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은 대개 평면 위, 정해진 루트에 따른 직선적인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조로워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 주사위를 굴리는 데에 따른 무수한 경우의 수, 그리고 다양한 설정 상의 찬스 같은 변수 등의 개입으로 인해 매번 승부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게임을 할 때마다 이기고 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 즉 새롭게 쓰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어떤 이야기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측불가능성이 보드게임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미스터 모노레일>(김중혁 지음, 문학동네 펴냄)은 보드게임의 형식을 빌린 소설입니다. 소설 속 게임 <헬로 모노레일>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사위를 굴려서 높은 수의 눈이 나오거나 찬스 카드를 뒤집었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승리에 유리한 것이 나오는 일처럼 일종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영감이 게임의 발명자이자 주인공인 '모노'로 하여금 이것을 제작하도록 한 것이며 또한 대성공을 거두도록 한 것입니다. 모노가 한 것은 단지 속임수를 쓰고 규칙을 벗어나도록 하여 게임의 예측불가능성을 증가시킨 것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모노와 게임을 구체화하는 데 동참했던 친구 고우창의 평범했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없습니다. 단지 처음부터 유리한 칸 또는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사위를 굴린 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단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자의적으로 거부하거나 리셋할 수 없는 것, 바로 이것이 보드게임의 불편부당한 공정성입니다. 모노와 고우창이 이 우연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 플레이어
▲ <미스터 모노레일>(김중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그러나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모노와 고우창의 여행은 실상, 고우창의 아버지이자 회사의 부사장으로 취직한 고갑수가 회사 공금 오억 원을 유용하여 유럽으로 향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깊이 좌절하고 있었던 한편, 모든 현상과 사태에는 나름대로 의미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믿음을 타인에게 강권하고 있습니다. 당위와 인과에 대한 신뢰 앞에서 우연이나 행운 따위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그야말로 진지하기만 한 존재인 것입니다. 모노나 고우창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입니다. 고갑수는 우주의 원리를 '원'에서 찾는 '볼스 무브먼트(Balls Movement)'라는 종교에 빠져드는데, 그것도 그의 성격 상 무리는 아닙니다. 그 어떤 우연이나 예측불가능성도 없는, 하나의 완결된 우주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고갑수의 신념에 비추어 보면 볼스 무브먼트 또한 완전한 구(球)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왜곡하거나 훼손하는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예언서를 날조하고 유니볼 성자의 뜻을 내세워 교세의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2인자 '비비', 그리고 현재의 교단은 지양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고갑수는 볼스 무브먼트의 유신(維新)을 위해 유니볼 성자를 구출/납치하고자 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오로지 그러한 목적 자체에만 몰입하면서 마치 핀볼처럼 좌충우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노와 고우창의 여정은 바로 이 고갑수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노의 경로는 고갑수의 그것과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원래 그는 일종의 휴식을 위해 유럽 출장을 계획한 것이었지만, 고갑수를 비롯한 여러 변수에 의해 예정은 완전히 틀어집니다. 그는 매순간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며 그때그때 목적지나 경유하는 지역이 달라집니다. 특히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한순간에 관통하는 통로와도 같은 존재인 검표원과의 만남은 결정적입니다. 이것이 쾌활하기 그지없는 동료 '루카'를 만나고 옛 친구 '레드'와 재회하며 고우창 및 그의 여동생 고우인과 차례로 합류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래 지향하는 바나 목적지가 달랐던 동료들이 모노의 여정에 동참하는 과정도 유사합니다. 즉 그때그때의 즉흥적인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갑수를 구출한다는 더 없이 진지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이 순간순간의 긴장감 그리고 그 이상의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명백히 정해져 있지만, 그 경로와 동행 여부는 전적으로 주사위를 굴린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모노가 검표원으로부터 받은 펀치는 이쪽세계로부터 저쪽세계로의 순간적인 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마법 카드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모노 일행이 <헬로 모노레일>의 다섯 캐릭터에 정확히 대응되고 있는 것처럼 실상 그들은 게임 속의 플레이어가 되고 있으며 그 사실 자체를 나름대로 즐기고 있습니다.
주사위의 여섯 면이 펼쳐 보이는 예측불허의 다중적인 가능성 속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며 각자의 이야기는 매순간 새롭게 쓰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황과 사태를 주도하는 이 또한 그때그때 달라지며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해주는 상호보완적인 다면체처럼 되어 있습니다. 마치 주사위의 형상 그 자체처럼 말입니다. 볼스 무브먼트라는 적(敵)이 명확한 실체를 갖고 있는 것만큼 승패 여부를 떠나 서로를 기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즐거움은 온전히 그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3. 목숨을 건 자
기만하는 존재는 정작 따로 있습니다. 바로 볼스 무브먼트의 2인자 볼 보이, 즉 비비입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이 축조해낸 볼스 무브먼트를 위해 자신을 제외한 교단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세계 전체까지 속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볼스 무브먼트는 대내외적으로 우주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신도 오십만의 종교단체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만을 진실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교단 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반대자를 가차 없이 처단합니다.
