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조선의 만성적 식량난을 "풍년 기근"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1945년의 쌀농사는 모처럼의 풍년이었고 일본으로의 강제 반출도 없어졌다. 38선 이남의 쌀을 상당량 이북에 보내도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이런 전망 위에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미곡 자유 시장"을 일반 고시 제1호로 발포했다.
주둔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미곡 시장 자유화를 서둘러 발포한 까닭이 무엇일까? 지주층을 대표하는 성향이 강한 조선인 고문단의 작용을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일반 고시 제1호는 미군정의 가장 중대한 실책의 하나였다. 두 달도 안 되어(11월 19일) 미곡 통제를 위한 일반 고시 제6호를 발포해야 했고, 이듬해 1월 25일에는 미곡 수집령을 법령 제45호로 발포해야 했다. 소련군과의 관계에도 이북으로 쌀을 보내지 못하는 사정이 큰 걸림돌이 되었다.
왜 예상 못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을까? 당시 사람들은 술과 떡 등 낭비 풍조, 일본으로의 밀수, 그리고 매점매석을 이유로 꼽았는데, 어느 것이 주된 이유였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낭비 풍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엄격한 의미에서 '낭비'라기보다 식민지 시대의 극심한 소비 억제가 풀림으로써 쌀 소비량이 크게 늘어났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식량난이 극심했던 사정으로 보아 밀수출의 동기도 충분하기는 한데, 미군의 개입 없이는 전체 식량 사정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규모가 크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46년 11월 5일 군정청 식량행정처장의 성명을 보면 이에 대한 의심이 파다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쌀을 외국으로 수출하였다는 낭설에 대하여서는 누차 군정 당국이 부인하여 왔었는데 다시 5일 군정청 식량행정처장 지용은은 거듭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명을 하고 외국으로 수출한 사실이 전연 없다고 자세히 밝히었다.
"최근 항간에는 쌀을 조선으로부터 일본이나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낭설이 있는데 이것은 전연 거짓말이며 이것은 미국에 대한 불신뢰감을 조장키 위한 기도에서 나온 중상입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은 아무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미군이 조선에 진주한 이래 쌀을 조선 이외의 지방으로 가져간 일은 정말 없습니다. (…) 조선곡류를 조선 외의 타지방으로 보낸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들에게 멀쩡한 거짓말하는 사람인 줄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8일자)
잘못된 식량 정책으로 많은 조선인, 특히 도시민들이 막심한 고생을 겪었고, 이것이 미군정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식민지 말기 전쟁기에도 1인 1일 2.5홉이 배급의 표준이었는데 1946년 전반기 대부분을 통해 겨우 1홉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배급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1946년 여름의 하곡 수집도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고, 심한 홍수로 인해 쌀 수확도 전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군정청은 식량 정책을 엄중한 문제로 생각하고 1946년 8월 12일에 다음 미곡년도 미곡 수집을 위한 식량 규칙 제2호를 발포했다.
"1946년 12월 1일부터 1947년 8월 1일까지의 8개월간 조선인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곡 수집에 관한 국가 계획을 완비함"에 목적을 둔 식량 규칙 제2호의 요점은 할당된 분량의 공출을 집행하는 데 있었다. 집행 대상은 자작농과 소작농이었다. 이에 대한 좌익의 대표적 반응을 9월 22일 민전 담화문에서 볼 수 있다.
민전에서는 식량 대책으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식량 문제의 해결은 오직 북조선에서와 같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과 토지 적은 농민에게 토지를 분여하여 주는 무상 몰수 무상 분여의 토지 개혁을 즉시 실시하고 식량의 수집과 배급을 즉시 인민의 손으로 넘기어 지주와 모리배들의 은닉 매점 집적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식량 문제의 당면 정책도 오직 이러한 원칙적인 방법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남조선에서 이러한 원칙적 해결이 즉시 실시되기를 우리는 요구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2일자)
민전은 토지 개혁을 통한 "원칙적 해결"을 주장했다. 그에 비해 우익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이례적으로 군정청 정책에 예리한 비판을 가한 8월 17일자 사설 "미곡 수집령의 검토"에서부터 이 주장의 방향이 나타난다.
지난 13일 내 미곡연도에 비하여 미곡 수집 계획을 확립하려는 중앙 식량 규칙 제2호를 발표한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에서는 뒤이어 곡 식량 집배에 관한 범위와 그 행정 계통과 수속 및 그 직능 등을 규정한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였다. (…) 미곡 수집상 가장 중핵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표준 가격은 후일 신문 지상에 발표하기로 되었으나 대체로 이 규칙의 내용이라는 것은 전 일정 시대의 소위 공출 제도와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할 것 이외에는 다만 준열한 벌칙을 규정하였다는 것만이 주목될 뿐이다.
