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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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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프레시안 books] 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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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천이 또 한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그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펴냄),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I>(한길사 펴냄),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전4권, 나남출판 펴냄) 등의 고전을 번역, 출간하여 학문적 열정과 실력을 입증해 보인 바 있다. 그는 한국 정치학자들 가운데 조로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학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이번 책은, 피터 윈치의 The Idea of A Social Science and Its Relation to Philosophy(1958년)와 "Understanding a Primitive Society"(1964년)를 번역하고 한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적어도 서구 학계에서는 출간된 이래, 두 논고 모두 매우 논쟁적인 글이었다. 그런 만큼이나 학문사에서 비중이 높은 논고이다.

박동천이 <사회과학의 발상>(<발상>)이라고 번역한 앞의 책은, 윈치가 1958년에 출간한, 143쪽에 불과한 아담한 저작이지만 매우 많은 논제들을 담고 있는 밀도가 높은 논술이었다. 그런 만큼이나 서구에서 이 책은 출간되자 학문적 토론과 논쟁의 중심에 있게 되었고, 윈치의 학문적 명성은 높아졌다. <원시 사회의 이해>(<이해>)라는 논고는 이 책을 보완하는 저술로 이해되고, 박동천이 이렇게 한 권의 책에 묶은 것은 적절하다.

윈치의 이 저술을 둘러싼 논박 과정을 보면서 나는 새삼 서구 지식인들의 저력을 느꼈다. 그들은 학문 세계에서 새로운 사유와 발상의 가치를 그 어느 것보다 높게 평가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비판과 논쟁의 대화를 통해 학문세계를 발전시켜 왔으며 성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발상"은 박동천이 밝히고 있듯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있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었다. 그 처음은 김기현의 번역으로 1985년 서광사에서 출간한 <사회과학과 철학>이었고, 두 번째는 1997년 권기돈의 번역으로 현대미학사에서 <사회과학의 이념>이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이번 박동천의 번역은 세 번째인 셈이다. 좀 이례적 사례라 말할 수도 있겠다. 박동천은 이렇게 세 번째의 번역으로 새로운 번역본을 내는 까닭은 "기존의 번역본이 윈치의 생각을 한국어로 표현하는 데 미흡하다고 보기 때문이다"고 밝히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내가 어떤 점들이 왜 미흡하다고 보는지를 상세하게 해명하는 것이 책의 내용을 해설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만약 다른 번역자들 또는 여타 독자들이 그 해명에 대해 반응을 보여준다면, 그로써 이어지는 토론이 또한 이 책에서 다뤄지는 주제 전반에 관한 이해의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과제물들이 쌓여 있어서 시간의 여유가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다른 사람들의 번역문에 대한 상세한 비판은 현재 한국 지식인 사회의 평균적인 풍토에 비해 너무 심하게 후벼 파는 느낌만을 자아내고 생산적인 방향의 토론으로는 이어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염려는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내 번역문 및 이 해체의 내용에 관해서도 비판의 여지는 대단히 많으리라고 예상한다. 그러므로 추가적인 토론을 통해서 이해와 소통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이 책에 대해 혹시 나올 수도 있는 날카로운 비판을 미리 환영함으로써 열어놓고자 한다."


박동천의 이 진술에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그가 지적하는 "현재 한국 지식인 사회의 평균적인 풍토"가 무엇인지, 나 역시 짐작할 수 있다. 비판과 논쟁이 매우 빈곤한 지적 풍토, 아니 반지성적 풍토를 지적하는 말이리라. 그가 이런 풍토를 문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 왜 이렇게 지적하고는 그냥 넘어가려 하는지 묻고 싶다. 기존의 두 번역서가 왜 미흡한지 "상세하게 해명"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과도한 요청이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몇 가지 범례들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구체적인 비판을 통해서 생산적인 논쟁이 일어나고 학문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현재 한국 지식인 사회의 평균적 풍토"를 비판하고 그 분위기를 극복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고 마주보며 예의를 갖추고 논거 있는 비판을 개진하고 의견들을 소통하는 학문 대화가 한국학계에서는 제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간혹 용기 있는 학자가 글에 대해서 비판을 개진하면 그 글의 저자의 인물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미성숙함이 지속되고 있다. 더욱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얼굴을 감추고 익명으로 타자의 글을 심사할 때는 글을 인상적으로 읽고서는 무딘 칼로 난폭하게 휘두르는 반지성적 작태가 만연해 있다고 토로하는 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그 "평균적 풍토"를 비판하여 주기를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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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서평이란, 대개는 책이 처음으로 출간되면 논평의 계기를 매체들이 마련하면서 이루어진다. 번역서의 경우도 대개는 이와 같다.

