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 방황하니 청춘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프니까 청춘이다? 방황하니 청춘이다!

[프레시안 books]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방황의 기술>

"가장 큰 수확과 즐거움을 거두고 싶은가?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산 기슭에 그대의 도시를 지어라!"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우리 시대, 이 말은 염장 긁는 소리로 들린다. 위험하게 살라고? 이미 우리 삶은 충분히 위태롭다. 청년 실업은 얼마나 많은가. '사오정(사십오 세 정년)', '오륙도(오십육 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같은 시쳇말은 상식(?)이 되었다. 어디에도 안정은 없다. 그런데 언제 터질지 모를 베수비오 화산에 집을 짓듯 살라고?

니체의 말에 속 뒤집혔다면,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방황의 기술>(장혜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꼭 읽어야 하는 독자라 해도 좋겠다. 시간 내서 곰곰이 따져보라. 인생에서 '안정'은 가능한 꿈일까? 세상에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 법이다. 차곡차곡 저축하면 뭐하나. 뒤집혀진 금융 시장은 순식간에 평생 노력을 집어삼킬지 모른다. 철밥통 직장을 얻었다고? 밥통의 단단함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예컨대, 외환 위기가 나기 전까지 은행은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꼽혔다. 지금은 어떤가?

안정은 환상일 뿐이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내 삶을 쥐고 흔들어 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은이 라인하르트의 충고는 군대 훈련소를 떠올리게 한다. "피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즐겨라!" 변화를 피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서고 도전하라는 뜻이다.

▲ <방황의 기술>(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책은 자기 계발서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철학 상담자(Philosophical Counsellor)'이다. 철학 상담에서는 대증(對症) 요법은 통하지 않는다. 보이는 증상만 없앤 채, 다 치료했다며 손 털지 않는다는 뜻이다. 철학은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되짚는다. 이제 라인하르트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삶에서 안정은 없다. 결국 우리는 방황을 피하지 못할 테다. 어차피 방황할 운명이라면 제대로 헤매야 한다. 그래서 깨우침을 얻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방황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라인하르트는 몇 가지 '방황의 기술'을 일러준다.

먼저, 방황을 하려면 출발점이 분명해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10년을 떠돌았다. 키르케 같은 미녀를 만나 7년이나 깨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오디세이아>도 '허무 개그'에 지나지 않을 테다.

오디세우스는 결코 고향을 잊지 않았다. 우리의 방황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헤매기에 앞서 내가 떠나온 곳, 돌아갈 지점을 머리에 새겨야 한다.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나는 분명 예전에 내가 아닐 테다.

하지만 돌아갈 출발점을 찾기도 결코 쉽지 않다.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뭘까? 이 물음에 쉽게 답하는 '현대인'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너무도 복잡한 삶을 산다. 내가 맡은 역할은 하나 둘이 아니다. 게다가 꿈틀거리는 숱한 욕구들을 갈래잡기도 쉽지 않다. 출발점을 분명히 하려 했다간, 방황을 떠나기도 전에 혼돈에 빠질 테다.

철학 상담자 라인하르트가 이 점을 놓칠 리 없다. 그는 돌아올 곳을 찾는 좀 더 손쉬운 방법을 일러준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같은 덕목(德目)을 나침반으로 삼는 기술이다. 플라톤 시대에도 이 네 가지는 삶을 다잡는 잣대였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혼란 가운데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한다.

출발점을 잡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방황을 시작해 보자. 방황하려면 무엇보다 멈춰 설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뭘 하는지 곱씹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업도 쉽지 않다. 세상은 촘촘하게 얽혀있다. 나는 굴러가는 한 집단의 '부품'이다. 또한, 내가 속한 집단은 더 큰 사회에 일부이다. 나아가, 사회는 국가의 한 부분이 되어 톱니바퀴처럼 굴러간다.

방황한답시고 내가 '부품'의 자리를 버리면 어떻게 될까? 집단은, 사회는, 국가는 나를 대신할 '부품'을 금방 구할 테다. 그러면 방황을 끝낸 후 내가 돌아갈 곳이 있을까?

이런 고민에 라인하르트는 헛웃음을 짓는다. 뭘 걱정하는가? '일의 기술'을 아무리 철저하게 익혀봐라. 그래봤자 '삶의 기술'은 전혀 늘지 않는다. 일하느라 바쁜 하루는 삶이 제대로 굴러가는 듯한 착각만 줄 뿐이다. 언젠가 나는 일에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일한다고 해서 인생의 허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미뤄지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내게도 공허와 막막함이 밀려들 테다. 막장에 다다라서야 '내 삶은 무엇일까?'라고 묻고 싶은가?

사람들 대부분은 불안과 걱정이 밀려들 때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든다. 모임을 잡고 일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고민을 잊기 위해서다. 그러나 삶이 흔들릴 때 정말 해야 할 일은 멈춰 서서 고민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인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가 된다. 자유가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반면, 자유의 능력을 갖춘 사람은 노예 상태에서도 자유롭다. 라인하르트는 시시포스를 예로 든다. 시시포스는 신들에게서 벌을 받았다. 그래서 무거운 돌을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한다. 정상에 이르면, 돌은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돌을 산 정상까지 밀고 와야 한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카뮈는 산으로 내려오는 시시포스를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신(神)들도 시시포스를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다. 시시포스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있는 탓이다. 시시포스는 헛헛한 상황에서도 '선택'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절망해야 할지, 아닐지를 말이다.

우리 삶도 시시포스와 다르지 않다. 매일의 일상은 시시포스의 돌 굴리기와도 같다. 힘겹게 노력하지만, 성과를 내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테다. 정상에 오르면 다시 원점(原點)으로 되돌아가는 식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은 괴롭다.

고민을 없애려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면 어떨까? 당장의 고통은 잊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삶에 발전은 없다. 반면, 산을 내려오는 시시포스처럼 자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은? 똑같은 일을 겪었어도 삶의 질과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은 늘 신산스럽다. 그러나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보라.

"가장 큰 수확과 즐거움을 거두고 싶은가? 위험하게 살아라!"

독방은 최고의 형벌에 꼽힌다. 왜 그럴까? 온종일 아무런 '변화'가 없는 탓이다. 변화도, 위기도 없는 삶은 지옥이다. 비정규직이 넘치고 정리 해고가 일상이 된 시대다. 그러나 불안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흔들린다고 내 삶이 불행해야 할 까닭은 없다.

생각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나는 <방황의 기술>을 이 땅에 불안한 청춘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들에게는 이미 방황할 '권리'가 있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