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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동원? 장명부? 진짜 '레전드 투수'는…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34년 만의 눈물

지난 8월 11일, 대구 상원고등학교가 2011년도 청룡기 고교 야구 대회에서 북일고등학교를 2대 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프로 야구가 생기기 전에는 고교 야구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서 1980년대 초에는 고교 야구 전 경기를 라디오 또는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야구팬이라 해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진표를 잘 기억하지 않으면 고교 야구를 챙겨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결승에 오른 북일고의 이정훈 감독은 대구상고 출신으로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에서 프로 야구 수위 타자를 한 적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날린 분이지만 대구상고 선배인 상원고 박영진 감독은 프로 야구 팀에 입단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프로 야구 경력이 일천한 분입니다.

상원고는 대구상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1999년에 청룡기 우승을 차지한 후 12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박영진 감독은 34년 전 대구상고가 우승할 당시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분입니다.

과거의 추억

프로 농구가 시작된 후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 번이 더 바뀌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열린 연세대와 고려대가 흘러간 스타들을 모아 벌인 지난 6월 26일의 경기는 프로 농구가 생기기 전 농구대잔치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프로 야구와 프로 축구가 시작될 즈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대 구기 종목에서 두 종목의 위세에 눌릴 지도 모를 상황에 놓인 농구와 배구는 겨울철에 큰 대회를 신설하여 스포츠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농구대잔치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겨울철 농구 대회는 점점 인기를 끌어 1990년대 중반에는 이를 모델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7월 25일에는 레전드 리매치라는 이름으로 경남고와 군산상고의 야구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 경기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1976년 청룡기 승자결승에서 경남고의 최동원이 군산상고에 2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승리했고, 최종 결승에서도 최동원의 활약으로 경남고가 우승을 차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군상상고는 그 해에 청룡기보다 먼저 열린 대통령배 대회의 우승팀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프로 야구 감독을 지낸 분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러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경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향수를 잊지 않고 있는 팬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Again 배구 슈퍼리그! 한양대 vs 성균관대"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오는 28일에 한양대와 성균관대의 과거 선수들이 한데 모여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데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농구대잔치를 대표하는 두 라이벌의 경기에 이어 배구 슈퍼리그를 대표하는 두 팀이 경기를 벌인다니 배구의 추억을 간직하신 분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으로 진취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도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한 가지만 부연하면 경남고와 군산상고의 야구 경기에서 레전드 리매치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각 스포츠마다 레전드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프로 야구 최고의 레전드를 꼽으라면 공동 1위로 1983년 삼미 수퍼스타즈 장명부의 60경기 출장, 46경기 선발, 36경기 완투와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 자인언트 최동원의 41인닝 투구라 생각합니다. 그 전설의 주인공 최동원의 레전드 리매치에서 보여 준 모습이 아직 병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 전설의 투수들

▲ 지난 8월 11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제66회 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북일고와의 결승전에서 승리한 상원고의 박영진 감독.ⓒ뉴시스
"박영진 투수 대단하네요. 아마 이번 대회 끝나고 나면 한참 쉬어야 할 겁니다. 대회 경기 운영 방식도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1977년도 청룡기 고교 야구 대회 중계 방송을 하던 이호헌 해설위원이 남긴 말입니다. 훗날 프로야구 창설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호헌 해설위원은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일을 하시면서 당시 KBS 해설을 하셨는데 위의 이야기는 5일째 등판한 대구상고 박영진 투수를 가리켜 했던 말입니다.

국가 대표 포수 출신으로 훗날 프로 야구 삼성과 태평양 감독을 지내게 되는 대구상고 정동진 감독이 선수 혹사를 몰랐을 리는 없겠지만 성적에 따라 감독의 거취가 결정되는 파리 목숨의 시기였고, 야구 감독을 시작한 첫 해에 우승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5일간 연속 경기를 가질 수 있을까?

