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은 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이라는 발상"과 "원시 사회의 이해"를 한데 묶어 펴낸 한국어 번역본이다.
표면적인 주제로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은 인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발상의 출발점에 스며들어 있는 착각을, 그리고 "원시 사회의 이해"는 주술적 의식에 의해서 공동체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아잔데 사회의 관습을 과학적 탐구에서 인식론적 기틀로 작용하는 형태의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삼아 미신이라고 격하하는 시각에 스며들어 있는 착각을 고발한다.
'프레시안 books' 2011년 7월 8일자(제47호)에 실린 서규환의 서평도 이러한 표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커다란 아쉬움을 표명한다. (☞관련 기사 : 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윈치가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이분법으로 사유하는 서구인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생활 형식들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하여 비판적 논의를 할 수 있는 이론적 헌정(constitution)이 필요하다. 윈치의 주된 관심은 자신의 문화와 그 합리성에 대한 성찰을 높일 수 있다고만 지적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윈치는 기존의 개념들을 해설하는 데 관심이 있지, 그것들을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개념들을 비판하고 생활 형식을 새롭게 창안하는 데 소홀하다."
서규환이 그 서평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제기하고 있는 많은 주제들은 모두 내가 보기에 굉장히 깊은 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논의든지 생산적이 되려면 모든 논제가 아니라 한 가지 논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기 때문에, 일단 방금 인용한 대목에 초점을 맞춰서 답변을 작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답변이 진행하는 도중에 그가 제기하는 다른 논제 한 두 가지도 건드리게 될 것이다.
1. 이론적 헌정의 필요성
▲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
사람들의 자기 주장들이 뒤엉키고, 이해와 소통이 자라나야 할 곳에서 오히려 오해와 왜곡이 횡행하고 있다는 경험적 느낌으로부터, 뭔가 말의 질서라고 할 만한 것이 권위를 행사해 주면 좋겠다는 정도의 바람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만한 사항이다. 그처럼 막연하고 일반적인 차원의 바람에는 나도 공감하는 면이 크고, 윈치 역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 헌정"을 서규환이 언급하는 까닭이 단지 막연하고 일반적인 정도의 바람을 표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헌정하는(constitute) 세계를 내가 비판적 현대성이라 명명하는 논술, 객관적 세계, 사회적 세계, 주관적 세계로 분화"된 것으로 바라보는 발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이론적 헌정"에 관해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말이 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의하려면 다시 <비판적 현대성의 정치적 이론>(서규환 지음, 다인아트 펴냄)을 비롯한 그의 저술들을 파헤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규환의 서평으로 시작된 이 대화가 이후로도 이어진다면 나는 그의 저술을 필요한 만큼 파헤쳐 가면서 논의를 계속할 용의가 있다.
다만 이번의 답변에서는 그가 뜻하는 바의 세목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일단 "이론적 헌정"이라는 문구와 관련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기초적인 사항들 몇 가지를 논급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항들에 관해 동의가 이뤄진다면, 장차 이어질지도 모르는 추가적인 논의가 생산적으로 전개되는 데 도움이 될 공통분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 헌정(憲政)이라는 문구는 정치 사회의 조직 원리, 즉 정치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를 규율하는 기본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헌법 또는 헌정이라는 개념을 담론의 영역에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응용과 관련해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진리 두 가지를 적시하고 싶다.
첫째는 정치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 전반을 규율하는 규범이든 이론의 영역만을 다스리는 규범이든 간에, 규범이 작동함으로써 빚어지는 결과는 일률적인 복종이 아니라 규범에 따른 행동과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 사이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정치 사회를 규율하는 헌정은 유사시 일탈 행위를 강제로라도 제재한다는 의미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반면에, 이론적 헌정의 경우에는 강제가 가해지는 순간 그것을 굳이 이론적 헌정이라고 분별해서 불러야 할 모든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1-1. 규범의 효과
평면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인간 사회에서 규범이라는 것은 해당되는 사람들의 행태를 특정한 범위 안에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는 데 성공한 규범의 사례는 거의 없다. 도둑질을 금하는 규범은 대다수 인간 사회에서 고대부터 있었지만, 여전히 도둑질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물론 사회화 과정 그리고 공론장의 집단 지성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남을 해치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설득하고, 동시에 절도, 강도, 사기범의 검거율을 높임으로써 사회 전반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정책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정당하게 필요하다는 사회 정책적 차원과는 별도의 지평, 즉 인식론적 지평에서 바라볼 때 눈에 띌 수 있는 점 하나는, 도둑질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에서 단지 도둑질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 제거된 형태의 사회가 아니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무척 생소한 사회일 것이라는 점이다.