박동천의 이 번역서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원본이 매우 오래 전에 출간되어 이미 다양한 관점과 맥락에서 논의되었던 책이어서, 서평하기가 벅차고, 서평의 착상을 잡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책은 윈치가 1992년 제2판에 붙인 자기비판적 에세이를 포함하고 있는데, 자기비판이 구체적으로 충분하게 개진되어 있지 않고 함축적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지적해 두고 싶은 말도 있다. 번역서의 경우,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서 책의 내용을 비판하는 경우, 어떤 면에서 공허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는 한국어로 쓴 서평을 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변호하는 자가 나설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스승의 책을 제자가 번역을 했다면 사정이 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이 책의 경우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역자 박동천은 윈치의 제자이다.

여기에서 서평의 대상으로 삼는 윈치의 "발상"과 "이해"가 학문사에 끼친 직, 간접적인 영향력은 매우 넓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해 보이는 몇 가지를 짚어볼 뿐이다.

첫째, 윈치의 발상은 실증주의의 오류와 한계에 관한 광범위한 논의들의 중심에 있었다. 실증주의 논쟁은 자연과학의 본질과 그 방법론과 대비되는 정신과학의 본질과 그 방법론이 어떠한 특성을 가지는가 하는 논쟁과 연관되어 있다. 이 논쟁에서 때로는 자연과학은 어떻게 자신의 진리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가 하는 논점이 다시 부각되기도 했다.

"설명과 이해"라는 논쟁 주제가 가진 제법 긴 논쟁사, 1960년 중반 독일 사회학 대회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실증주의 논쟁, 곧 칼 포퍼와 한스 알베르트의 비판적 합리주의와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사이의 논전도 윈치의 "발상"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윈치는 이른바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에 강력한 자극이었다. 윈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적 계승자의 한 사람이었고, 인간의 사유에서 언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그의 글들을 독해하면서 성찰했다.

이 언어학적 전회를 주조했던 사상가들은 서로 지적 자극을 받고 받았을 터이지만 하나의 궤를 그리며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 출간을 계기로 해서 언어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면, 독일에서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적 저술들이 출간됨으로써 그 정점을 이루고 하버마스가 비판이론의 언어학적 전회를 주도해 나갔는데, 영미 권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전후에 행사한 영향력이 있었다. 윈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의 사상사적 위상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셋째, "철학이 지식의 계단에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한다는" 인습적 생각이 심대하게 도전받은 오늘날, 말하자면 "철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양식이 철학과 사회과학들 사이의 대화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윈치의 "발상"과 "이해"도 있었다. 윈치는 "발상"에서 철학의 과제는 오늘날 "정지 작업"에 있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정지 작업이란, "보다 발전된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을 철학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지 작업에는 "언어적 혼동"을 지적하고 "논리적" 명확성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과제도 포함되어 있다. 윈치는 이런 정지 작업 논술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한다.

"철학사에서 인식론의 문제들은 언제나 심각한 철학적 성찰에서 핵심에 위치하여 왔다. 심지어 철학사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으리라 가정해 보려 한들, 그 다른 모습이 어떠하였을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보다 중요한 점은 라즐렛의 견해가 철학 내부의 진정한 순서를 전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식론의 문제가 중요한 까닭이 마치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른 중요한 문제 즉, 과학철학, 예술철학, 정치철학 등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순서가 완전히 정반대라고 주장하고 싶다. 즉, 과학철학, 예술철학, 정치철학-나 같으면 이들을 '주변적" 철학 분야라고 부르겠다-등이 인식론 및 형이상학과 관계를 잃는 순간이 바로 그들이 철학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는 순간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상>, 58~59쪽)

윈치는 피터 라즐렛을 비판하면서 과학철학 등과 인식론 및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바른 방법을 세우고 그 다음 그 방법을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개별 대상들이 있는 양 사유하는 태도를 그는 비판한다. 이 비판은 그가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해당한다. 사회과학과 철학이 각기 완전 분리된 채 별도로 있고, 그런 분리 상태에서, 사회과학이 철학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철학의 본질에 대해서 (그 당시) 새로운 의문을 던졌던 셈이다. 양자는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결합되고 뒤섞인 채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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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치는 비트겐슈타인의 "규칙을 따르기"라는 발상을 천착한다. 이 발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더불어, 궁극적 목적(Telos)이 선험적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다고 믿는 목적론적 사유나, 습관이나 관습 혹은 전통에 호소하는 오크쇼트와 같은 보수주의적 사유를 그는 비판한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서 학습능력 같은 것에 주목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문제를 풀고 "똑같이" 풀어보라고 말했을 때,

