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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죽여야 진짜 노자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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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자'를 죽여야 진짜 노자가 산다!

[프레시안 books] 송기원의 <못난이 노자>

어려운 <노자>를 쉽게 풀었다고?

이 서평은 본래 지난주에 실렸어야 하는 글이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나는 지난주에 원고 마감을 어겼고, 펑크를 냈다. 다행스럽게도 글을 청탁한 분께서는, 속으로는 섭섭했겠지만 겉으로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하면서도 속으로 고마웠다. 물론 원고 마감을 지키지 못한 까닭은 바빠서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나는 <노자>로 박사 학위를 했다. 그것도 왕필(王弼)이라는, <노자>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그의 <노자주>, 그리고 하상공(河上公)이라는 가장 이른 <노자> 주석서 가운데 하나를 비교하는 논문이다. 요즘에는 그래도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주석서이긴 하지만, 내가 학위 논문을 쓸 당시만 해도 하상공은 종교 서적으로 분류되어 <노자> 주석서로서는 크게 대접받지 않는 게 한국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노자> 자체를 연구하는 것과 <노자>의 주석서를 연구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내가 쓴 학위 논문에서 만들어 낸 용어가 '천(千)의 얼굴을 가진 노자'이다. <노자>는 책 그 자체가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있고, 또한 <노자>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들 각각이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있어서, 도무지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옛사람들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자>에는 어느 것이 정통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할 근거도 없고, 어느 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할 근거 또한 없다. 학위 논문에서 이미 그런 결론을 내린 터라, 난 <노자>에 관해 현대의 학자들이 내놓은 다양한 해석들에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몹시 불편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 때문이다. '파랑물'이라는 어느 알라딘 독자의 댓글은 이러하다.

"이 책이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어려운 노자를 쉽게 풀었다고? 상습적인 작전인데. 노자가 못났다고? 생판 처음 들어보는 얘긴데. 우뇌를 쓰든 좌뇌를 쓰든 뇌는 마음, 마인드를 작동시킨다. 노자의 핵심은 '무심'이다. 무심은 우뇌와 좌뇌를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노자를 알기 위한 정말 필요한 책은 안 나오고 이런 얄팍한 책들만 나오고 그걸 읽는 자들은 이게 노자의 다 인줄알고. 차라리 노자를 모르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댓글을 단 날짜가 8월 10일자로 되어있으니, 책이 나오자마자 읽고 쓴 말인 듯싶다. 꽤나 부지런하고 또 <노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독자인 듯하다. 그런데 내가 쉽사리 이 책 <못난이 노자>에 서평을 쓸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독자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어려운 <노자>를 쉽게 풀었다고? 정말?

<노자>란 바로 이 '뒤집기'

▲ <못난이 노자 :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도덕경>(송기원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이젠 좀 솔직하게 내 속내를 털어놔야 할 듯하다. 사실 <못난이 노자 :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도덕경>(녹색평론사 펴냄)은 책 제목에 붙은 부제만큼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책의 내용이 어렵다거나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첫째 이유는 바로 저자의 무게 때문이다.

난 송기원이라는 작가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조금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대학원 시절 이후 난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다. 그래도 귀와 눈은 있어서 송기원이란 작가가 꽤나 유명한 분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 무게감이 서평을 수락한 이유였다. 그런 유명한 분이 소설로 <노자>를 풀어내었으니,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갖고 세상에 <노자>의 새로운 얼굴 하나를 창조할까? 이런 점이 궁금했다.

그런데 <못난이 노자>를 받아든 순간, 난 아연실색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먼저 저자 자신의 말부터 들어보자.

"<못난이 노자>는 자칫 소설로도 보이고 자칫 <도덕경>에 대한 주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못난이 노자가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소설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가 못난이 노자가 <도덕경>에 대한 주석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석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소설인지 주석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바로 작가의 이 말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노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기도 하고 <노자>에 대한 주석서이기도 하다. 그 점이 내게는 아주 힘겨운 일이다. 소설이라면 소설로 읽으면 되고, 주석서라면 주석서로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소설이면서 주석서라면, 어디에 무게를 두고 읽어야 할까?

