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무슨 증상인가? 혹시 치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언젠가는 닥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직 그건 아닐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혼자 고개를 저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머릿속에 벌꿀이나 꿀벌은 같이 박혀 있어서였던 것 같다. 벌 이야기가 내겐 곧 꿀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2년, 내 아주 젊고 힘 좋았던 날, 나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2봉 아래 밀림 지역에 갇힌 적이 있었다. 몬순 때문이었다. 우기인 줄 알고 입산했지만, 그때만 해도 히말라야 지역의 몬순이 그렇게 길고 무서운 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겪던 장마 정도로 이해했던 게 만용의 토대였다. 비가 멈추지 않으니까 자꾸만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히말라야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자갈 사막도 있고, 초원도 있고, 설원(雪原)도 있고, 밀림도 있다. 안나푸르나2봉 아래는 밀림 지역이었다. 해발 6000미터의 시클리스라는 마을에서 걸어 하루 정도 걸리는 산막(山幕)까지가 사람이 갈 수 있는 종착지였다. 마을에서 농사짓고 사냥하는 샤먼이 지어놓은 산막에는 방이 없었다.
진흙 바닥 한 가운데에 화덕이 있었는데, 그것은 화덕이라기보다 수십 년간 바닥을 파서 불을 지펴왔기 때문에 화덕이라 말해야 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젖은 나뭇가지를 태우면 연기가 났고, 연기가 사그라지면 숯이 되어 잔잔한 열기를 냈다. 문도 벽도 없는 그곳 화덕, 불씨가 있는 곳이 곧 문명사회로 말할라치면 거실에 해당되는 공간이었다.
잠자리는 소를 치던 외양간에서 해결했다. 쇠똥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쇠똥물이 흐르는 속에서 한 달 이상 머물렀다. 처음에는 쇠똥 냄새가 났지만, 나중에 그곳에서 자는 사람이 냄새의 일부가 되니 더 이상 냄새 따위는 못 느끼게 되었다. 비는 멈추지 않고, 천둥 번개는 한 번 쳤다 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산막 바로 뒤에는 8000미터가 넘는 안나푸르나2봉의 설산이 거대한 신처럼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비만 바라보고 앉아 있기 너무나 심심해서 어느 날 산막 주인과 같이 우리는 꿀을 따러 더 깊은 밀림으로 들어갔다. 산막 주인은 마을의 샤먼이었고, 샤먼만이 '꿀 사냥(Honey Hunting)'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책 이야기를 해야 하는 때인지라 그때 그곳 히말라야 밀림의 벼랑에서 석청(石淸)을 따던 이야기는 뒤로 미뤄야겠다. (우리가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이후 수년간 한국에서 요란한 '석청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나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으니 앞으로도 함구할지 모르겠다.)
실망 : 다시는 넘어가지 않으리라!
▲ <꿀벌을 지키는 사람>(한나 노드하우스 지음, 최선영 옮김, 더숲 펴냄). ⓒ더숲 |
<워싱턴 포스트>는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가는 한 사람의 삶과 노력의 산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 그리고 감동의 이야기"라고 했고,
그뿐 아니라, "과학적 교훈이자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경쾌하고도 놀라운 읽을거리"(<보스턴 글로브>), "살아 있는 이야기로 대성공을 이루어낸 한 편의 멋진 이야기. 수출과 같은 경제를 설명하면서 사랑과 꿀벌의 기적을 묘사한다. 꿀 같은 부드러움으로 시들어져 가는 벌 지킴이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키커스 리뷰>). "폭넓은 깊이에 있어서 이 책은 정말 탁월하다. 무엇보다도 정교한 글쓰기가 놀랍다. 이 책은 꿀벌 세계의 다양하면서 우리와의 밀접한 부분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읽으면 즐겁고 눈을 새롭게 뜨게 하는 책이다"(<알터넷>)라고 했다. 그 나라도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 만들려고 사재기를 하고 책이 나오면 기자에게 술자리를 만들거나 촌지를 주는지 몰라도, 찬사들은 천편일률적이지만 후하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미국의 언론이 이 책에 처음 붙였던 주례사 조의 찬사를 이렇게 지루하게 소개하는 것은 책 광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런 동어반복의,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놀라운 찬사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상하게도 이 책이 매우 재미가 없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프레시안 books'의 K 기자가 이 책을 내게 소개하면서 원고를 부탁할 때, 별 저항 없이 그러마고 할 때 내 속에는 다소 종말론적 흥분이 있었다. 뭘까? 벌이 사라지고 있다, 벌이 사라지면 우리 인간 종도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이 책을 만나면 나의 종말에 대한 확신이 더욱 깊어지고 정교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운동가적인 과도한 관심' 말이다. (참고로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명색이 소설가인데, 소설은 안 쓰고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가면 안 된다"는 글만 수십 년간 주야장천 써대고 있다.)
