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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보다 더 중요한 땅은 왜 외면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무상 급식 전면 실시?

무상 급식 전면 실시에 대한 찬반 투표가 지금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 투표를 강행하려는 사람들은 복지 포퓰리즘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초등학생에 대한 무상 급식을 진보 세력의 무분별하고 나쁜 평등 정책이라 보고, 실질적인 복지를 위해서는 차상위 계층에게 무상 급식을 우선 실시하고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장 자체만을 따져보자면 언뜻 보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 저의가 무엇인지는 금방 드러난다. 원칙적으로는 복지가 무조건적인 평등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예컨대 존 롤스가 주장한 차등의 원칙처럼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득이 분배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근거를 들면 말이 되긴 한다. 부잣집 아이에게도 무상으로 밥을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복지를 해야 한다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면 그들은 옹색한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무상 급식 전면 실시에 대한 찬반투표는 그들이 주장하듯 '잘못된 복지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것이지 복지 정책의 절차적인 문제를 결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 한나라당이 복지 정책을 운운했던가? 또 4대강 사업 때문에 복지 예산이 삭감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점진적인 실현을 주장하는 데에는 그 의도가 '전면적이냐 단계적이냐'라는 방법적인 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면 실시에 대한 비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을 우롱하는 처사다. 그런데 지금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이미 80퍼센트가 무상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무상 급식은 복지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며, 아이들 양육에 대한 자발적인 합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훌륭한 제도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국민의 도덕적 존엄에 대한 도전이자 사회 공동체의 힘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고 공동체의 대의를 빌미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전술적으로 강화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발상이다.

권리의 주체인 동시에 미덕을 가진 시민

'왜 우리 국민은 초등학생의 무상 급식이 올바를 뿐만 아니라 도의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은 경제의 주체가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배려해야 할 대상이다.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 대한 문제이다. 무조건적인 배려 없이는 아이들이 성장할 수 없다. 아이의 부모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아이를 생각하는 공동체의 마음은 아이들에게 공평한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사랑과 배려의 가치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가치관은 국민적인 합의에 기초한 것이기에 한국 사회와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65세 이상 노인에게 공동체가 헌납하는 지하철 티켓과 경로석도 사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특별한 대우지만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국민들은 이 제도를 통해 우리의 미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높은 도덕적인 자존심과 문화를 보여준다. 이 정책들은 근시안적인 경제적 영리만을 생각하는 천박한 상업 정신에서는 이해될 수도 상상될 수도 없으며, 그들과 차별화된 우리 사회 공동체의 축적된 도덕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간에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안락함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듯이, 아이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아이건 남의 아이건 공평하고 평등한 급식을 선택한 것은 자발적이고 도덕적인 동의에 기초한 것이자 우리가 지켜내야 할 공동체의 소중한 미덕이다. 달리 보자면 아이들과 노인을 배려하는 문화는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갖추게 하고, 시민들 개개인의 삶의 안정성에도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누구나 아이인 적이 있으며 누구나 늙어갈 것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모든 노인들에게 자리 하나를 내 주는 그 마음을 통해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사회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어렵사리 이루어낸 소중한 사회적인 가치를 지켜내야 공동체와 시민적 삶의 안정성이 공고해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무상 급식을 두고 '나쁜 포퓰리즘'이라고 문제제기하는 것은 국민과 공동체의 도덕적인 존엄에 대한 손상 행위일 뿐만 아니라 '나쁜 정치적인 행태'이다.

굶주리고 눈이 머는 아이들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문제 상황을 전 지구적인 문제로 확대하면 훨씬 어려운 질문이 제시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빈곤이라는 전 지구적인 문제를 접근하는 데에는 보다 보편적인 관점과 가치관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인 장 지글러가 제시하는 관점은 인류애에 기초한 보편적 박애주의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 생물학적인 생명을 보존해야 할 권리, 먹을 수 있는 권리, 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회, 부도덕한 자본, 부도덕한 권력은 누가 보아도 문제다.

지글러는 세계적인 빈곤을 양산하는 주요한 요인들로 금융 자본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부패한 권력들, 환경 재앙 등을 꼽고 있다. 지글러는 세계 빈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도덕적인 당위에 그치지 않고, 오랜 경험을 통해 취합된 기아의 현장을 고발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지옥과 같은 현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기아 문제는 잘사는 나라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으며 해결 또한 요원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잉여 농산물이 가격 정책 때문에 버려질지언정 구호 식량으로는 제공되지 않는 구조적인 모순, 기아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게 내버려 두지 않는 비정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여기 굶어서 영양 부족으로 눈이 멀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어디에? 바로 이곳 우리가 사는 세계, 인간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곳이 그렇게 먼 곳일까? 책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루어진 지역은 바로 북녘의 우리나라이다.

세계 사회와 민족의 공동체

하지만 북녘의 아이들이 우리의 아이들인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해야 한다면 이 물음에 대한 투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투표가 정치적인 사안을 결정짓고 공동체의 운명을 합의하는 행위라면, 이 투표를 통해서 국민적인 의사가 타진될 수 있다. 인도적인 가치나 도덕적인 당위만으로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후(戰後) 1세대뿐만 아니라 2세대들도 북녘 사람들을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지, 또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 통독 직후 독일을 방문했을 때 서독 사람들 사이에는 단시간에 해결하기 힘든 양가감정(兩價感情)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독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독일을 택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이 커져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인 손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불편한 배리(背理)의 감정을 우리가 기꺼이 감내하려는지, 안락한 반쪽을 누리려는지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의 아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북녘의 아이들이 남녘의 아이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역사와 문화에 기초한 민족 동질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일정한 사회적인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좀 더 심도 깊은 분석이 필요한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새터민의 시민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남녘의 시민과 동등하다기보다는 연변 동포와 유사한 것으로서 열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듯하다.

다른 한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에 대해서 느끼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책임보다는 북녘의 아이들에게 대해서 느끼는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을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공간적으로 더 가까운 이웃이어서가 아니라, 비록 단절의 역사가 있긴 했지만 우리와 같은 공동체를 새롭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긍정할 경우, 북녘의 기아 문제는 세계 사회의 인도주의적인 대응 방식 이상이어야 한다. 북녘의 기아 문제는 그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의 문제이자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갖는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책임보다 민족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책임이 더 크다는 생각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독도보다 더 크고 중요한 우리의 땅

해방 66주년을 맞아 독도 문제와 동해 표기 문제로 일본과의 갈등이 점철되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시야를 좀 더 거시적인 민족의 미래와 역사를 조망하는 방향으로 돌린다면, 새로운 민족 공동체의 구성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지도 위에 그려진 분단의 선은 고난을 함께 나누려는 민족 공동체에 대한 상이 뚜렷할 때 사라질 수 있다. 굶주리는 우리의 북녘 아이들을 돕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어찌 그 미래를 꿈꿀 자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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