나 혼자 읽으면 그 뿐이라면 마음에 느껴지는 대로 읽으면 그만이겠지만, 난 서평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난 <노자>를 '전공'한 학자가 아닌가! '서평'이라는 것은 아무리 피한다 해도 책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평가를 들이 댈 기준이 소설인지 주석인지 불분명하다면, 이건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마도 알라딘 독자의 서슬 퍼런 평 또한 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난 책의 서평을 주문한 기자에게 '한 방' 먹었다. 또 저자에게도 '한 방' 먹은 것이다. 거저먹기 식으로 쉽게 서평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소설처럼 아주 쉽게 잘 읽히는 책인데도 서평을 쓰기는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 송기원에 의해, 철학책 <노자>는 이렇게 소설의 얼굴까지 하게 되었으니 저자의 말처럼, "<노자>란 바로 이 뒤집기"란 말은 성공한 셈이다.

천하무적 못난이 시다바리 되다!

작가는 <못난이 노자>를 "처음 쓰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드디어 그 끝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작가의 변(辯)을 들어볼 만도 하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본다.

"돌이켜보면 노자며 <도덕경>에 대하여 자신만이 느낀 뭔가를 쓰고 싶다는 충동에 빠진 것은, 내가 한 5년 남짓 가정이며 사회생활마저 나 몰라라 팽개친 채 계룡산이며 지리산 혹은 인도의 히말라야를 여기저기 헤맨 끝 무렵이기도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때 나는 소위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바로 그 도를 찾느라고 여기저기 산속을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나에게 도라는 것은 무슨 세상을 다스릴 거대한 사상이나 담론 혹은 로망 따위가 아니고, 어디를 보아도 끔찍하고 참담하며 못난 것투성이일 뿐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도망치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나는 자기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망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5년 남짓한 방황 끝에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깨달은 도란, 세상의 가장 훌륭한 스승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끔찍하고 참담하며 못난 것투성이일 뿐인 자기 자신이며, 그런 자기 자신이 살아낸 똥 덩어리 같은 삶이라는 것이었다."


<못난이 노자>는 이렇게 해서 태어난 작품이다. "어디를 보아도 끔찍하고 참담하며 못난 것투성이일 뿐인 자기 자신"은 바로 작가의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을 그는 <못난이 노자>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못난이 노자', 즉 19살의 고등학교 3학년짜리 자아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못난이 노자'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대학 교수 아버지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여류 명사의 사이에서 태어난, 말하자면 '문제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못난이가 죽고 못 사는 아니 심지어 존경하는 여자 친구는, "가출을 하거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스스로 돈을 벌어보거나, 술 담배를 하거나, 하여튼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들을 죄다 해 본"(14쪽) 은정이다.

<못난이 노자>의 주인공들이 이러하니, '노자를 알기 위한 정말 필요한 책'을 구하는 어느 독자에게 작가는 무척이나 송구스러워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말했지 않은가! "<노자>는 바로 뒤집기다"라고! 참, <노자>의 "거꾸로 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라는 말을 또 한 번 뒤집은 것이다. 독자의 아연실색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하지만 작가에게도 이유는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개인사를 가진 '못난이 노자'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주인공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목수의 시다바리가 되고, 또 그의 눈부시고 황홀한 여자 친구 은정이와 결혼한다는 게 기본적인 소설의 내용이다. 어떤 학부모가 보아도 그리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닌 게 틀림없다. 문제아 고3 학생이 결국 공부는커녕 대학을 포기하고 목수의 시다바리로 끝나는 인생 아닌가!

그렇다면 '도덕'(道德)이란 무엇인가?

<노자>란 책은 '도덕경'(道德經)이다. 사실 그것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지어낸 인물 공자의 스승 '노자'(老子)와는 그리 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덕'(德)이다. 도가 이 세계가 움직이는 커다란 원리나 법칙을 말한다면, 덕이란 바로 그러한 원리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도록 하는 '힘(power)'이다. 그래서 아서 웨일리라는 연구자는 "세계가 운동하는 길과 그 힘(The Way and Its Power)"이라고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 송기원은 못난이 노자가 사랑하는 문제아 은정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은정이에게는 가령 인생이란 것도 중국집 밀가루 반죽처럼 얼마든지 주물락주물락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아서 나까지 상쾌할 때가 많습니다. 아아, 자기 인생마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그렇게 내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힘-심약한 나로서는 그저 꿈이나 꾸었지 실제로는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그 힘을 은정이는 얼마든지 넘쳐나게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이 주물락주물락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작가는 못난이 노자의 두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되묻는다.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시민 단체의 여류 명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못난이 노자'! 과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글을 쓰고 외치던 그 분들이, 이제는 자식을 문제아 취급하며 학벌의 재생산에 여념이 없다면, 과거의 그 이념과 투쟁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은정이가 가출한 이유도 재미있다. 은정이는 자신의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인 '용'(龍)이라 부른다. 헌데 그 '용'은 시골에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죽어라 공부해서 고등고시 합격하고 판사 되고 변호사 된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 용이 애오라지 찾는 것은 '일등'이다. 은정이는 이렇게 말한다.