"여기에서 요지는 선생이 보여준바 본을 따름에 있어 학생이 이렇게 할 가능성도 있고 저렇게 할 가능성도 있음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니만큼 선생의 본을 따르는 습관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따르면 괜찮고 다른 방식은 안 된다는 깨달음도 함께 획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선생이 하듯 같은 식으로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같은 방식에 해당하는지를 습득하여야 한다." (<발상>, 128쪽)

윈치의 "규칙을 따르기"라는 실천 행위를 의미 있게 해석하자면, 그것은 학습 능력으로서, 규칙을 적용하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 규칙이 어떻게 잘못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규칙을 적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칙을 따르는 행위자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상황이 새롭게 전개되면 규칙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능력, 등이 총체적으로 발휘되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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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치는 언어를 비트겐슈타인의 파악에 따라 이해하려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실재가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안에서 실재하는 것 및 실재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 및 실재와의 일치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이해>, 241쪽. 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윈치가 말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의 기본 단위를 무엇으로 그는 생각하고 있는가? 윈치는 언어를 근본적으로 사회의 매체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언어는 매체로서, 언어의 안과 밖이 사회를 소통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언어의 역사적 전형에 대한 발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지 못해 보인다. 이 점이 궁극적으로는 상대주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의심을 받게 하는 원천의 하나인 것 같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잔데 족이 가지고 있는 주술의 범주와 비슷한 것을 우리는 애초에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잔데 족의 범주를 이해하고자 원하는 것이 우리인 만큼 이해의 범위를 넓혀야 할 쪽이 바로 우리임이 드러난다. 과학/비과학이라고 하는 범주를 우리가 구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아잔데의 범주를 거기에 끌어 맞추어야 한다고 고집할 일이 아니라, 아잔데의 범주를 포섭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의 이해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모색하는 종류의 이해가 우리의 기존 범주와의 관련 안에서 아잔데의 범주를 이해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주술을 우리의 범주에 속하는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더욱이 우리의 기존 범주 가운데 어떤 것이 아잔데의 활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시점(視點)을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 역시 그 말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 별개의 사항인 것이다."(<이해>, 288~289쪽. 이 인용문에서 "우리"란 윈치가 속한 문화를 의미한다. 강조는 필자.)


윈치가 속한 서구 문화가 서구 문화에 대한 자기반성을 위해서 비서구 문화, 예컨대 아잔데 문화를 이해하려 했던 것인지는 불확실하고-문화인류학은 서구가 자신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해서 학문 분과로 제도화시켰던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지금 현 상태에서 이해하려는 선취를 누가 먼저 했는지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비판의 철저성(radicality)이 그 특징인 현대성의 시점에서 볼 때, 서구인들이 아잔데의 생활형식(Lebensform)을 경험함으로써만이 자신의 문화인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적 반성력을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장대한 역사적 과정을 재검토함으로써 자기반성력을 높일 수 있는데, 이는 역사적 과정에 상상력의 다양한 이질적인 원천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타 문화들의 생활형식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생활형식에 대한 비판적 반성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윈치가 <이해>에서 비코에 따라 출생, 사망, 성에 대한 관념들이 인간의 생활형식에서 근본적 헌정 요소들이며, 이런 한에서 원시문화의 윤리적 가치에 주목하는 것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타자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학습하는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소통적 합리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 비판적 반성력은 제도로서 자리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윈치가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이분법으로 사유하는 서구인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생활형식들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하여 비판적 논의를 할 수 있는 이론적 헌정(constitution)이 필요하다. 윈치의 주된 관심은 자신의 문화와 그 합리성에 대한 성찰을 높일 수 있다고만 지적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윈치는 기존의 개념들을 해설하는 데 관심이 있지, 그것들을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개념들을 비판하고 생활형식을 새롭게 창안하는 데 소홀하다.

전(前)근대의 생활형식이, 예컨대 아잔데 족의 그것이, 그 자체로 비판될 수 없는, 비판될 필요가 없는 것이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잔데 족의 믿음과 개념을 분류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아잔데의 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욱 세련된 이해'가 요구되는 것은 일면 사실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되는 종류의 분류 및 평가는 고도의 철학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아잔데의 생활형태가 맥킨타이어가 주장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문화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특정 형태에 입각하여 그 각각의 형태에서 필수적인 요소들과 아잔데의 생활형태가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따라 분류 및 평가가 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맥킨타이어는 바로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혼동을 범하고 있다. 즉, 그는 분류에 대한 관심에 일정한 정도의 세련이 함유되어 있다는 점이 곧 우리가 실제 분류 작업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세련되었음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 지금 우리는 아잔데의 주술이 과학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때 이와 같은 비교라는 개념은 실제로 고도로 세련된 개념이다. 하지만 이 점이 사실이라고 해서, 아잔데의 관행을 우리의 과학에 견주어 덜 세련된 것으로 보고 우리의 과학을 더 세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함의가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과학과 주술 사이의 관계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곧 주술이 과학의 원시적 형태라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해>, 287쪽. 강조는 필자.)