그런데, 종말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면 깊어진 확신을 갖고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면 세상이 더 고약해질 것이라고 만날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해서 대체 뭘 얻겠다는 수작일까? 나는 왜 이런 어두운 주제를 이렇게 환호할까? 도대체 뭘 어쩌자는 이야기란 말인가! 습관이 된 우려가 나 자신이나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된단 말일까?
그래서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인 존 밀러라는 양봉가는 상당히 중구난방의 제멋대로인 인간이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지만, 나는 이 치밀하고 성실하지만, 재미딱지 없는 책에 대해 원고를 쓰겠다고 말한 데 대해 가슴을 치면서 자책에 자책을 거듭했다. 다시는 K 기자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청탁의 음성에 넘어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심기가 불편했다. 먼 나라의 벌을 지키는 한 '또라이'의 이야기가 내게 뜻밖의 자성(自省)을 촉구한 셈이다.
사랑 : 황홀한 하지만 뜨거운 독침의 추억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80쪽부터 '독침 고통 지수' 이야기가 나오면서 지루해하던 내 마음에 밝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비록 책 자체야 큰 부피가 아니지만, 벌과 꿀에 관한 한 워낙 치밀하고 방대한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거기다 5년여 세월에 걸친 작가의 생체험이 수려하고 성실한 문체에 담겨 그 자료들이 단지 현학을 뽐내는 자료 나열이나 벌꿀에 관한 박물지를 넘어서는 문학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니 양봉업자들이 생활처럼 쏘이는 벌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지경일 수도 있었다.
1984년 독침으로 유발되는 고통을 상대 평가한 독침 고통 지수를 처음 고안해낸 이는 애리조나 주의 곤충학자 저스틴 슈미트였다.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독침은 0점,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독침은 4점으로 책정했다. 독침에 쏘였을 때의 감각한 분류한 이 지수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1.0 땀벌(Sweat bee) : 가볍고 짧으며 강력하다. 작은 불꽃이 팔에 난 털 한 가닥을 태우는 듯하다.
1.2 애집개미(Fire ant) : 날카롭고 갑작스러우며 약간 놀라운 정도.
1.8 불흔 아카시아 개미(Bulhorn acacla ant) : 경험하기 힘든 날카롭고 높은 고통. 누군가 볼에 스테이플러 침을 쏜 것 같다.
2.0 북아메리카 말벌(Bald-faced hornet) : 풍부하고 강하면서 약간 아삭아삭한 느낌. 회전문에 머리가 끼어 으깨어진 기분과 같다.
2.0 옐로재킷 벌(Yellowjacket) : 뜨겁고 그을린 느낌으로 불쾌하다. 미국의 코미디언 필즈가 당신 혀에 담배를 끈다고 상상해 보라.
2.x 꿀벌과 유럽 호박벌(Honet bee and European honet) : 선명하고 사그라질 줄 모르는 고통. 살을 파고든 발톱을 빼내기 위해 누군가 드릴을 사용한다고 상상해 보라.
3.0 종이말벌(Paper wasp) : 통렬하고 타는 듯한 느낌 확실하게 매서운 여운. 종이로 벤 상처에 염산이 든 비커를 쏟은 것과 같다.
4.0 타란튤라 호크(Tarantula Hawk) :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감전된 느낌. 거품 목욕을 하는 와중에 작동 중인 헤어드라이어가 목욕물에 빠진 것과 같다.