지극히 당연할 수도 있는 이 의문이 해답은 청룡기 야구 대회에 패자 부활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첫째 날 승자 준결승에서 승리한 대구상고는 둘째 날 동산고와 승자 결승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셋째 날 패자 결승에서 승리한 후 넷째 날 결승에서 동산고에 승리했고, 패자부활전에서 올라 왔으므로 다섯째 날 최종 결승에서 자웅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2학년 양일환, 1학년 권기홍 투수는 이듬해와 그 다음해에 고교 선발 팀에 뽑힐 정도로 좋은 투수로 성장하지만 그 때까지는 감독에게 믿음을 줄 수 없었으므로 박영진 혼자 경기를 책임지다시피 했습니다. 다른 고교 야구 대회와 달리 청룡기는 최우수선수를 선발하지 않고, 대신 우수 투수상과 우수 선수상이 따로 주어졌으므로 박영진은 우수 투수상을 포수이면서 타격왕에 오른 이만수는 우수 선수상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혹사를 당한 투수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가장 황당했던 것은 1973년에 배재고의 이광은이 5일간 56이닝을 던진 일입니다. 그 해 고교 야구 최고의 투수는 배재고의 하기룡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하기룡이 탈이 나는 바람에 이광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지금이라면 매스컴이 가만히 있지 않을 일을 벌인 것입니다.

34년이 지나 감독이 되어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우승의 감격이 큰 것인지, 그동안 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한 후 그 열매를 따는 것이 달콤하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스포츠계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이 그런 눈물을 흘리는 기회가 부여되었으면 하는 실현 불가능한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행크 아론의 방한 경기가 만들어낸 전설 아닌 전설

미국 프로 야구의 전설인 세인트루이스의 스탠 뮤지얼이 1958년에 팀과 함께 방한하여 우리나라 팀과 경기를 벌인 것은 이제 반세기도 더 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4년 후, 우리나라에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고 시즌이 막바지로 넘어가고 있을 때 홈런왕 행크 아론이 속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즈 팀이 내한하여 경기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프로 야구 태동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프로 야구 진기명기가 자주 텔레비전이 소개되던 시절이었으므로 미국 프로 야구 팀이 온다니 어떤 팀이 오는가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실제로 내한한 선수들은 1, 2, 3군에서 조금씩 뽑아 온 듯한 친선 경기용 팀이었고, 이미 은퇴한 행크 아론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함께 뛰는 시합이었습니다.

이 팀을 초청한 것은 한국야구위원회가 아니라 삼성이었으며, 여섯 차례의 경기 상대는 그 때마다 달랐습니다. 문제는 프로야구 올스타 팀을 뽑아 놓고 보니 투수로는 그 해 다승 1위에서 6위까지 박철순, 이선희, 권영호, 황규봉, 노상수, 하기룡이 선발되었지만 부상 등으로 인하여 경기에 출전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선희, 권영호, 황규봉은 모두 삼성과 애틀랜타의 경기에 출장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이때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즈 방한 경기에서 전설 아닌 전설이 생겨났으니 삼성이 애틀랜타와 가진 첫 경기에 선발로 나온 투수가 박영진이라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청룡기 우승과 함께 그 해 최고 투수의 한 명이 되어 한일 고교 야구 대회에서 1차전 승리, 3차전 마무리로 출장한 박영진은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한 후 중위권의 팀을 이끄는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프로야구 창단과 함께 삼성에 입단한 후 투수로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청룡기 우승 당시 동기인 이만수와 오대석은 삼성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을 했지만 투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상인지 경기력 저하인지 확실치 않은 이유로 1년 내내 거의 경기장에 나올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프로 야구 팀(?)을 맞이하여 선발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후배인 양일환이 주축 투수로 활약한 것과 달리 박영진의 등판은 거의 없었고, 프로 야구 삼성에서 거의 등판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쳐야 했습니다.

오대석 감독이 이끄는 상원고에서 코치 생활을 한 후 상원고에서 감독을 맡아 우승을 차지했으니 선수 생활에 꽃피우지 못한 꿈을 아마추어 지도자로 쌓아하고 있는 모습이 34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과거를 기억하며 향수에 젖는 것은 다가올 미래를 위한 자극제가 됩니다.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였지만 국가 대표나 프로 야구 선수로 성공하지 못한 선수가 지도자가 되어 다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인생에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의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든 분들이 언젠가 좋은 성과를 거두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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