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무엇 때문에 푸른 산에 깃들어 사느냐구요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빙그레 웃고 답 안하지만 마음은 절로 한가합니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두둥실 물에 떠 저만치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여기가 바로 속세를 벗어난 딴 세상이 아닐까요
한문을 더듬더듬 써나가다가 그만 마음이 출렁해져버렸다. 이 시에서 얕게 찰랑대는 나의 시심(詩心)을 건드린 건 벽산도 도화도 유수도 아니었다. 인간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첫 연의 棲, 자를 쓰다가 그랬다. 그 글자는 단박에 서식(棲息)이란 단어로 연결되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지난 4월. 동북아식물연구소에서 파라택소노미스트 과정에 등록하고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다. 현진오 박사가 식물에 대한 대강을 강의한 후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었다. 처음 본 것은 봄에 가장 빨리 피는 꽃 중의 하나였다. 다음날 우리가 야외 실습할 천마산에서 찍은 앉은부채였다. 앉은부채는 주위의 눈을 녹이며 피어나 있었다. 그동안 무심코 눈길을 좋아라 밟기만 했는데, 저 꽃은 눈을 뚫고 봄의 전령사처럼 애써 피어나는 것이었다.
▲ 앉은부채. ⓒ이굴기 |
천마산에서 볼 수 있는 봄꽃들-너도바람꽃, 애기괭이눈,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복수초, 올괴불나무, 엘레지, 흰현호색-을 보는 내내 내일이 기다려졌다. 강의가 막바지에 이르러 자유 질문 시간이었다. 현 박사는 용어의 개념을 정확히 쓰는 게 중요하다면서 수강생들에게 먼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서식(棲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들 동물의 서식지, 나무의 서식지라는 말을 쓰는데 맞는 말일까요?
▲ 꿩의바람꽃. ⓒ이굴기 |
실제로 나는 그렇게 쉽게 써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 서식을 찾아보면 '동물이 깃들어 삶'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이 풀이에서 중요한 건 주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식물이 아니라 동물이다. 깃들어 사는 건 동물이지 식물이 아닌 것이다. 그럼 식물에 해당하는 용어는 무엇일까. 현 박사는 답을 금방 주지 않았다.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날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많은 것을 새로 알았다. 아니 새로 알았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간 내가 안다고 여겼던 것은 흐릿한 상태였고 이번에 아주 적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동안 자연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게 뻔한 눈치와 대충의 짐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꽃은 꽃받침+꽃잎+수술+암술이란 것을 알았다. 잎의 구조가 잎자루+잎몸으로 이루어지며 잎몸은 주맥+측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생물종이 약 6만 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물 다양성이란 개념에 대해서, 지구 온난화가 식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배웠다. 야생에서 멸종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인지를 배웠다. 그러면서 나는 생태계 교란 식물과 멸종 위기 식물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편, 한시라면 이태백과 쌍벽을 이루는 두보의 시에도 棲, 자가 들어가는 게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조사해 보았다.
이태백이 도저한 흥으로 휘갈기듯 시를 완성했다면 두보는 한 자 한 자 세공하듯 언어의 조탁에 큰 신경을 쓴 시인이 아니던가. 있었다. <두시언해>에도 소개된 바 있는 <절구육수(絶句六首)>의 마지막 시에서 그 글자를 찾아내었다. 과연 이백이나 두보는 식물학자는 아니었겠지만 그 당시에 벌써 쓰임새를 정확히 터득하고 있었다.
江動月移石 (강동월이석) 강물 움직이니 달빛은 바윌 옮겨가고
溪虛雲傍花 (계허운방화) 빈 시내에 구름이 꽃같이 피어나네
鳥棲知故道 (조서지고도) 새 깃드니 옛날에 다니던 길을 알겠고
帆過宿誰家 (범과숙수가) 돛 배 가버렸으니 누구 집에 묵으리오
그날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현 박사는 식물 공부를 할 때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하였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짚이는 바가 있기에 마음의 손뼉을 치면서 공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궁금해 하던 답을 주었다. 서식이란 동물에게만 써야 합니다. 식물의 경우에는 뭘까요? 그건 자생(自生)입니다. 자생.