그렇게 비비의 세계는 자신이 날조해낸 예언서의 논리를 빌려 하나의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구의 형태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허구에 의존하고 있을지언정 그것을 훼손하려는 이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용납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또 다른 자신만의 구에 집착하여 가족과 교단 모두를 속여온 핀볼 성자, 바로 고갑수 같은 이들을 말입니다.
고갑수는 유니볼 성자를 납치하고 비비는 수하를 동원해 추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갑수에게 조력했던 교단 내의 동료들 대부분은 뜨겁게 달아오른 공을 삼키고 안으로부터 타들어가 죽게 됩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그 어떤 흠도 없는 매끈한 공과 같은 진실이 자기 자신을 내부로부터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갑수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음모가인 비비는 상대적으로 느긋해 보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자신의 거짓이 폭로될 경우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므로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합니다. 비비 역시 자신이 완성한 흠 없는 허구가 고갑수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목을 겨누게 된 형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나름대로 필사적이며 상당한 무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노 일행과 달리 고갑수와 비비에게는 게임을 즐길 여유 따위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고 물리는 추격전이 근본적인 무의미한 것임을 지적하는 유니볼 성자를 매개로, 비비와 고갑수는 사실상 나비의 양 날개와도 같이 겹쳐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와 신앙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두 사람 모두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구축하는 음모와 계획을 더 신뢰하는 편집증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공통적입니다. 음모에 입각한 그야말로 완벽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세계관 앞에서는 당연히 운이나 우연 따위의 예측불허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치 구가 사실상 어떤 모서리도 없는 하나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갑수와 비비 일당은 쫓고 쫓깁니다. 그들의 경로는 당연히 쾰른에서 런던을 잇는 무수한 도로와 철로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반드시 앞선 누군가의 경로를 따라가야 하므로 오로지 겹쳐질 수밖에 없는 단선(單線) 즉 모노레일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와 계획은 항상 빗나가거나 장애에 봉착하기 일쑤며 의외의 상황은 매순간 벌어집니다. 그들이 놓인 선상(線上)은 결코 매끈하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비비 일당의 경우는 모노 일행과 우연찮게 조우하기도 하며 특수기동 검표단의 불가사의한 개입에 의해 그들을 눈앞에서 놓쳐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추격전 전체는 고갑수와 비비가 공유하고 있는 구와 같은 세계관만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새롭게 펼쳐질 지 알 수 없는 선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매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진지함과 절박함을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4. 유희 대 투쟁
그렇다면 고갑수나 비비 일당은 각각의 목적과 태도가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모노 일행과 유사한 규칙에 지배되고 있는 셈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 모두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것에 말려 든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지정된 경로와 순번을 준수해야 하며 주사위라는 운명의 장난이 결정하는 행운과 불운 등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의미하는 바는 제각기 다를지언정, 궁극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원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모든 플레이어의 입장은 동일합니다. 요컨대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모노 일행만이 아닙니다. 고갑수와 비비 일당 또한 플레이어로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미스터 모노레일>의 결말에서 모노 일행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고, 고갑수를 대체할 플레이어로서 '주지찬'이란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에 임하는 태도가 대조적일 뿐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쪽은 주사위를 굴린 결과를 선선히 받아들입니다. 각 면이 내포하고 있는 복수의 가능성, 그리고 그 유비로서의 일체의 다면성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들 각자는 따로 또 같이 삶의 의외성이나 돌발적인 변수 등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때로는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쪽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 채, 오로지 자신 내부의 단면에만 집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 속에서조차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면모를 인정하기 전에는 유희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스터 모노레일>이 어느 쪽을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제시하는지는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항상 선두에 서는 것은 고갑수이며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이는 비비입니다. 이와 같은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구를 내부에 품고 있는 (항상 정방형의 면 한 가운데에 ·의 형상으로 표시되는 주사위의 한 면과 같은) 이들이 없다면 주사위는 미완성인 채 남아 있을 것이며 게임도 결코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노 일행은 이들 그 중에서도 고갑수를 뒤쫓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앞서 나가지 못합니다. 게임을 만든 것은 모노지만 그것을 실제로 시작하고 또 끝내는 이는 고갑수 뿐입니다. 또한 자신이 완성한 대상을 지탱하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 고민하고 분투하는 이는 비비입니다.
모노 일행이 게임 속에서 유희하는 동안 고갑수와 비비는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실질적인 질서 내지는 현실의 상당 부분을 구축하고 운용해 나가는 것은 바로 이 투쟁의 편에 선 존재들이라는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비가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유니볼의 존재가 요구되었으며 유니볼 성자가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기 위해 비비의 수완이 필요했다는 역설처럼, 이 둘, 그러니까 유희하는 자와 투쟁하는 자는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로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유희와 투쟁 혹은 초연과 몰입은 흡사 주사위의 각 면처럼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다면 현실이든 게임이든 간에 결코 흥미로워질 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이러한 극과 극. 면 대 면의 모순적인 공존으로 존립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편도 간단히 배제할 수 없는 주사위적인 종합이 바로 <미스터 모노레일>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드게임에 입각한 단선적인 모험의 경로가 그야말로 세계라는 다면체, 그 각양각색을 모두 포섭하고 있는 실로 간단치 않은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조적(linear)인 플롯에 입각해 있는 소설이라는 형식과 기묘한 유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단 우연의 일치처럼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