4.0+ 총알개미(Bullet ant) : 순수하고 강렬하며 찬란한 고통. 마치 발뒤꿈치에 3인치짜리 녹슨 못이 박힌 채 불꽃이 타오르는 숯을 넘어 불 속을 걷는 것과 같다. (184쪽)
이 정도 긴 분량을 내가 이토록 성실하게 인용하는 까닭은 히말라야 밀림에서 나 역시 머리에 벌침을 두세 방 쏘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방까지 쏘인 것은 기억하는데, 이후 몇 방을 더 물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깊고 심오한' 20여 년 전의 고통을 나는 표현할 방도를 못 찾았다. 히말라야의 벌은 우리 산천의 말벌과 같은 크기였다. 나중에 듣기로 세계에서 가장 센 벌이라고 했다.
해발 5000미터 언저리의 척박한 땅에 핀 야생화를 밀원(蜜源)으로 삼는 녀석들이니 크고 '스트롱'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의 벼랑에 매달린 어린아이 몸통만한 벌집을 벼랑 아래에서 젖은 쑥을 태운 연기로 쫓아내자 허공에 흩어진 공격 조들 수만 마리가 벼랑 아래의 사람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연기가 멈추지 않자 벌집을 덮고 있던 벌들이 서서히 벗겨졌고, 벗겨진 뒤에 나타나는 황금빛 밀랍의 광채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밀림에서 마치 작은 태양이 갑자기 떠오른 것 같았다. 그 광경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목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광경들의 극치였다.
나는 자연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몬순 때 히말라야 오지만 돌아다니며 허니 헌팅 사진만 찍은 친구들이 그 사진집으로 퓰리처상을 거머쥐었을까.
놀라움과 환희에 찬 얼굴로 벼랑의 황금빛 밀랍을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공교롭게도 내 동료들 넷 중 나만 벌침에 쏘였다. 쏘이기 직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무서운 속도로 하늘 높은 곳에서 검은 화살촉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쏘여도 연속해서 몇 방을 물렸다. 머리에 물렸다. 나는 태어나서 질러본 가장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하나밖에 없는 머리통을 부여안고 벼랑 아래 개울가 바위틈으로 몸을 숨기려고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벌침은 쏘여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쏘인 벌침의 고통 지수는 아마 3.5나 4.0 언저리는 될 것이다. 뼈를 깎는 고통, 이따위 말은 함부로 뱉거나 글로 쓰면 안 된다. 그 고통은 뜨겁고 강렬하면서 순수하고, 가차 없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의 뿌리는 심연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고통의 강도가 이토록 깊을 수도 있구나, 나중에 내가 겨우 설명한 이런 말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 고통이었다. 언어는 사람이 경험한 것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는 썩 좋은 도구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독침에 쏘인 고통을 연구한 이 곤충학자는 실로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가 연구한 대상은 곤충이었는데 인간의 고통까지 덩달아 연구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으면 그런 극심한 충격의 대가로 머리라도 좋아져야 했을 텐데, 그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벌침에 쏘인 뒤에 소득이 있다면, 더 이상 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점이다. 수년 전 마당의 정자 안지붕에 매달린 커다란 조선백자만한 말벌 집을 겁 없이 달려들어 쉽게 딴 것도 내게는 독침에 대한 면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긴장 : 사라진 벌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주 양봉업자 존 밀러는 '또라이'다. 시골 날건달이었다. 대학에도 갔지만 재미가 없어 얼른 때려치웠다. 젊은 날 사고를 쳐서 백인인데도 감방에 간 적도 있었다.
밀러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사람들이 살다가 버린 광야다. 꽃이 있는 초원이다. 그는 비록 수다쟁이이고, 깨놓고 말하는 사람이고, 들판에서 6개월이나 혼자 보낼 수 있는 겁이 없는 고독한 친구이지만, 사람보다 꽃을 더 좋아한다. 그가 키우는 몇 만 마리 벌이 그런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꽃인지 벌인지 나중에는 스스로도 헷갈려 한다. 아마도 벌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양봉가였고, 할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인 증조부도 양봉가였다. 4대째 양봉업 가문이지만, 밀러의 자식들은 양봉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암울하기만 합니다. 경제는 형편없고, 물류는 골치 아픈 문제이며, 벌들이 사라지는 전염병이 돌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볼 때, 양봉업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아주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자연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 모두 양봉업에서 벗어나 회계사나 변호사, 벌꿀 포장업자가 되었지요. 나는 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느냐고요? 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벌들은 근면하고 말도 잘 듣습니다. 이기심도 없습니다. 아주 관대한 동물이지요. 나는 이 소명과도 같은 직업이 좋습니다." (79쪽)
실제 그는 매우 거친 사람이지만, 벌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착하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말할 때 착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사랑 때문에 사람은 착한 말을 하곤 한다.