윈치는 앨래스데어 맥킨타이어의 편견과 오류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세련화(sophistication)"(윈치에서 "세련화"는 "단순성(simplicity)"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분화 개념과 유사한 차원의 것으로 보인다)를 "단순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인과관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주술적 사고를 거부하게끔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저들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는 논지를 레비-브룰에 대항하여 폈던 에반스-프리차드의 주장을 윈치는 받아들인다.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윈치가 상대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했다.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장들이 있으며, 각 장에는 그것에 고유한 합리성이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 윈치에게서 개진되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아내고' '설명하는' 한,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만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설명하는' 일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제한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설명하고 찾아내는 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우리 사회에 독특한 일일 수도 있다. 즉, 연구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관심을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가 결여되어 있어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관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탐구 기법 및 논증의 양식이 발생한 반면에 그 사회의 생활에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이해>, 277~278쪽. 여기에서 "우리"는 윈치가 속해 있는 장을 의미한다.)

윈치가 타 문화들에서 배우려고 하는 겸허의 미덕을 탓할 까닭은 없다. 타 문화들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 말하자면, 그 배움의 논리와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방의 문화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단순히 일을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우리와는 다른 식의 기술(技術)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상의 다양한 가능성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 전체의 의미를 성찰해보려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정한 행동이 함유하는 중요성의 다양한 형태에 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을 배울 수가 있다. 맥킨타이어는 아잔데의 주술을 다루면서 바로 이 차원을 빠뜨리고 있다. 그들의 주술에서 그가 포착하는 것은 오로지 소비재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 그것도 착각에 의하여 오도된 기술일 뿐이다. 하지만 아잔데 족에게 곡물이 장차의 소비를 위한 물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인생, 동료와의 관계, 장차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지 아니면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될지 사이에서 어느 쪽의 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릴는지 등등의 사항들이 곡물에 대한 그의 관계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 주술적 의식은 표현의 한 형식으로서, 그 형식 안에서 이 모든 가능성 및 위험들이 조망되고 성찰된다. 나아가 그것들이 변형되고 심화되는 것도 그 안에서이다." (<이해>, 296~297쪽)

윈치가 아잔데 족에서 곡물이 그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발터 벤야민이 <파사주-작품>에서 선물이나 유언장 작성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는 맥락을 연상하게 한다.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선물이나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돈으로 환산하여 계산하여 넘겨주지 않았고, 각 사물과 함께 한 경험들을 고려하여 각 사물을 자신과 친밀한 자에게 넘겨주고자 했다는 그런 기억의 편린들.

하지만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의 합리화는 가속되며, "상품화의 논리"(오페)가 지배적인 것으로 확산하여 "상품물신성"(마르크스)의 지배에 의해, 윈치가 지적하듯이, 소외 현상이 심화되는 경향이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헌정하는(constitute) 세계를 내가 비판적 현대성이라 명명하는 논술, 객관적 세계, 사회적 세계, 주관적 세계로 분화된 세계의 발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나의 발상들, 서규환, <비판적 현대성의 정치적 이론>(다인아트 펴냄), <정치적 비판이론을 위하여>(다인아트 펴냄)를 참조하라.)

5

아잔데 족의 생활형식이 설사 이상적이라 가정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생활형식으로 회귀할 수는 없다. 또한 아잔데 족의 그것이 민주주의적 생활형식이라고 판단할 수도 없다. 원시적 사회에서 오늘날의 지배적인 생활형식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삶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원시적 사회의 삶을 현대적 생활형식과 대등하다거나 더 좋은 것이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현대적 소통적 합리성의 발전에 의해서 인간의 삶은 자연적, 사회적 제약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 것이다.

박동천이 주장하듯이, 하나의 표준적인 생활형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생활형식들이 모두 질적으로 대등한 것이라 판단해서도 안 된다. 원시적 사회의 생활형식도 하나가 아니며 다양하고, 그 생활형식들 모두가 각기 전체로서, 오늘날의 현대적 사회의 생활형식에 비해 비판적 반성력은 발전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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