"개천에서 난 용하고 같이 살려니 어디 내 정신이 정상이겠니? 당연히 무슨 우울증이니 정신 분열이니 공황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렇게 해서 내가 스스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나중에 그걸 안 용이 나한테 한 첫마디가 뭔 줄 알아? 깔깔, 그 정신과 의사가 어느 대학 나왔냐는 거야. 물론 일류냐, 아니냐는 거지. 그리고 그 의사가 일류 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결국 용이 선택한 곳으로 병원까지 옮겨야 했지."

이렇게 보면 '못난이 노자'나 그의 여자 친구 불량소녀 은정이 또한 고귀한 신분(origin) 출신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못난이일 뿐이다. 왜냐하면 버림받거나 포기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못난이 노자>는 결코 부모가 자식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닌 것이다. '고귀한' 철학책이 '못난이'들의 정당화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함석헌이 그리워지는 까닭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있다. 사람들은 대개 <노자> 하면, 철학 그리고 도올 김용옥을 떠올린다.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기웃거리던 때에 전 국민을 상대로 방송에서는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의가 이루어졌고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방송 강의가 가능했던 데에는 1980년대 함석헌의 <노자 강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역사는 크게 변하려 하고 있다. 물질주의, 지식주의, 권력주의, 적극주의의 서구 문명이 차차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그 산업 방법, 그 학문, 그 종교를 근본에서 고쳐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때를 당했다."(<씨알의 옛글풀이>, 34쪽)

1980년대 독재 치하 대학의 강단에서 고상한 '철학' <노자>가 강의될 때 함석헌은 지식, 권력, 물질을 비판하며 <노자>를 읽으며 비폭력과 평화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씨알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며, 군부 독재의 수괴들에게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며 씨알의 삶을 간섭하는 '유위'(有爲)를 버리고 '무위'(無爲)의 정치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런 '유위'의 강권 통치가 물러나고, 그러한 독재를 타도한 힘들이 이제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리고 우리 서로서로를 못난이와 잘난이, 부자와 빈자, 학벌의 일류와 이류로 나누는 또 다른 권위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 그러한 시대에서 '성공한 이'가 제 자식마저 같은 논리로 희생양 '못난이'로 취급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작가는 묻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 이날까지의 옛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 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이다. 그럴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은 권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다. 또 저쪽을 승인시키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 (…) 그렇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다. 그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었다." (<씨알의 옛글풀이>, 21~22쪽)

이렇게 씨알의 자리에서 읽어낸 함석헌의 <노자>야말로, 내가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라는 책에서 간곡하게 말했듯이, 우리 시대의 상식을 만든 <노자> 해석이었다. 환경과 생태,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 종교 간의 화해, 비폭력 평화주의의 철학 등등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노자> 이해는 대개 함석헌 옹으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못난이 노자>의 목소리도 괜찮을 것 아닐까? 과연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주물락주물락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자신, 우리 아이에게 주고 있는 것일까?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느 모로 보나 못난이일 뿐인 자신을 믿는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남들의 눈이 아닌 바로 자기의 눈으로 못난 자신을 보고, 그렇게 자기의 눈으로 못난 자신의 안에 있는 어떤 소중한 값어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남들에게는 여전히 못난이일 뿐이지만 바로 그 순간에 천하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 송기원이 말하는 '못난이 노자'는 이런 말을 통해 볼 때, 니체의 초인이나 <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에 가깝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만들고 겪어내고 살아가는 그 힘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덕'(道德)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내 인생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힘을 작가가 말하고 있다면, 이 책은 19살 못난이가 아니라 권력과 돈을 가진 세대가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새롭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진리는 새로운 것이 없는 법이다. 진리는 얼굴을 바꿀 뿐, 그 내용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못난이 노자>는 볼수록 다시 함석헌을 그립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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