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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무이파가 안겨준 뜻밖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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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무이파가 안겨준 뜻밖의 선물

[꽃산행 꽃글] 태풍 뒤에 걸은 지리산 둘레길

태풍 뒤에 걸은 지리산 둘레길

세력에는 종류가 많다. 주먹 세계에도 세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주먹 쥐어도 잡히지 않는 바람의 무리에도 힘 쎈 놈이 있다고 한다. 남녘에서 그 세력이 몰려온다고 했다. 점차 위력이 대단해진다고 했다. 이름도 독특했다. 무이파라 했다. 태풍이었다. 저 아랫녘에서부터 세력을 점차 긁어모으며 북상하는 중이라 했다.

지리산에 가기로 했다. 산장 예약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월요일을 끼고 세석 산장 한 구석을 빌릴 수 있었다. 여름 휴가를 쓰기로 하고 팀을 꾸렸다. 일요일 용산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구례구에서 내려 성삼재로 올라가 지리산 능선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세석에서 1박하고 다음날 천왕봉 갔다가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 달맞이꽃. ⓒ이굴기

지난 8월 첫째 일요일. 오전부터 뉴스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예정했던 날이 다가오자 점점 태풍 소식이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태풍의 진로를 중계하는 뉴스에서는 아예 지리산을 꼭 찝어서 폭우가 쏟아진다고 했다. 낮 12시가 넘자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긴급 공지를 했다. 지리산 입산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물 때문에 이번 지리산행은 거의 물 건너가는 듯 했다.

이번 산행을 주도한 형한테 아예 설악산으로 방향을 바꾸든가 다음을 기약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일행은 형의 친구1, 친구2. 그리고 친구1의 대학생 아들과 그 아들의 친구. 모두 여섯이었다. 나와 형을 빼곤 지리산이 초행이었다. 태풍에 맞서기에는 너무 모래알 같은 조직이었다. 나는 태풍 핑계를 대고 배낭을 슬슬 풀 심산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전체의 뜻이 파악되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식구들이 이틀 집을 비우는 것에 맞춰놓은 계획들이 있는데 지금 와서 안 가면 어쩌느냐고 한단다. 2. 설악산은 다음에 가더라도 어쨌든 지리산으로 가자. 3. 비가 오면 맞아주자. 이왕 가기로 한 것 일단 가자. 종주를 못한다면 원주라도 하자.

▲ 사위질빵. ⓒ이굴기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용산역에 모여 밤기차를 탔다. 등산객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람들은 망설이기라도 하지만 기차는 정확히 제시간에 출발을 했다. 천안을 지날 무렵 식당 칸으로 가서 캔 맥주를 하나씩 땄다. 차창으로 굵은 빗줄기가 엉겨 붙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걱정이 층층이 쌓이기 시작했다. 산에서 맞는 비야 어쩔 수 없다지만 처음부터 비를 맞고서 산으로 가는 게 무리는 아닐까. 태풍도 사납다는데 내용물들을 비닐로 포장을 했지만 배낭은 괜찮을까. 쉽게 잠들지 못하는 가운데 기차는 대전을 지나고 비는 더욱 세찬 폭우로 변해 나의 걱정을 두들기면서 퍼붓기 시작했다.

▲ 층층이꽃. ⓒ이굴기

새벽 3시 20분 남원역에 도착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말짱했다. 비가 흔적도 없었다. 남원의 밤하늘은 말똥말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조용한 아스팔트만 물기로 번들거렸다. 남원역은 외곽에 있어서 시내까지 택시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약 1시간 전에 비가 그쳤다고 했다. 내릴 만큼 내렸으니 이젠 이 지역에는 하늘에도 물의 재고가 바닥이 났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남으로 내려온 만큼 태풍은 북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 남원역 앞 새벽 도로. ⓒ이굴기

지리산 둘레길이 시작하는 주천면 장안리 외평 마을은 조용했다. 개들도 곯아떨어졌는지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새벽에 부지런한 분들도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분들은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것을 보고 잠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비가 몰아치는 것으로 여기고 모처럼의 느긋한 늦잠을 준비하는지도 모르겠다.

혼곤히 잠든 외평 마을. 모래알도 마당도 지붕도 감나무도 바람도 구름도 논도 밭도 제 각각의 역할에 충실하는 순간. 이 한순간만을 제대로 기록하자면 몇 권의 책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우리는 몇 걸음만에 이 마을을 지나버렸다.

