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에는 10개 신문이 올라 있지만, 그중 해방 이후의 일간 신문은 <자유신문>과 <동아일보> 둘뿐이다. <자유신문>은 비교적 중도적 논조로 보이는데, <동아일보>는 극우 색채가 강하다. 1946년 8월 15일자 두 신문의 제1면 구성과 내용에서도 이 점을 알아볼 수 있다.
▲ <자유신문> 1946년 8월 15일자. ⓒdb.history.go.kr |
▲ <동아일보> 1946년 8월 15일자. ⓒdb.history.go.kr |
<자유신문>에는 꼭대기 단의 사설 밑으로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의 축사가 중앙에 그리고 이승만, 김구, 박헌영의 담화문이 그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세 사람 담화문의 위치에 약간의 우열이 있기는 하지만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다.
한편, <동아일보> 지면을 보면 사설 밑에 하지의 축사와 이승만의 담화문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하지 축사가 오른쪽이라서 윗자리이지만 이승만 담화문의 덩치에 밀리는 느낌이다. 두 사람의 글 밑에 러치의 축사가 매달려 있다. 이승만 외 조선 지도자의 담화는 실려 있지 않다. 김구의 담화문은 이튿날에야 실린다.
그런데 8월 15일자 <자유신문>과 이튿날 <동아일보>에 실린 김구의 글이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의 글은 "자료 대한민국사"에 <조선일보> 8월 15일자에도 실린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일보>의 글은 <자유신문>의 글보다 앞에 몇 줄 더 붙어 있다.
"먼저 자신 반성"
8월 15일! 이 날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한국 민족에게만 영구히 기념될 감격과 흥분의 날일뿐더러 왜적의 강도적 행위와 나치스 독일의 구주제패의 야욕이 멸망을 고함으로써 남을 정복하고 남에게 무리한 압박을 가하는 자의 말로를 전 세계 인류에게 명시하여 준 의미 깊은 역사적 진리와 교훈의 날이다. (略) 그러나 (<자유신문> 게재는 여기서부터) 현하 세계 정세의 복잡다단함에 생각을 미치고 과거 1주간 우리 민족의 걸어온 바 건국 1년의 형극의 길을 회고하여 볼 때 이 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감격과 흥분과 열광보다도 냉철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국제적 정세와 민주주의 대세에 순응하여 모든 파벌적 편견 개인적 오류를 하루바삐 청산하고 전 민족 통일에 기초를 둔 자주 독립의 실현을 촉성함에 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각자의 온갖 힘을 경주하자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로이 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에 와서도 자주 독립을 갈구하여 마지않는 민중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혼란과 환멸 속에 방황케 함을 생각할 때에는 내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미력함을 심각히 느끼게 되고 이 날을 맞이하는 기쁨보다 슬픔이 더욱 크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이 의미 깊은 8월 15일을 맞이함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는 비관이나 감상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전 민족의 각자가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선열의 유지를 계속하므로 분골쇄신해야 할 것을 믿고 바라며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 노력한 연합국에 대하여 전 민족적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자유신문> 1946년 8월 15일자)
"자력으로 조국 찾자 - 김구 선생의 유루(流淚) 호소"
나는 27년간 망명객으로서 금일 이 자리를 국내 3천만 동포와 같이 하게 된 것은 실로 감개무량하다. 장시간을 충염정좌(衝炎整坐)한 여러분을 대할 때 심금에 찬 감회는 넘치나 장황한 번설을 피하고 이 자리에서 느낀 바의 일단을 간단히 피력하겠다.
나의 심경은 방금 김구 일신을 세분하여 삼천만 동포의 심중을 심방하여 보았다. 홀방(忽訪)한 김구께 "삼천만은 금일의 집회는 X나무집 연회에 춤추는 격이니 지난 1년이 허무하며 독립은 타력의 의존하여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력으로서 자주성을 갖춘 독립이라야 비로소 민족의 안도와 국가의 영원한 번영을 재래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 사람 역시 동감이다.
부탁하노니 동포여, 미군정에 아유(阿諛)에 신경을 모리를 일삼는다든가 사리와 사욕에 눈이 현혹한다든다 하여 자립과 민족의 복리에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공약된 독립은 안전에서 만리 외 창해 밖으로 달음질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국을 저버리고 조국을 이 강호 외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토 내에 있는 듯하니 이는 모두 우리의 독립을 방해하는 장벽일 것이다.