(…) 미곡수집의 일방적 강화는 실제에 있어서 결국 농민의 희생을 강요함과 다름이 없는 일이며 따라서 미곡 수집에 있어서도 금 미곡년도에 체험하고 있음과 별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현금의 하곡 수집 상태가 이를 실증하는 일이다.
민주의원에서 8월 19일에 그리고 한국민주당에서 8월 22일에 '식량 대책(안)'을 내놓았는데,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 가장 중요한 주장은 소작농이 지주에게 지불할 소작료만을 수집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예상 수확고 2000만 석 중 500만 석을 점하는 소작료만을 수집해도 비농가 인구 600만 명의 배급에 충분하니 그 밖의 쌀은 자유 판매를 허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토지 개혁을 시행하지 않는 한에서는 합리적 대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소작농이 소작료를 지주가 아닌 관청에 납부하고 그 공출증을 전해 받은 지주가 '공정 가격'에 따라 쌀값을 현금으로 받는다는 것은 지주층에 불리한 방안인데, 어떻게 지주 세력에 기반을 둔 한민당에서 이런 방안을 내놓았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쌀의 자유 시장이 활발해지면 공정 가격도 어느 정도 현실화될 것을 기대한 것일까?
아무튼 행정력도 부실한 상황에서 지나친 규제가 경찰의 횡포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규제를 최소화하려는 민주의원-한민당의 대책에는 바람직한 면이 분명히 있었다. 지나친 규제가 매점매석과 암시장을 부추기고 있었고, 경찰은 투기 현상 방지보다 서민을 괴롭히는 데 힘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식량 규칙 제2호 발표 후 종래의 미곡 수집령 폐지 방침이 알려지자 불과 10여 일 사이에 쌀값이 10퍼센트 가량 떨어졌다. 행정과 경찰의 규제가 쌀 품귀 현상에 적지 않은 몫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奏效! 쌀 길 트는 비상조치-춤추고 나오는 '쌀'-가격, 반입 철폐 소리에"
시세에 맞지 않는 38원의 쌀값과 반입 통제 망에 걸려 근년에 없는 대풍작이면서도 지난 정월달부터 쌀 걱정을 하게 된 주요 도시의 인민들의 생활난은 지금 극도로 위기에 이르러 비명을 올리고 있다. 이리하여 군정 당국에서는 이 타개책으로 신곡이 나올 때까지는 종래의 미곡 통제령을 근근 일제 폐지하기로 되어 이 보도가 한번 신문에 발표되자 창고 속에 잠자던 쌀은 재빨리 속속 튀어 나오고 있다.
미곡 통제 법령이 근일 중에 발표되리라는 소식이 한 번 발표되자 (…) 이래서 이날 시세는 전일에 530원하던 것이 벌써 30원이 떨어져 500원 이내로 보리 역시 30원이 떨어져 400원대까지 내렸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천정을 모르고 올라만 가던 쌀값이 요사이 떨어져 가고 있다. 즉, 신곡 수집 계획이 완성되기까지 자유 판매로 된 것과 금년 신곡의 풍작을 예상한 농촌 저장미의 다량의 시장 진출과 아울러 하곡 수집의 원만 등으로 520~30원 하던 쌀값이 28일 현재 450원대로 폭락되었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30일자)
식량 규칙 제2호라 해서 미곡 통제를 없앤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시장 상황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에 앞 미곡년도의 통제령과 다음 미곡년도의 통제령 사이에 잠깐 풀어주는 정도의 조치였던 것 같다. 불과 10여 일 후 식량행정처에서 통제 계속을 발표하자 '1보 후퇴'했던 쌀값이 금세 '2보 전진'으로 돌아섰다.
중앙식량행정처에서는 11일 미곡의 불법 매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경고를 발하였다.
"군정청의 허가 없이 미곡의 매도 매입 운반 축적 등은 8월 12일부로 발표된 중앙 식량 규칙 제2호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그리고 법령 제45호 77호 87호의 개정은 중앙 식량 규칙 제2호에 의한 정부 미곡 통제 계속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금년 가을의 미곡 수집과 배급에 대한 군정청의 계획은 조선 사람 정부에 대한 공평 정당한 식량 배급을 확보함에 있다. 양미 시장에서의 미곡 매매를 하는 사람은 매국적 범죄 행위자로 누구든지 발각되는 대로 법적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2일자)
일시 떨어지는 듯하던 시중의 쌀값이 다시 뛰어올라 불과 1주일간 내외에 100원가량이 올라 식량난으로 곤란중인 시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터인데, 이같이 오른 것은 그동안 지방에서 소량으로 들여오던 쌀을 못 들여오게 한다고 지난 11일 중앙 식량행정처에서 발표한 때문에 시중의 쌀이 자취를 감추게 된 탓인데 이에 대하여 14일 경성 지구 물가 감찰부에서는 상부로부터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쌀 문제는 일체 간섭치 않을 방침이라고 성명한 바 있어 아직은 지방에서 다소간 식량을 가져온다든가 시중에서 매매하는 문제는 완전히 묵인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곡 사정의 실제로 보아도 군정 당국으로서 현재 배급되는 식량 이상의 배급은 신곡이 나오기까지 있을 수 없다고 하므로 농촌에서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쌀이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들여오도록 하여 부족한 식량을 어느 정도로 보급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이상 지금까지 묵은 쌀을 지방에서 들고 오거나 지고 오는 정도의 것은 당연히 묵인되어야 할 정세에 있는 터로 경찰이며 기타 당국의 의향도 다 같은 태도인 것은 작금의 폭등한 쌀 사정에 관하여 크게 참고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5일)
생필품 제1호인 쌀값이 군정청 방침에 따라 이렇게 널을 뛰니 투기꾼들은 살 맛 났을 것이다. 군정청 방침을 예측할 수 있던 사람들은 앉아서 떼돈 벌었을 것이다. 결국 부담은 민중에게 돌아오는 것인데, 민중의 지팡이는 그러지 않아도 힘든 민중을 더 힘들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을 다하고 있었다.
