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속에서 그녀가 곧 출간될 자신의 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가지 제목을 갖고 고민 중이라는 둥, 책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 둥, 이 책은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리갈겨 썼다는 둥, 편집자와의 교감이 너무 좋다는 둥, 정혜윤의 아직 나오지 않은 '그' 책에 대한 수다는 끝이 없었다. 아산으로 가는 중에도 편집자로부터 여러 차례 전화가 왔다. 물론 그 책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얼마가 지난 후, <여행, 혹은 여행처럼>(정혜윤 지음, 난다 펴냄)이 출간되었고 내 손에도 들어왔다.
나는 정혜윤이 지은 책을 모두 갖고 있지만 사실 어느 것 하나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독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을 거두절미하고 나름대로 요약해 본다면, '그녀만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고전 책 속 이야기로 점프하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청스럽게 자기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다가는 정혜윤의 머릿속에 세워져 있을 것 같은 세상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여행, 혹은 여행처럼>(정혜윤 지음, 난다 펴냄). ⓒ난다 |
내 자신을 불량 독자라고 하는 이유는, 책을 읽을 때 차근차근 읽지 않고 내 멋대로 책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는 버릇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추리 소설을 읽을 때도 결론부터 보고 거꾸로 처음으로 돌아가면서 읽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정혜윤의 글 같은 작가의 의식의 흐름의 결을 따라 가야하는 글에 내 자신의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은 조금 달랐다.
나의 여행과 나의 인생은, 나의 삶은 어떤 관계일까? 나는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보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보단 차라리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지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가본 최고의 여행지 혹은 잊을 수 없는 여행지, 추천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물었다.
"당신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지요? 어떤 방법과 생각으로 그 여행을 계속했지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책에는 정혜윤이 만난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여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여행처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정혜윤 특유의 점프하는 듯한 출렁거림이 책 곳곳을 넘나들고 있었지만 그 진폭은 조금 잦아들었다. 그러면서 잔물결은 더 다양하게 늘었다. 나 같은 불량 독자도 편하게 마음을 맡기고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흡입력이 깊어졌다. 아마 이렇게 고백하면서 정혜윤이 사람들 속으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당신이 누구든 당신은 내 여행길에 뛰어든 여행자들이다. 나 또한 당신이란 여행지에 뛰어든 여행자다. 이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나를 내치지 말아 달라.
아산에 있는 후배의 개인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여전히 내리 뿜고 있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인터뷰 자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잡아갔다. 별을 좋아하는 천문대장 후배도 나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쏟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옛날 추억을 되살려서 이야기 하고 있던 후배가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혜윤은 묵묵히 눈물의 순간을 지켜준 다음 또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유쾌한 수다를 떨었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서 정혜윤을 만난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녀의 특기 중 특기는 인터뷰를 할 때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려놓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들도 무장 해제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그렇게 그녀와 공감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기꺼이 정혜윤의 '여행지'가 되었을 것이다.
희망 버스를 쏘아올린 시인 송경동 이야기로부터 사람을 위한 지도를 만드는 송규봉에 이르기까지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순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정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할머니 시인들의 이야기였다.
일흔두 살까지 문맹이었던 한충자 할머니. 일생 동안 음성 고향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는 한충자 할머니. 노인 복지관 한글반에서 한글을 배우고 나서 군대에서 남편이 보냈던 편지에 50년 만에 "당신을 마난 지가 벌써 50년이 지났군요"로 시작하는 답장을 보냈던 한충자 할머니. 그 한충자 할머니가 쓴 시 '무식한 시인' 전문이다.
시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
배운 사람이 시를 써 읊는 거지
가이 갸 뒷다리도 모르는 게
백짓장 하나
연필 하나 들고
나서는 게 가소롭다
꽃밭에서도 벌과 나비가
모두 다 꿀을 따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벌들은 꿀을 한보따리 따도
나비는 꿀도 따지 못하고
꽃에 잎만 맞추고 허하게 나아갈 뿐
청룡도 바다에서 하늘을 오로지
메마른 모래밭에선 오를 수 없듯
배우지 못한 게 죄구나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써도
나중엔
배운 사람만 못한
시, 시를 쓴단다
시어머니 시중을 들면서 밤마다 시를 써내려간 한충자 할머니는 진짜 시인이 되었고, 정혜윤은 질문 속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끝없이 많은 질문을 갖게 되었다. 무식하다는 것은 뭘까? 배운다는 것은 뭘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노력한다는 것은 뭘까? 농사꾼이 밤에 시를 지으면 그 시는 농사꾼의 낮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자신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은 또 이렇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녀들은 시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시를 심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그녀들이 시를 심는 땅의 이름은 삶이었다. 동시에 그녀들이 뿌리는 씨앗도, 쓰는 시도 삶이었다. 거기서 수박과 고추와 벼와 함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참다운 기쁨과 즐거움이 꽃처럼 피어난다. 나 역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내 인생에 심고 싶어졌다.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 방송을 내 인생에 심고 싶어졌다.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여행을 내 삶 속에 심고 싶어졌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을 통해서, 아니 그 책을 준비하고 쓰면서, 정혜윤도 한충자 할머니처럼 변해간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녀는 그녀를 세상에 심고 있다고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코 훌쩍거리는 소리와 헛기침과 침 삼키는 소리, 이상한 발음과 말더듬만으로 이뤄진' 정혜윤의 비밀 테이프를 듣고 싶어졌다. 장래희망이 '포도 밟는 여자'였다가 지금은 '사람 만나는 여자'가 된 그녀에게로 <여행, 혹은 여행처럼>의 겉표지 안쪽 사진 속 우주왕복선을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
여러분도 그녀에게로 여행을 가보시라. <여행, 혹은 여행처럼> 속으로. 정혜윤이 이렇게 외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 삶에서 한 여행자가 나를 여행지의 풍경처럼 바라볼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고 싶다. 나 또한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의 풍경을 바라보듯 그를 바라보고 싶다.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육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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