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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절대로 없는 이것은…

[꽃산행 꽃글·16] 외가 뒤안에서 추억과 풀들을 만나다

서울에 살면서 아파트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은행이나 무슨 기관에서 달라는 서류 중에 주민등록초본이 있다. 그 초본에는 나의 현주소뿐만 아니라 솥단지 걸고 아내와 살림을 차린 이후의 행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아파트에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다.

그것은 아파트 행진곡이었다. 벽산아파트에서 시작하여 아파트, 또 아파트, 또또 아파트…또또또 아파트 그리고 지금의 미성아파트까지. 그 아파트의 구조는 대개 한결 같아서 현관만 닫으면 마개에 닫힌 호리병처럼 된다. 들고 나는 문도 오직 딱 하나뿐이다. 해서 무슨 일이 많이 일어나야 마땅할 것 같은 생활 공간이 그냥 한방에 멱살을 단단히 잡히는 신세이고 말게 된다.

아파트 이름만 시공 회사명을 따서 알록달록한 게 아니다. 아파트 이름 뒤에 붙는 호수만 해도 여러 가지이다. 1106호, 708호, 503호…그리고 지금의 1103호까지. 아파트는 공중으로 띄엄띄엄 뻗어가는 산촌(散村)이다. 희한하게도 나는 그중 5층 밑에서는 산 적이 없다. 말하자면 공중에서 공중으로만 겅중겅중 뛰어다닌 셈이다. 그러니 뿌리 없는 삶이라 해도 나는 도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 벌초 길에 만난 거미줄. 노란 잎도 하나 걸려들어 대롱대롱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굴기

시루떡처럼 꼭꼭 포개진 아파트는 편리한 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한 점도 꼽으라면 혀가 아플 정도로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서로 비기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이 글에서는 아파트에는 없는 것 하나를 들기로 하자. 그것도 딱 하나만 들기로 하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골목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처마가 없어졌다. 골목은 호기심과 상상력의 곳간이다. 처마는 빗소리가 숨어 있는 곳이고 제비소리가 울려나오는 곳이다. 이것들은 아파트 외부에서 없어진 것들이다. 아파트 내부에서 없어진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숨을 곳이다.

아파트에는 숨을 곳이 없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 모든 생활이 다 들킨다. 다락으로 갈 수도 없다. 헛간으로 갈 수도 없다. 화장실도 있지만 그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베란다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그마저 없애고 거실을 한두 평 더 넓히는 것이 대세이다. 그래서 창문만 열면 바로 낭떠러지로 연결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형한테 꿀밤도 맞았고 동무한테 억울한 해코지를 당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그랬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가 되어 훌쩍거리고 싶을 때. 그럴 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없다. 아파트에서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지난 주말. 한적하던 고향의 큰집 마당이 오랜만에 떠들썩해졌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집결한 대규모 벌초단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산소는 가까운 곳에도 있지만 아주 멀고 높은 산에도 있다. 어떻게 이런 높은 곳으로 장례 행렬이 왔을까 의문이 저절로 드는 곳에 위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산이 벌거숭이였고 이제는 나무 땔감을 하는 이도 없고 몇 십 년간 인적이 끊긴 탓에 그리 되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선산의 벌초를 끝내고 나만의 일정이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 나는 벌초객들로 몸살을 앓게 될 주말의 교통 사정도 고려해서 외가에 가서 하룻밤을 더 자고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다. 아들 둘을 앞장세우고 친정 가는 길이라 어머니는 더욱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옛날이야기를 끊임없이 하신다. 외가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얼른 뒤안으로 뛰어갔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시골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방학만 되면 무조건 고향의 큰댁과 외가에서 뛰놀았다. 아파트에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느 문학 평론가의 글에서 본 것인데 무척 인상적이어서 오래 머리에 남았다.

작년에 식물의 세계로 한 발을 들이밀면서 그 글이 얼핏 떠올랐고 그러면서 꼭 가고 싶은 곳도 자동으로 떠올랐다. 바로 그곳은 내가 오늘 뛰어드는 외가의 뒤안이었다. 그 뒤안은 내 어릴 적 울적한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식물들의 생태계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외가의 뒤안. ⓒ이굴기

장독대와 넓은 잎을 자랑하는 토란이 몇 줄기 서 있는 곳을 지나니 뒤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매우 쇠락한 담부랑은 온통 호박잎들의 차지였다. 호박 줄기는 능구렁이처럼 천천히 기어가면서 허물어져가는 담부랑을 붙들고 있었다.

▲ 호박꽃과 줄기들. ⓒ이굴기

옛날 기억으론 굴뚝이 있고 그 굴뚝의 따뜻하고 통통한 엉덩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정지(부엌)도 주방으로 변했으니 가스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 참나무 둥구리가 있었다. 둥구리에 작은 홈을 파서 표고버섯 균주를 심어 버섯을 재배하는 것이었다. 예전과는 아주 다른 풍경이었다.

그래도 담부랑 아래에는 옛날의 그 풀과 그 나무들로 그득했다. 비록 예전에는 미처 이름을 몰랐지만 한때나마 초롱초롱했던 눈을 초록으로 물들이던 녹색의 식물들. 강아지풀, 바랭이, 환삼덩쿨, 꼭두서니, 질경이, 둑새풀 등등 서로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산초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불그스름했고 가시가 날카로웠다. 이 산초열매는 특이한 향이 난다. 우리 고향의 별미로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이는 추탕이 있다. 이때 산초열매 빻은 가루를 꼭 넣어야 제 맛이 난다.

▲ 산초나무. ⓒ이굴기

외가의 뒤안에서 이 풀을 만날 줄은 몰랐다. 가시가 잔잔히 난 며느리밑씻개였다. 조금은 고약한 이 이름을 우리 고향에서는 어떻게 부를까. 외사촌 형님한테 물어보았더니, 꺼끌이넝쿨이라고 하였다. 줄기가 몹시 꺼끌꺼끌해서 붙인 이름이라 했다.

아직은 그래도 뙤약볕이 한창이었다. 노란 호박꽃을 제외하고 드물게 핀 꽃이 있었다. 정구지꽃이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부추를 정구지라고 한다. 막걸리 집에서 밀가루 사이에 누워 있던 정구지가 꽃도 피우다니! 어머니가 한 말씀 보태셨다.

"옛날에 말이 있었다. 담부랑 밑에서 정구지꽃이 피면 가을이 온다고!"

▲ 정구지꽃. ⓒ이굴기

뒤안 끝자락에는 작은 대나무가 몇 그루 있고 앵두나무가 서 있었다. 꽃도 열매도 이미 지고 난 뒤였다. 나 어릴 적 이런 유행가가 있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 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 쌌다네. (…)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샛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 앵두나무. ⓒ이굴기

기억을 힘껏 떠올리며 엎드려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추억에 젖다가 뒤안을 나올 때였다. 꼭 누가 내 뒤를 붙잡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안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특징이 있다. 호박을 비롯해서 환삼덩쿨, 꼭두서니, 꺼끌이넝쿨 등 우세한 종들이 모두 잎이나 줄기에 잔털이 많고 몹시 까끌하다.

그러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풀들이 손짓으로 내 바지자락을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 풀들은 전략적으로 내 엉덩이에 풀씨를 묻히면서 필시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벌써 서울에, 그 서울에 갈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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