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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 꿈꾼 정조, 그 불편한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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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 꿈꾼 정조, 그 불편한 진실은?

[프레시안 books] 김태완의 <경연, 왕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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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경연(經筵)은 이상한 제도이다. 왕은 배우고 신하들은 가르친다. 성현(聖賢)이라고 부르는 옛 철학자, 역사가들의 고전(古典)을 함께 읽는다. 그러면서 토론한다. 정책도 끼어들고, 현안도 끼어든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국부론>이나 <자본론>, <순수이성비판>이나 <로마제국쇠망사> 등을 읽으면서 국정을 논하는 자리였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한가하게 보이기도 우활하게 보이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아니 그전에, 경연이란 자리는 정말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슨 얘기들이 오고 갔을까? 정말 제대로 공부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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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이 책은 제목에서 보다시피 조선 시대의 경연이 그 중심 주제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글로 써서 알리고 싶은,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생긴다. 많은 학자들이 힘이 닿는 대로 글을 쓰지만 미처 시간이나 여력이 안 되어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누가 써주면 마치 짐을 덜어준 듯이 고맙다. 내 경우에 경연이라는 주제가 그런 류에 속한다.

나도 경연에 대해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에서 한 꼭지를 쓴 적이 있다. 또 지금도 한국방송(KBS) 국제방송의 <역사 프리즘> 프로그램에서 매주 소개하는 익숙한 주제이다. 익숙할 뿐 아니라,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생각보다 연구가 안 되어 있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소개가 되어 있지도 않아서 내내 마음이 급하고 아쉬웠다가 이 책을 보게 되었으니 나만 갈증이 풀리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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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평자는 조선 시대 문치주의를 이끌어간 세 제도(制度), 그러니까 '문치주의의 트로이카'라고 이름 붙인 세 제도로 경연-언관(言官)-사관(史官)을 꼽는다. 각각 공부하면서 비전을 나누고, 정책을 펴면서 비판하고, 정리하고 평가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역할을 맡고 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소통, 비평과 비판, 대안과 전망이 그들의 삶을 책임감 있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것이 단순히 왕조가 아니라, 문명으로서의 조선을 만들어간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치주의의 트로이카가 작동을 멈추면서 조선 문명은 대안을 찾았고, 왕조 역시 기울어갔다. 경연은 문치주의의 세 솥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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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경연과 왕의 하루, 2장 경연에 관한 모든 것, 3장 경연의 기록 그 숭고한 작업, 이다. 크게 보면, 1장과 2장에서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경연에 대해 소개했고, 3장은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발췌하여 해설하는 형식을 취했다. 1장과 2장을 보면 대개 경연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도록, 경연의 역사, 목적, 경연관, 교재는 물론 경연 방식, 누가 경연을 잘하고 못했나 등까지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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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묻고자 한다. 굳이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일이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지평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눈으로 그 일을 봐야 하는가?" (19쪽)

이 대목, 이상하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묻는다. "역사적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지 않고 어떻게 의미를 물을 수 있지?" 역사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에서 의미를 물을 경우, 그것은 필연적으로 초역사적 기준에 기대게 마련이다. 그게 오히려 저자가 우려한 결과를 초래한다.

저자가 정말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하지는 않'았다면, 다시 말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식의 의미 부여를 벗어나고자 했다면, 먼저 역사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에 충실해야 했다. 바로 이어서 저자도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묻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역사학 전공이 아니기에 하는 겸사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역사적 맥락'은 선택이 아닌 존재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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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연은 이상한 제도 같지만 매우 보편적인 성격의 제도이다. <사기(史記)> 권97 '육가열전(陸賈列傳)'에서 육가는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항변하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말한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이는 문(文)과 무(武)가 인간 문명의 중요 요소인 국가의 작동에 대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각축을 벌일 때는 전투,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끝나면 정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유지되어야 한다. 일상의 안정 속에서 경제적 생물학적 생산, 문화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기획, 계획, 조정, 분담, 협력 등이 필요해진다. 일상의 유지를 한 마디로 하면, 그건 '제도'이고, 육가는 이걸 말 위에서 칼로 할 수는 없다고 통찰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연도 무슨 고매한 이상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할 무엇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필요성, 그 필요성을 해결해가는 실천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경연은 조선이라는 현실 속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실천일 뿐이다. 이것이 역사성이다.

저자도 서술했듯이 고려 시대에도 경연을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경연에 해당하는 제도를 고려 시대에서 찾으라면 그것은 경연이 아니라 국사(國師), 왕사(王師)라고 불리던 고승들에게 법문을 듣는 법회(法會)이다. 같은 이치에서, 현재 청와대에서 경연을 열더라도 그것은 흉내는 될 수 있지만 조선 시대 경연이 했던 기능을 할 수는 없다.