▲ 참나리. ⓒ이굴기

장비를 점검하고 배낭을 추스른 뒤 개울을 따라 난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랜턴으로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의 화살표를 확인했다. 어둠이 팽팽하게 전신을 조여왔다. 간밤 지리산에 도착한 빗물이 벌써 하산하며 도랑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 논밭 사이길을 따라 산으로 바로 들어섰다. 처음은 작은 산을 완전히 넘어야 하는 코스였다. 둘레길치고는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다. 깔딱고개를 만나 땀을 한번 닦는데 멀리서 외로운 불빛들이 보였다. 서울에 사는 동안 좀처럼 만나기 힘든 새벽의 빛이었다.

▲ 소나무 가지에 걸린 멀리 마을의 불빛들. ⓒ이굴기

문득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둘레길은 잘 발달되어 있어 걷기에 힘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어두웠다. 산중에서 믿을 것이라곤 이마에서 뻗어나오는 가냘픈 불빛뿐이었다. 더구나 계곡길이다 보니 하늘에 있는 별빛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던져진 동그란 면적의 한 무더기 불빛을 과녁 삼아 잘 올라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둠에도, 산길에도, 나무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물은 아래로 내려가는데 물소리는 우리를 따라 자꾸 위로 올라왔다. 어둠이 가시고 헤드랜턴의 불빛이 새벽빛에 차츰 사위어갈 무렵이었다.

그 물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산의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사물이 차츰 분명해지고 하늘의 구름도 윤곽을 갖추었다. 우리가 갔어야 할 지리산 하늘길이 눈에 들어올 무렵 우리는 랜턴을 껐다. 하늘에 불이 완연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중식 시인의 시 '이탈 이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심이 있었을 땐 敵이 분명했었으나 이제는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불빛이 무슨 적이랴만 어둠 속에서 등산할 때엔 눈앞의 불빛만 보고 가면 되었다. 그러나 불빛이 사라지고 하늘이 빛을 비추자 과녁이 그만 너무 넓어져버렸다. 너무 넓은 과녁은 이미 과녁이 아니다.

▲ 마타리. ⓒ이굴기

종주를 하는 등산객이었다면 과녁은 봉곳한 봉우리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름 밑을 천천히 걷는 원주객들에게 과녁은 주로 들녘이었다. 들에는 황금 물결을 예비하는 푸른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의 여정을 지명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날 오전. 주천면-내송 마을-솔정지-구룡치-회덕 마을-노치 마을-덕산저수지-질매재-가장 마을-행정 마을-양묘장-운봉읍까지. 점심은 삼겹살로 포식을 했다. 오후에는 운봉읍-서림공원-북천 마을-신기 마을-비전 마을-군화동-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 마을-인월면까지. 붕어찜으로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두워 민박을 했다. 꿈 없는 잠을 자고 일어나 다음 날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인월면-중군 마을-수성대-배너미재-장항 마을-장항교까지.

한편, 이번 지리산 둘레길가의 주요 야생화를 내 카메라에 입장한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추리-닭의장풀-털갈퀴덩굴-맥문동-좀깨잎나무-큰뱀무-짚신나물-물봉선-참싸리-금계국-노루오줌-미국자리공-꽃며느리밥풀-달맞이꽃-향등골나물-사위질빵-배롱나무-채송화-털별꽃아재비-개쑥부장이-층층이꽃-참나리-만수국-박주가리-쥐손이풀-부들-마타리-원추천인국까지.

▲ 원추천인국. ⓒ이굴기

우리를 구름과 동행하지 못하게 하고 잠자리들과 눈을 맞추며 걷게 한 태풍 무이파(MUIFA). 제9호 태풍 '무이파'는 마카오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서양자두꽃'을 의미한다고 한다. 비록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지리산 치맛자락에 숨어있는 마을의 냄새를 만끽한 것은 다 그 꽃 덕분이다.

장항 마을 쉼터에서 점심을 겸해서 라면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일어났다. 우리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으며 꽃 이름도 가르쳐 주었던 네 분의 여고 동창생 일행은 먼저 떠났다. 금계까지 간다고 했다. "담에 올 땐 우리 집에서 민박해! 송이 구워줄게!" 덤으로 가게 할머니의 은근한 유혹을 귀에 꽂으며 불콰해진 얼굴로 지리산 둘레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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