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주말에 낯선 남자와…혹시 에이즈에 걸렸을까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주말에 낯선 남자와…혹시 에이즈에 걸렸을까요?"

[안종주의 '위험사회'] 위험 제로 사회, 가능한가

최근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우리 아파트 옥상에서 지붕 싱글 해체·제거 공사를 하는데 여기에 석면이 들어있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해체한 자재를 엘리베이터로 운반하는데 석면에 노출될까봐 걱정입니다." / "아파트 옥상에 석면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불안하시면 조각을 떼어내 분석 기관에 맡기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안심을 시켰는데도 그는 자신의 집에 석면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다며 하루 뒤 또 전화를 걸어왔다. 일종의 '위험 염려 증후군'(이런 병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자신과 실제로는 연관성이 거의 없는데도 관련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여겨 불안해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사람에게 필자가 붙인 이름)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다.

최근 열린 서울시 석면자문위원단 회의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화를 받았다고 환경부 석면 담당 사무관이 말했다. 그가 나뿐 아니라 석면 관련 기관에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많지는 않지만 분명 있다.

▲ 석면 대체재로 쓰이는 암면. 그 기능과 용도가 석면과 같고 겉모습도 비슷해 암면을 보고 발암 물질인 석면으로 오인해 신고를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wikipedia.org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도 에이즈 감염인과 환자가 꽤 늘어나기 시작하고 에이즈의 위험성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자주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보건복지부 국립보건원에 어느 중년 남성이 찾아와 자신의 최근 증상이 에이즈와 비슷한 것 같다며 검사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검사 결과 음성이었다. 그는 이 결과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검사 과정을 직접 지켜보아야겠다며 검사 연구원을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번에는 30대 여성이었다. 내가 사회부장으로 있던 1998년 한 가정주부가 신문사로 찾아왔다. 부원들과 회사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편집국을 찾아온 여성이 나를 꼭 만나야겠다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실은 제가 서점에서 선생님께서 쓰신 에이즈 책(1996년에 펴낸 <에이즈 엑스 화일>)을 읽어보았는데 최근 제 몸에서 책에서 본 내용과 거의 같은 증상이 나타나 제가 에이즈에 걸렸는지 여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왔습니다."

그의 사생활을 존중해 곧바로 회사 바로 옆, 손님이 거의 없는 조용한 다방 한 구석으로 데려가 자초지종을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 "지난 주말 친구와 함께 서울 근교에 나들이를 갔다가 잘 모르는 남자와 만나 콘돔 없이 성관계를 맺게 됐는데 며칠 뒤부터 약간의 오한과 미열이 나고 손에 자그마한 붉은 반점이 생겨 에이즈에 걸린 게 아닌가하고 불안합니다. 혹시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옮기는 것은 아닌지 요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 "별로 염려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에이즈 감염인 또는 환자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고 만에 하나 그가 감염인이라 하더라도 성관계로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바이러스가 전파될 가능성은 수백분의 1 확률이기 때문에 실제 에이즈에 감염될 가능성은 수백 만분 내지 수천 만분의 1 확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부에 반점이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 에이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염려가 된다면 몇 달 뒤에 병원이나 보건소를 찾아가 혈액 검사를 한번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한참을 설명하고 진정을 시켜서 돌려보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처럼 위험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특히 잘 모르는 위험이나 새로운 위험에 대해서 이런 행태를 보인다. 석면이나 에이즈 모두 우리가 50년 전 또는 100년 전부터 익히 잘 알고 있던 위험이 아니다.

▲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자아내게 만드는 카포시 육종이 나타난 에이즈 환자의 모습.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 에이즈 증상과 약간이라도 비슷한 것이 몸에 나타나면 에이즈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wikipedia.org
위험에 대해 민감한 집단과는 반대로 둔감한 집단도 있다. 불에 탄 고기도 "그것 먹는다고 죽는 것 아니다"며 먹는 사람이 있다. 술과 담배(요즘에는 담배를 억지로 권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를 억지로 권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 석면 슬레이트 위에 고기를 구워먹었어도 아직 멀쩡하다"며 '석면 그것 별 것 아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페인트나 니스 칠, 용접 작업 때 위험하거나 해로우므로 장갑이나 마스크 등의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작업하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번거롭다며 맨손, 맨몸으로 일하는 근로자들도 많다.

이들 두 부류의 사람 모두 문제가 있다. 위험 소통, 즉 리스크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화두가 돼온 것이 "얼마나 안전해야 정말 안전한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특히 제로 위험을 좇는 사람들과 밀접한 주제다. 위해성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체적으로 전문가는 확률적으로 보고 절대적인 위험의 크기를 이야기한다. 반면 일반 공중은 위험을 직관적으로 보고, 제로 위험을 원한다.