19일 아침 서울역내에서는 한두 말 혹은 대여섯 말을 지고 들고 오는 승객의 쌀을 모조리 취체하는 경관이 빼앗았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0일자)
경찰청에서는 19일부터 일제히 쌀 취체를 개시하였는데 이에 관한 장 경무총감은 다음과 같은 단호한 태도로 임할 것을 언명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쌀값은 아니 내려가고 모리배의 도량은 더욱 심하여 가고 대중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다. 남조선의 인민은 사선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왕 이렇게 해도 쌀이 대중의 손에 들어오기는 틀린 일이니 경찰로서는 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집이고 모리배 창고이고 간에 무엇이든 불문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적발되는 대로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돈에만 눈이 어두운 그런 놈들에게는 추호의 용서도 동정도 있을 수 없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0일자)
쌀 취체를 개시한 19일부터 20일 오전까지 경찰청에서 압수한 쌀은 잡곡을 합하여 약 300가마니나 되는데 19일 오전부터는 마포 용산 방면으로 전력을 주력하여 은닉미의 적발에 착수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1일자)
자가용으로 한두 말씩 지고 오는 쌀까지 경찰관이 압수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제1경무총감 장택상은 21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모리성 있는 쌀만 압수할 뿐이지 그 외 것은 간섭치 않는다. 경찰관이 정거장에서 압수하고 있는 것은 경기도의 부탁으로 운수경찰이 협력하였을 뿐이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2일자)
21일자 <서울신문> 기사에서 압수 미곡이 모두 약 300가마니라 한 것을 보면 소량 휴대품이 분명하다. 19일에 장택상이 "무엇이든 불문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적발한다고 한 것은 소량 휴대도 취체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21일에 한 말은 다르다. 모리성 있는 쌀만 압수한다고 우기면서 정거장에서 있었던 취체는 "경기도의 부탁"에 협력하였을 뿐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대구 항쟁이 다가오고 있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296쪽에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 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1923년생으로 전평 활동을 하다가 대구 항쟁에 참여한 이일재도 이렇게 회고했다.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이런 일도 있어요. 46년 초부터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환자가 수용소 가면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수용소라도 약을 안 주고 격리 수용하는 방법 외에 도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배고파서 드러누워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를 환자로 오인해서 수용소에 보내는 사례도 있었죠. 콜레라에 걸려서 누워 있는 사람이나 굶어서 누워 있는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았던 거죠.
(…) 식량 얘기 하나만 더 하지요. 1946년 9월 29~30일, 초하루~초이튿날 '기아 행진'을 했어요. 대구 중심지들은 일본 놈들이 살았던 곳이고, 비산동-내당동-남산동-대명동 일대 변두리 사람들이 기아 행진을 벌였어요. 100명, 200명 무리지어 시청이나 도청에 쌀을 달라고 항의하러 갔던 겁니다.
시장실을 찾아가 왜 쌀을 안 주느냐고 따졌더니 시장이란 작자가 한다는 소리가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살림한다는 계집들이 먹을 양식도 준비 안 해놓고 뭘 하느냐?"
이건 실언도 아니고 폭언이지, 폭언.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런 소릴 하다니! 그러고는 일본 놈들이 놓고 간 세탁비누 두 개씩 가져가라는 거야. 더욱 화가 치민 여자들이 말하더군요.
"느그 집에는 세탁비누 묵고 사나?"
농촌의 빈민들이야 초근목피라도 있다지만 도시 빈민들은 아무것도 없으니 쌀 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당시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는데, 전부 륙색을 메고 다니는 거예요. 열차를 타고 대전에 내려 호남에 가서 뭐든지 가지고 가 쌀과 바꾸는 거죠. 쌀을 구해오는 게 모든 가족들의 일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해요.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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