도둑질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는 예컨대 소유권을 지금 우리가 하듯 구분하면서 단지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남의 소유물에는 손을 대지 않는 형태의 사회가 아니라, 도둑질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다시 말해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곳에 가야 도둑질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반화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어떤 사안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제재해야 할 부류의 행태를 따로 묶어 금지 대상으로 설정한다고 할 때, 그렇게 지목된 부류의 행태가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줄어들지는 실제적인 사정에 따라 달라질 경험적인 문제다. 반면에 금지되는 행태와 허용되는 행태 사이의 구분이 정형화되는 것은 규범으로 초래되는 필연적인 효과다. 예컨대, 살인이나 사기 등과 같은 범죄와 관련해서 실제 근대 사회의 법률 이론이 그랬듯이, 사회생활이 역사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금지와 허용 사이의 구분은 점점 더 치밀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점을 음미해보면, 어떤 표준적인 헌장을 제정함으로써 장차 발생할 문제들을 해결할 지침을 마련한다는 발상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기대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다. 헌장을 제정한다는 것은 어떤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칙을 어떻게 정하더라도 그 원칙 안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양상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 시점에서 어떤 원칙이 제정되더라도 장차 어떤 새로운 원칙이 등장해서 헌장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지는 그 헌장에 의해 규율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헌장에 규정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역시 헌장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사실 동일한 이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한국 헌정사에서 1954년의 사사오입이라는 황당한 계산법에 의한 개헌을 헌법 조문이 막아내지는 못했다. 현행 헌법 아래서도 예컨대 21조 2항에서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하위 법률 및 사법 기관의 관행에서는 허가제가 버젓이 득세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엇이 합헌이고 무엇이 위헌인지에 관한 논란은 헌법이라는 개념을 가진 모든 나라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헌법이 존재하는 곳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행태가 합헌으로 통일되는 곳이 아니라, 합헌과 위헌에 관한 논쟁이 존재하는 곳이다.
1-2. 이론적 헌정?
방금 1-1에서 전개한 내용을 헌장이나 원칙을 명시적 언표의 형태로 제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헌법과 법령과 규칙 중에는 물론 없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고 있으나 마나 한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대다수의 헌법과 법령과 규칙은 각각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필요해서 생긴 것이고 또 그러한 필요에 상당히 부응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규칙이 어떤 사회에서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할 때, 인정의 최종적인 주체는 규칙 제정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 전체라는 점을 나는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쇼트에 대한 윈치의 비판이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성찰적 도덕만을 강조한 계몽적 합리주의를 비판하면서 "원칙, 신념, 정의, 공식 등이 모두 그것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라는 맥락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125~126쪽)고 한 오크쇼트의 정당한 지적은 지금까지 내가 위에서 논의해 온 내용과 일치한다.
하지만 오크쇼트는 어떤 규칙을 의식적으로 준수하는 행태에 비해, 그러한 자의식이 필요 없이 행해지는 습관적 행태를 보다 중시하는 것이 도덕을 이해하는 데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윈치는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의 행동이 어떤 규칙의 적용인지의 여부는 그가 그 규칙을 형상화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의 행동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바르게 하는 방식과 그릇되게 하는 방식을 구분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여부에 달렸다"(126~127쪽)고 말한다.
성찰적 도덕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자의 입장은 바로 두 가지 난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나는 행위자가 의식적으로 준수하고자 하는 그 규칙이 얼마나 도덕적이냐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그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이 되느냐는 문제이다. 하지만 습관적 도덕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그 습관이 얼마나 도덕적인지, 그리고 한 행위자가 서로 다른 시점에서 행한 두 개의 행동이 어떻게 같은 습관의 두 사례가 되느냐고 하는 동일한 두 개의 난문을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결국 자체로 하나의 진짜 문제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성찰이라는 매개를 통하든 습관이라는 매개를 통하든 그 진짜 문제가 조금이라도 쉬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덕이나 정치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논리에 관해서도 동일한 논지가 성립한다.
루이스 캐롤의 우화를 인용하고 나서 윈치가 "논리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실제 추론 과정을 어떤 논리 공식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125쪽)고 정리하는 대목, 그리고 사회의 진행을 예측한다는 발상에 대해 "시 한 편이 어떻게 쓰일지 또는 하나의 새로운 발명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예측하는 일에는 곧 그 시를 쓰고 그 발명을 이룩하는 일이 포함된다"(172쪽)고 한 모리스 크랜스턴의 논지를 인용한 대목 등이 동일한 취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서규환이 헌법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헌정이라고 말한 데에는 아마도 올바른 성문법을 하나 제정하는 것만으로 말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으리라는 (내가 보기에 옳은) 성찰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론적 헌정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윈치에 대한 비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윈치의 비판에 취약하다는 점을 노정할 뿐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 문단에 인용한 윈치의 언명, 즉 "논리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실제 추론 과정을 어떤 논리 공식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는 말이 서규환의 "이론적 헌정"이라는 발상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답변에서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이 옳다면, 장차 이론의 영역에서 어떤 질서가 어떻게 확립될지 안 될지는 어떤 성문법적인 헌장에 의해서도 어떤 관습적으로 정착된 규칙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러니까 말의 질서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면 윈치의 논지를 철저하게 오해한 결과일 뿐이다.