경연의 긍정적 가치를 국왕이나 누구의 개인적 교양에서 찾는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정치 제도로서의 경연에서 찾는다면, 현대에는 다른 정치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경연이 아니라 현재 정치 활동의 실천에 맞는 뭔가의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맥락이다. 정말 우리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좋더라도 '그때 좋았던'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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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는 듯.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광조에 대해) 현대에서도 철학 쪽에서는 조광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예가 많은 반면, 정치학이나 사상사 그리고 역사학 쪽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촉의 유비에 대해 역사학자 사마광과 철학자 주희의 평가가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처럼, 철학자의 이념적 지향과 역사학자의 결과에 따른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동기주의에서는 왕도를, 결과주의에서는 패도를 옹호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122쪽)

티옌무(錢穆)는 주희를 탁월한 역사학자라고 평한다. 그의 견해에 따라 본다면, 역사학자 사마광/철학자 주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철학자의 이념적 지향과 역사학자의 결과에 따른 평가'도 그리 적절한 대비는 아닌 듯하다. 특히 '동기주의에서는 왕도를, 결과주의에서는 패도를 옹호하는 것'이란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성리학의 역사 해석은 이치와 형세라는 두 가늠좌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치는 원칙, 이상, 동기의 영역을 대변하고, 형세는 결과, 성과, 승패의 영역을 해석한다. 아무튼 오해의 여지가 있는 서술은 보완하거나 삼가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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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 한 마디. "이이가 경연에 참석한 뒤 '은밀히(?)' 남긴 <경연일기(經筵日記)>"라는 구절이 있는데(123쪽), 율곡이 <경연일기>를 '은밀히' 남긴 것이 아니라, 경연관은 사관을 겸직하기 때문에 일기를 남긴 것이다. 사관은 늘 사초(史草)를 기록하면서 춘추관에 상근하는 전임사관이 있고, 본직을 수행하면서 사관을 겸하는 겸임사관이 있다. 홍문관이나 사간원, 사헌부 등 주요 관청에는 그 기관의 기록을 관리하기 위해 전원 또는 일부 관원에게 사관의 임무를 맡겼다. 경연을 맡은 홍문관은 전원 사관을 겸직했다. 그런 까닭에 율곡이 <경연일기>를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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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경연의 모범생, 문제아를 다룰 때 좀 더 길게 다루었으면 싶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물론 생각해볼 만한 해석의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세조는 친강(親講)이라는 이름으로 배우기는커녕 자기가 문관, 무관, 종친, 유생, 세자까지 가르쳤다. 아마 그래서 말년에 병으로 고생한 듯하다. 연산군은 경연에 내시 김순손을 보냄으로써 조선 국왕 최초로 대리 출석의 영예를 얻은 인물이었다. 문제아 중에 광해군이 빠졌다. 발병도 잘 나고,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경연에 나오지 않았다. 궁금한 분은 나의 <기호일보> 연재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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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하나. 저자는 간단히 언급했지만 군주이면서 스승이고자 했던 정조의 군사론(君師論)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요즘 정조를 높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마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말아도 될지 모르겠다. 정조가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는 데 대해서 이의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그 뛰어난 학자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군주였고, 또 그가 군사론을 꺼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사림 정치는 당초 학문과 정치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이 제한된 사회의 반영이다. 즉, 사림 정치의 특색이면서도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래 학자가 사유를 통해 발견한 정치 원리를 제시하여 이를 현실에 시행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정치적 관계란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또는 원리의 제시와 이것의 집행이라는 관계로 이해되기 쉽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정치의 약속>(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의 견해이다. 이때 다른 정치 행위자들의 자유와 자율은 훼손되어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로 남게 된다. 이를 '철인(哲人)-왕(王)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철인'은 사실 '스승'과 같은 말이다.

다행히 사림 정치는 붕당을 기반으로 정치 활동을 하지만 붕당의 지도자가 곧 '왕'은 아니었다. 즉, 가장 강력한 권한과 조정의 담당자인 국왕에게 자문하고 권유할 수는 있으나 '철인=왕'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성상(聖上)'이란 말은 국왕에게 '성군(聖君)'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이니 국왕이 곧 성인(聖人)이란 말은 아니다. 국왕을 '통해서' 정치 원리를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림 정치였기 때문에 자신이 건의한 의견을 국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조정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군사론에 따라 국왕=철학자=스승이 될 경우, 아니 되고자 할 경우 '철인-왕 콤플렉스'는 작동한다. 즉 정치의 본질을 철학적 태도로 포착하는 위험성이 드러나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하나는 자기의 정치철학적 원리를 따르는 사람에 대한 것으로, 그들을 정치 과정에서 소외시키고 지시 이행자의 역할에 머물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폭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 교만에 빠지고 결국 타인의 조롱을 받는다.

차라리 후자일 경우 문제가 덜 하다. 이러한 폭력성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므로. 그러나 정조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정조가 너무 영민하고 성실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비상한 두뇌와 집요한 성격은 타인의 조롱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너무도 정당한 방식'으로 쌓아 올린 학문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를 구상하고 실현하려고 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친강이라는 이름으로 신하들을 가르치려 들었던 것이 찬탈 군주의 일탈이었다면, 정조가 군사(君師)를 자처한 것은 사림 정치로부터의 일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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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은 재미. 사실 평자는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고봉의 경연 기사는 보았지만, 고봉의 <논사론>은 보지 못했었다. 마침 <경연, 왕의 공부>에는 고봉과 율곡의 경연일기가 실려 있고 그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서 음미하며 읽는 재미가 적지 않다. 그냥 곁에 놓고, 한 대목씩 읽고 있는데, 오늘은 245쪽 선조 2년 4월 29일 문정전에서 열린 조강을 읽었다.

이날 <논어> 위령공 편을 공부했고, 4월인데 눈과 우박이 내리자 걱정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4월은 음력이므로 4월 29일은 요즘으로 치면 5월 말, 6월에 해당한다. 이때 눈과 우박이 내렸으니 걱정이 될 법도 하다. 고봉은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며, 원통하게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라고 간언한다. 우리 시대에 여름에 내리는 눈은 무엇인지, 억울한 일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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