그래서 내가 먹는 야채에는 농약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 내가 먹는 식품에는 발암 물질이나 유해 물질, 병원성 미생물이 전혀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먹는 물에는 병원성 미생물은 물론이고 일반 세균조차 단 한 마리라도 들어있으면 큰 일이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현대 사회에서 제로 위험은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에는 각종 유해 물질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주 손을 씻고 TV 리모컨이나 컴퓨터 마우스, 자판, 휴대폰 액정판이나 글자판을 자주 소독한다고 해도 세균은 몸과 주변 환경 곳곳에 늘 존재한다. 미생물 제로의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에도 석면을 비롯한 여러 유해 물질이 늘 존재한다. 우리가 마시는 물과 음식물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간접 흡연과 3차 흡연에 시달린다. 위험은 피할 수 없으니 체념하라거나 둔감해지라는 말을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니콜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는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반 공중들이 알게 모르게 원하는 제로 위험 사회의 문제는 적절한 위험 소통 전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과거 언론이, 전문가가, 시민 단체가, 이웃이 여러분에게 말했던 위험이 지금은 어떠한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됐던 위험 사건(이 가운데에는 심각한 위험으로 거론됐던 것들이 많다) 가운데 대부분이 현실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버젓이 우리 곁에 있다. 라면도, 통조림도, 분유도, 우유도, 두부도, 소주 등도 잘 팔리고 있다.

이들 식품에는 여전히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섞여 있고, 농약, 산화된 기름, 환경 호르몬, 포름알데히드 따위의 각종 유해 성분이 들어 있다. 이 외에도 각종 첨가물과 산화 방지제, 인공 색소, 인공 향료, 인공 감미료, 표백제, 합성 보존료(방부제), 조미료 등이 들어있다. 이들 물질 가운데 상당수는 인체에 심각한 해를 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과다 섭취하면 건강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것이 약이다. 모든 약은 독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알면서도 먹는다. 이유는 단 한가지다. 약을 복용하는 것이 복용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알게 모르게 위해성과 편익을 저울질 해 편익이 더 크다고 느끼면 그 행위를 하거나, 기술을 받아들이거나, 마시거나 먹는 것이다. 약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방사선 촬영과 원자력발전소, 농약, 살충제, 방부제 따위를 꼽을 수 있겠다.

엑스선이 되었건, 컴퓨터 단층 촬영이 되었건, 위 내시경이나 대장 내시경 촬영이 되었건, 수혈이 되었건 대부분의 의학적 검사나 의료 처치에는 위험이 함께 따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일상적으로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이들 행위나 기술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별로 필요 없는 데도 이런 검사나 시술을 받는 것은 적절한 위험 회피 행위가 아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위험 염려 증후군 환자는 주로 대중매체가 특정 위험을 과장 보도하거나 공포를 느끼게끔 보도할 때, 또는 너무나 자주 다룰 때 생긴다. 언론은 어떤 사안을 보도할 때 과장 보도하는 경향이 뿌리 깊다. 심지어는 이른바 정론지나 권위지라고 하는 신문이나 공영 방송조차 그렇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으나 이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내보내는 기사(뉴스)를 독자(시청자)가 그냥 지나치거나 흘려보내지 말고 꼭 보고 들어달라는 바람 때문이다.

술에 물을 잔뜩 타면 술맛을 떨어지듯이 위험성을 알리는 기사에 그 편익성까지 고려한다면 독자와 시청자들은 그 뉴스를 머릿속에 각인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언론은 공중이 위험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알맞은 소통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을 증폭하고 왜곡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매체이다.

예를 들어, 1997년 복제양 돌리 탄생으로 체세포 복제 기술을 이용한 인간 복제까지 가능해진 것을 두고 우리 언론은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 인간을 만든 뒤 그를 죽여 장기를 이용할 수도 있으며 독재자가 순종적인 인간을 골라 대량 복제해 노예처럼 부리려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황당한 상상으로 복제 기술, 나아가 생명공학 기술의 위험을 공중에게 널리 퍼뜨렸다.

만약 이러한 황당한 기사들을 대다수 매체가, 그것도 자주 다룰 경우 실제 그 기술의 위험성과 편익을 잘 모르는 공중은 부정적인 인상을 갖거나 머릿속에 각인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실제 나중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서도 거부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중이 실제 필요한 위험 인지보다 훨씬 과도한 위험 인지를 하는 데는 언론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러면 이 글의 주제인 "얼마나 안전해야 정말 안전한가?"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려 보자. 제로 위험은 정말 안전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제쳐두자. 폴 슬로비치나 바루크 피시호프와 같은 위험 연구 전문가들은 공중들이 받아들이는 기술이나 행위, 유해 물질의 위험 수준은 공중이 받아들이는 편익 수준과 받아들이는 위험 수준의 차이에다 위험인지와 관련한 변수로 작용하는 그 위험의 성격, 즉 자발성, 통제성, 즉시성 따위와 관련이 깊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일련의 연구에서 공중이 인지하는 각종 기술과 행위의 위험도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매우 높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공중이 받아들이는 위험의 수준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지각하는 편익과 관련이 있었다. 그 행위나 기술의 편익성이 높을 경우 위험성이 있다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더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기술이나 행위, 물질을 그 사회에서 처음 도입하거나 관련 정책 제도를 만들 때 공중을 최대한 참여시키는 것이다. 또 평소 그 기술이나 행위, 물질이 사회에 얼마만큼 편익을 줄 수 있는지, 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 유익한지를 잘 알려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공중이 불필요하게 위험을 과대 인지하는 것을 막거나 줄일 수 있으며 불필요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 지출도 막거나 줄일 수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