왜냐하면, 윈치의 주장은 말의 질서라는 것이 규제를 함축하는 차원의 규칙으로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지, 애당초 말의 질서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윈치가 어떤 식으로든 규제를 지향하는 논리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결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의 질서는 규제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철학적 숙고를 통해 도달한 다음, 바로 그러한 진실을 밝히는 실천이야말로 말의 질서를 세우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으면서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활 방식의 창안
서규환은 윈치가 "생활 형식을 새롭게 창안하는 데 소홀하다"고 한다. 그리고 "박동천이 주장하듯이, 하나의 표준적인 생활 형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생활 형식들이 모두 질적으로 대등한 것이라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잔데의 주술이 서구인의 과학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판정될 수 없다는 말이 곧 아잔데의 생활 방식과 서구인의 생활 방식이 질적으로 대등하다는 말일까? 누가 "김치가 치즈보다 발효 식품으로서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게 김치와 치즈가 질적으로 대등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치즈보다는 김치 맛에 익숙하며, 따라서 김치를 먹는 빈도가 치즈를 먹는 빈도보다 훨씬 높다.
윈치는 아잔데의 생활 방식을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더구나 내가 아는 한, 윈치는 아잔데 사회로 가서 그들처럼 살아가고 싶은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는 물론 자신의 지리적 배경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사회의 문화들을 존중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애정이 특별히 위축된 것도 아니다.
생활 방식의 선택에 관해 말하려면 우선 어떤 차원의 선택지를 두고 말하는지를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를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
a. 어느 한국인이 예컨대 에스토니아로 이주해서 에스토니아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경우처럼 출생에 의해 소속했던 문화권을 떠나 개별적으로 다른 문화권을 선택하는 경우.
b. 어느 한국인이 한국 사회 안에서 살면서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든지, 직업을 바꾼다든지, 삭발하고 입산수도를 감행하는 경우처럼 출생에 의해 소속된 문화권 안에 살지만 그 안에서 개별적으로 기존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로 선택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
c. 한국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현재와 같은 언어, 종교, 윤리, 기타 온갖 사회 제도와 문물을 버리고 가령 네팔의 언어, 종교, 윤리, 기타 온갖 사회 제도로 바꾸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생활 방식 전부를 다른 사회의 생활 방식으로 바꾸기로 선택하는 경우.
d.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현재와 같은 언어, 종교, 윤리, 기타 온갖 사회 제도와 문물 전반은 대체로 유지하면서 그 가운데 일부를 바꾸는 것처럼, 한 사회에서 생활 방식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바꾸기로 선택하는 경우.
이들 각각의 경우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함의를 찾아내려면 우선 선택이라는 개념의 형식적 특징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 무엇을 선택한다는 말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말이 되는 종류의 대안이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자연의 이법에 대해서 물리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와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복종하는 상태를 구분하는 스토아주의의 문법이라면 이런 전제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서규환이 말하는 선택이 스토아주의적인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접는다.)
이제 c의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한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기존의 생활 방식 전부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꾼다는 것은 말이 되는 종류의 대안이 아니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생활 방식의 변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서양 근대의 혁명적 변화 이후에도 언어, 종교, 정치 제도, 학문, 기술, 상거래의 기본 질서 등 중세의 유산 여러 가지가 살아남아 있다.
외래 문물을 급격하게 거의 강제 당하다시피 수용한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도 전통 사회의 가치, 위계 질서, 권위, 사고방식 등은 상당 부분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한 사회가 기존의 생활 방식 전체를 버리고 그것과는 사뭇 다른 생활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기존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 역시 적극적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익숙한 방식이 세대를 통해 전승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a와 b의 경우는 말이 되는 종류의 대안이 명백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계산과 의지에 따른 선택 행위라는 형태적 범주 안에 속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어떤 다른 사회로 이주한다거나 어떤 다른 생활 방식으로 옮겨간다는 차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열려있는 동시에 원래 살던 사회에 남는다든가 기존의 생활 방식을 대체로 유지한다는 차원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열려있다는 말이 된다.