이 책에는 허약한 기록이긴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벌 이야기부터 이집트 파라오도 꿀을 먹었다는 벌의 기원 , 벌의 생태, 벌 도둑놈들, 꿀 도둑놈들, 벌과 얽힌 산업들 등 벌과 같이 살아온 인류 역사가 꼼꼼하게 개괄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2007년) 들어 대규모로 벌들이 사라진 '벌집 군집 붕괴 현상(Colony Collapse Disorder)'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밀러는 벌을 돌보고 분봉(分蜂)을 하고 지키는 사람이지만, 또한 벌을 잃는 일에도 익숙한 사람이다. 사실 양봉업자들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수천 마리의 벌들이 늘 자연스럽게 죽는다.
세상이 충격에 빠진 것은 밀러 같은 양봉업자의 보고서 때문이다. 밀러의 경우 보통 때보다 더 많은 벌들을 잃기 시작한 때는 2005년 2월부터였다. 단, 몇 주 만에 밀러는 4000개나 되는 벌통을 잃었다. 이는 밀러가 돌보는 약 1억5000만 마리에 해당되는 전체 벌의 50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런데 밀러만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전체 벌통 중 60퍼센트를 잃기도 했다. "벌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양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손을 들고 항복하고 또 다른 대출을 받은 후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벌들은 2006년과 2007년 말 그리고 2008년 겨울에 사라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현상에 대해 학계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이라는 이름은 일단 붙였지만, 대처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 36개 주에서 벌집 군집 중 3분의 1 이상이 사라졌고 이러한 현상은 유럽 일부 지역과 인도, 브라질에서도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2010년 지난해 토종벌의 90퍼센트 이상이 폐사됐다. 올해 안으로 국내 토종벌이 멸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내가 비록 주중이지만, 시골살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7년째이다. 서서히 벌이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실제로 금년에는 벌이 안 보인다. 다행히 아직 꽃은 피건만, 벌이 안 보인다.
벌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사라진 것일까?
이 책은 과학책이라기보다 문학성이 짙은 훌륭한 르포지만, 성실하게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의 원인을 추적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작가는 많은 쪽을 병충해에 대해 다루고 있다. 1620년대부터 벌을 집단 폐사시키던 바로아 응에라는 벌레 이야기부터 박테리아 성 전염병인 부저병, '벌들의 늑대'라 불리는 벌집나방 이야기 그리고 1800년대에 창궐했던 설사병 노제마병도 설명하고 있다.
벌들의 역사에서 기이한 질병으로 봉군(蜂群)이 붕괴되는 현상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기문 응애와 바로아 응애, 적색 불개미, 백묵병, 벌집 딱정벌레, 미친 라즈베리 개미, 카슈미르 벌 바이러스, 이스라엘 급성 마비 바이러스, 검은여왕 벌 바이러스, 날개기형 바이러스, 카쿠고 바이러스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벌들의 적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봉군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가 다시 회복하곤 했던 것은 자연상태에서의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 즉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의 원인에 관한 갖가지 무성한 이론의 흥망성쇠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17세기부터 벌과 같이 자연계에 존재했던 응애였다. 그러나 응애가 나타나지 않은 지역에서도 벌이 사라진 것을 설명할 재간이 없으니 응애가 원인이라는 설은 쇠퇴했다.
휴대 전화에서 방출한 전자파가 벌의 더듬이나 뇌에 미세한 영향을 미쳐 사라졌다는 휴대 전화 설도 대두했다. 이 이론은 독일에서 출현했는데 실험도 했지만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비약이 심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그보다는 과도한 제초제와 살충제가 원인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특히 유전자 조작 작물이 끼친 영향이 일정 정도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의 유력한 원인으로 부각되었다.