자연은 생명을 낳고 산에는 자라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낳고 자라는 것, 그것은 生(생)이다. 이 글자는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라 한다. 세상을 가능케 하는 生(생)이란 마구 돌아다니는 동물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일생을 완성하는 식물을 상형한 것이다. <설문해자>에서도 '生'은 "進也. 象艸木生出土上. 凡生之屬皆從生."으로 나온다. 풀이하면 "생은 나아간다는 뜻이다. 초목이 흙 위로 나오는 모양을 본떴다. '生'과 관련된 한자들은 부수가 '生'이다."라는 의미이다.
生을 자세히 관찰하면 새싹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땅을 박차고 자라나는 나무들 모습도 보인다. 줄기가 있고 좌우의 옆으로 가지가 나는 게 꼭 그 한자 같다. 파주의 어느 오솔길에서 층층둥굴레를 보았을 때 나는 이 한자의 그림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지나 마등령도 지나 한참을 내려왔을 때였다. 어느 바위에서 자라는 정향나무를 보았다. 작고 야무진 가지는 공중을 뚫고 뻗어나고, 뿌리는 단단한 암석을 파고 들어가는 나무. 그때 그 줄기와 가지의 모습에서 나무에 박힌 촉촉한 생(生)의 의지를 확인했었다.
▲ 층층둥굴레. 멸종 위기종이다. ⓒ이굴기 |
▲ 정향나무. ⓒ이굴기 |
명실상부하게 스스로 자라는 것은 식물이다. 엽록소를 가지고 햇빛을 끌어들여 광합성을 하면서 자가 영양을 할 수 있는 것은 식물뿐이다. 동물은 아무리 성체가 된다 해도 먹이로부터 독립할 수가 없다. 식물은 스스로 자라는 존재이니 깃들 필요가 없다. 그러니 서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식물은 자생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설악산을 오를 때였다. 어느 정도 높이를 오르다 보면 다람쥐를 흔히 만나게 된다. 쉼터에서 배낭을 벗어놓고 숨을 고를 때에는 전혀 거리낌 없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마 등산객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나 초콜릿의 맛을 아는 녀석들 같았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하도 설쳐대니 어느 때부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성을 많이 잃어버린 다람쥐들은 계속해서 내 배낭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쉽게 물러날 기미가 아니었다.
지금 배낭 속에는 내가 산에서 먹어야 할 이틀치의 빵, 햇반 그리고 음료수가 들어 있다. 그리고 다람쥐 또한 저의 굴 바깥에서 먹이를 구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다람쥐나 나나 먹이는 외부에서 공급되어야 하는 신세이자 운명이었다. 어느 용감한 녀석은 반쯤 벌어진 나의 배낭 속으로 들락날락거리기도 했다. 나는 서둘러 배낭의 지퍼를 사납게 채웠다.
계(界)-문(門)-강(綱)-목(目)-과(科)-속(屬)-종(種)으로 이루어진 분류학의 체계에 따르자면 다람쥐와 나는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류강까지는 같다. 그리고 4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갈라진다. 녀석은 쥐목으로, 나는 영장목으로. 네발로 기고 두 발로 걷는 둘 사이의 이 기묘한 먹이다툼. 울창한 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며 구경하고 있었다.
▲ 내 배낭을 호시탐탐 노리는 설악산의 다람쥐. ⓒ이굴기 |
동물이란 누구에겐가 기대어 살고 무엇에겐가 깃들어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동물이 서식한다면 식물은 자생하는 것이다. 자생이란 말을 들으면서 그에 대응되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서식이란 말보다 먼저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떠올리고 보니 서식보다도 더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서식이란 단어는 이 말을 좀 곱게 포장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식물에게 자생인 것처럼 동물에게 맞춤한 단어는 무엇일까. 분류하자면 나도 그곳에 속할 터라서 조금은 뜨악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기생(寄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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