나아가 이와 같이 선택의 여지가 열려 있다는 말은 다시 각 선택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에 관해서 논의가 가능하고 또한 어떤 면에서 필수적이라는 함의를 가진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선택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에 관한 논의가 필수적이라는 데서 곧바로 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을 나눌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선택의 경우, 어떤 선택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를 논의할 때에는 무엇보다 당사자가 어떤 사람이며 논의되는 그 선택이 어떤 맥락에서 내려진 것인지가 필수적인 항목으로 고려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논의에서 적용될 수 있는 잘 했다 못 했다의 기준은 어떤 식으로든 보편적 일률성과는 부합할 수가 없다.
더구나 어떤 특정한 선택 행위의 사례에 관해 의미심장한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으로서 잘 했다 또는 못 했다는 잣대만이 유일한 것도 아니다. 주어진 선택을 통해 그 행위 당사자가 어떤 인격을 형성하고 있느냐는 차원 역시 그에 못지않게 (때로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논의의 지평이다.
마지막으로 d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는 한 사회가 어떤 정책과 제도를 시행할 것인지에 관련되는 문제로서 대다수 정치 이론 또는 정치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추구하는 주제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예컨대 4대강 사업이라든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지, 정리 해고라든지, 무상 급식이라든지, 대북 정책 등의 현안에 관해 실제 그렇듯이,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예외 없이 그렇듯이, 정책과 제도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세력들 사이에 온갖 동기와 책략과 수사와 오해들이 뒤엉켜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논쟁과 때로는 투쟁을 확대 재생산하기 쉬운 영역이다. 이론적 헌정을 정립함으로써 새로운 생활 방식의 창안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서규환이 제안하는 데에는 아마도 이런 주제에 관한 복잡한 논란이 단순히 시세의 동향에 의존해서 무작위적인 결론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먼저 말의 질서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4대강 사업에 관해 정치인들이 논쟁을 벌일 때에 비해서 공학이나 정치경제학이나 도덕철학의 이론가들이 논쟁을 벌인다면 논란의 정도가 줄어드리라고 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치열한 경쟁의 요소를 함유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를 어렵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도피주의의 유혹에 빠진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론이나 학문이나 철학이 그런 도피처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는 기대는 좋게 봐주면 순진함의 발로이며, 꼬집어 말하자면 이론적 담론의 책무를 방기하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실제적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할 것인지에 관해 이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지는 대단히 많다. 그렇지만 그 이론 자체가 불완전했을 가능성은 절대로 그 이론 자체에 의해서 봉쇄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게다가 이론에 의해 부각된 고려 사항들 각각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줘서 어떤 균형점에서 최종 선택을 내릴 것이냐고 하는 실존과 관련된 진짜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이론도 표준적인 지침을 제공할 수가 없다.
정치철학자 또는 정치이론가가 어떤 구체적인 실제 공동체가 직면한 선택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도움을 주기 원한다면, 온갖 종류의 정치적 논쟁들을 관통하는 보편적 이치의 표준을 구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논쟁에 참여해서 자신이 믿는 이치에 따라 그 사안을 바라 볼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를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의 자격으로서 피력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윈치는 물론 아잔데 사회에 대해서든 한국에 대해서든 미국이나 영국에 대해서는 어떤 정책적 제안을 내놓은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에 그는 스스로 창안해 낸 언어적 혼동의 그림자 안에 갇혀서 헤매는 일부 철학자들과 일부 이론가들에게 출구를 제시하는 사업에 일생을 헌신했다.
이 때문에 얼핏 보면 그가 참여를 무시한 관조(觀照) 일변도의 철학자인 것처럼 비칠 수 있다. 그가 상대주의자로 흔히 오인되는 주요한 까닭 중에는 인간의 어떤 선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선택을 잘 했다 못 했다는 판정의 지평보다는 그 선택을 통해 어떤 가치가 중시되는 대가로 어떤 가치가 배제되는지, 나아가 그리하여 그 행위자가 그 선택을 통해 어떤 인격체로 탄생하게 되느냐는 지평에서 발언하는 관조적인 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하는 행위와 그것을 모르면서 하는 행위의 구분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구분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철학과 정치를 연결하는 실체적 접점으로 본 것이다. 20세기 철학자 가운데 가장 참여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유에 대한 해설서를 쓰면서(Simone Weil: The Just Balance), 베유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특별한 찬반 의사를 밝히지 않은 채, 그녀의 철학적 깊이를 누구보다도 세심하게 인지하면서 높은 경의를 표시한 이유 중에 하나도 베유가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드문 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베유의 철학은, 말하자면, 자기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악의 분량과 실체를 찾아내고 그것과 싸우는 데 일생을 집중해야 할 이유를 제공했다. 윈치의 철학이 집중한 초점 중 하나는 정치와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연관을 맺어야 말이 되는지를 밝히는 데에 집중했다. 두 사람의 삶은 정치적 참여도에서 현저하게 상반되지만, 철학이 정치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뚜렷한 사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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