옥수수는 바람으로 가루받이를 하는 식물인지라 곤충이 필요 없고, 꽃 꿀을 만들지 않지만, 옥수수 꼭대기의 옥수수염에는 단백질이 풍부한 꽃가루가 묻어 있어 벌이 신나게 달려든다. 지금 우리 시대의 옥수수는 모두 유전자 조작 옥수수이므로, 옥수수염으로 인해 벌들의 유전 체계가 교란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옥수수가 없는 지역에서도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이 설 역시 퇴장했다.
오존층 파괴 설은 2007년 전체 벌의 절반을 잃은 우루과이에서 비롯되었다. 우루과이 상공의 조그맣게 뚫린 오존층 구멍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오존층에 구멍이 나면 벌뿐 아니라 사람도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론에 의해 잠재워졌다.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꿀벌 없는 세상, 결실 없는 가을>(로윈 제이콥슨 지음, 에코리브르 펴냄)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바이러스? 기생충? 살충제? 과학계는 여러 설들을 다 다뤄보다가 현재 두 손을 놓은 상태이다. 이럴 때 언제나 출현하는 철부지의 외계인 개입설은 호시탐탐 고개를 쳐드는 지구 종말론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여하튼, 현재 인류는 벌의 죽음이라기보다 시체를 남기지 않은 대규모 벌의 실종에 대해 해명 불능 상태에 있다. 독침을 가진 이 보잘것없는 자그마한 곤충이 시방 이 행성의 주인인양 뻐기는 잘난 인류에게 불길한 긴장감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파국 : 사라지는 것들의 끝없는 목록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로 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인간이 자연에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격적 권력 행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꽃이 오염되었으니 어찌 벌이 사라지지 않을까. 저자 노드하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은 벌에게 악영향을 미쳤지만, 벌의 이미지에는 좋은 영향을 미쳤다. 꿀벌은 다른 곤충에 비해 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줄무늬가 있으며 아기에게 꿀벌 모양 옷을 입히면 매우 귀엽다. 게다가 벌꿀도 만들어낸다. 이제,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은 이후 벌들은 비극적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멋도 지니게 되었다. 꿀벌은 판다와 북극곰 그리고 여타의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처럼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우리가 꿀벌에 대해 갖는 동정심은 그것이 곤충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더 놀라운 일이다. (벌은) 독침을 쏘고 윙윙 소리를 내며 예측이 불가능하고 발로 밟으면 으스러진다. (230쪽)
어떤 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쓴 노드하우스가 벌과 판다와 북극곰에만 몰두하지 않고, 살충제로 인해 사라지는 개구리, 역시 원인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멸종해가고 있는 박쥐에 대해서도 벌에게 표하는 것과 같은 연민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마치 친구와 같은 신뢰감을 느끼게 된다.
벌꿀인가? 꿀벌인가? 이 책을 손에 들고 처음에 나는 왜 헷갈렸을까? 벌이 꿀을 산출하지 않아도 인류가 그것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였을까? 발이 가루받이를 해 아몬드 농장을 부유하게 하지 않아도 언론이 이렇게 열광했을까? 다시 말해 벌이 농업 경제와 무관하다고 해도 벌집 군집 붕괴 현상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까.
사람들은 개구리가 사라지고 박쥐가 사라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학자들도 달려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하거나 작물의 가루받이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에게 협동심과 이타심을 배워야 한다는 인류는 오늘도 생태계 안에서 여전히 오롯이 이기적이다. 꿀벌의 불가사의한 대규모 실종은 이제 이미 시작되어 가속이 붙은 생태계 교란과 그 이후에 벌어질 파멸적 징후들의 강력한 은유가 되었다.
인간에게 꿀을 제공하지 않는 것의 멸종에도 절박한 관심을 가질 때 인류는 어쩌면 이 위기를 바로 보게 되고, 바로 보았을 때 어쩌면 작은 해법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쓸쓸하고 슬픈 노릇이지만, 우리나라가 자연의 역습에 대처하는 방식을 생각하노라면,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해도 되지만.
"쑥부쟁이 따위는 4대강 건설 이후에 또 생긴다니까요!"
"가리왕산에 활강장 안 지으면 지을 데가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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