에도 빠진다. (4) 칼이 뱀파이어가 된 것은 기생충 감염 때문이다.

뱀파이어 소설은 많다. 추리 소설도 많고 마음은 소년인 어설픈 청년이 경솔한 짓 한 번으로 인생 망쳤다가 마침내 새 사랑을 만나는 모험담도 많다. 그렇지만 기생충 감염으로 뱀파이어가 된다면? <피프>는 기생충을 매개로 뱀파이어를 전설이나 전통적인 판타지에서 과학 소설, 그것도 하드 SF에 가까운 영역에까지 끌어온다. <피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기생충에서 출발한 과학적인 이유가 있고 논리적인 인과 과정이 있다. 미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인물들조차도, 미치지 않았거나 미칠 만한 생물학적(기생충학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기억조차 희미한 원나잇 스탠드로 엉겁결에 뱀파이어가 되어 버린 칼은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여자를 찾기 위해 기생충의 숙주를 찾아 거슬러 간다. 그 과정에서 쥐떼도 잡고 다른 뱀파이어도 잡고 고양이도 쫓아다니고 미인의 집에도 숨어들어간다.

사실 <피프>의 홀수 장은 칼의 모험이고 짝수 장은 홀수 장의 진행에 유기적으로 결합된 기생충에 관한 토막 상식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이런 구성을 독자가 아예 눈치 채지 못하게 할 정도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다. 독자는 그냥 재미있는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책을 덮고 보니 기생충을 의식하는 몸(?)이 되어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기생충이라는 낯선 소재를 깊이 파고들어 이토록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 이 이런저런 꼬리표가 붙어 있는 소설은 놀랍게도 그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친 잡탕이 아니라. 그 모든 꼬리표에 정말로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책의 홍보 문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SF'이기도 하다. 그것도 아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고 젊은 SF.

작가는 후기에 기생충 감염 예방법을 유머러스하게 풀어 쓴 다음, 참고 문헌까지 덧붙여 놓았다. 아마 당신도 <피프>를 읽고 나면 웨스터펠드가 시키는 대로 손을 씻게 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이 책의 생생한 기생충 묘사에 압도당한 나는 이틀 정도 열심히 손을 씻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작심삼일의 날을 맞아 작가의 다섯 번째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다섯 번째 충고가 무엇이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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