명분과 의리에 어그러진 바를 청산하고 단결하여 독립 완수에 매진할 것이며 만일 부모 형제일지라도 독립에 방해하는 바 있다면 단연 일보도 불사(不辭)하여 있는 피를 마음껏 쏟아서 독립 전선에 돌진하여야 할 것이며 서슴지 않고 정의의 발검(拔劍)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6일자)
15일자 <자유신문>의 글은 사전에 준비해서 보도 자료로 보낸 것이고 16일자 <동아일보>의 글은 기념식장에서 연설한 내용을 취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앞의 글이 원론적 내용에 점잖은 표현인데 반해 뒤의 글은 내용도 더 구체적인 것이 있고 표현도 발랄하다. "아유에 신경을 모리를 일삼는다든가" 같은 대목에서 문장이 불완전한 것도 연설을 받아썼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연설문이지만 셋째 문단에서 극우와 극좌에 대한 적대감을 구체적으로 밝힌 점이 눈에 띈다. 미군정과의 밀착과 사리사욕 추구는 극우파를 가리킨 것이고 조국을 이 강호 외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은 극좌파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담화문에서는 나타내지 않은 적대감을 연설문에서 드러낸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김구가 이 무렵에 정치적 표현을 극히 절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해방 후 1년간 김구가 담화문이든, 기자 회견이든, 방송 연설이든, 조선인 전체를 상대로 발언한 일을 "자료 대한민국사"에서 뽑은 것을 보자.
1945년 9월 3일 : 김구, 임정의 당면 정책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 발표
1945년 11월 5일 : 임정 주석 김구, 환국에 앞서 담화 발표
1945년 11월 23일 : 김구 기자 회견
1945년 11월 24일 : 김구, 귀국 인사 방송
1945년 11월 26일 : 김구, 기자 회견에서 정세 파악 후 구체적인 정책 수립을 언명
1945년 12월 27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방송
1946년 1월 1일 : 김구, 반탁 운동 방법에 대하여 방송
1946년 1월 4일 : 김구, 통일 정권 수립 문제에 관해 비상정치회의 소집 등 성명 발표
1946년 2월 28일 : 김구, 친일파 대사면 운운은 사실무근이라는 성명서 발표
1946년 7월 4일 : 김구,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 발표
연말연초까지 활발하게 입을 열던 김구가 그 후 입을 닫았다. 2월 28일의 성명서도 임정 선전부를 통해 내놓은 극히 짤막한 것이었다. 연초 이후 반 년간 침묵을 지키던 김구가 처음 입을 뗀 것이 7월 4일의 "동포에게 고함" 성명이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에는 그 전문이 실린 것 같은데, 3분의 1 가량 그 요점만 옮겨놓는다.
"반성하고 단결하자 - 입국 후 김 총리 최초 성명"
(…) 건국 강령의 요소에 있어서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할 것이 이미 국제 공약에서 약속된 것이다. 인류 5천년 역사를 통하여 봉건적 악폐에 시달려 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다시 압박자와 착취자와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경하고 구가할 것이냐?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포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서는 3천만이 단결하여 일로 매진할 뿐이다.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민족 자멸의 근원이 될지니 생각할수록 오중(五中)이 찢어질 듯하다. 중류의 풍파는 오월도 합작하였거늘 하물며 사위에 고립하여 독립을 절규하는 우리로서야 차마 동족분열을 요연 자행할 배랴
(…) 7월 1일 공산당서기국에서 조선인민보를 통하여 '분열 책임자를 추방하라'는 제하에 나를 테러 괴수라 하였으니 나는 이것을 볼 때 과연 국중에 우국의 지사와 혁명의 투사가 얼마나 있는가를 십분 생각하여 보았다. 적이 납항하던 전석까지 적의 진두에 서서 성전이라고 찬양하고 적의 전승을 위하여 충을 맹서하고 청년학도를 일으켜 전지로 내몰고 적의 주구가 되며 적의 기관에 암약하여 적을 위하고 동포를 고압하던 자와 적이 납항하고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적의 통치 기관인 총독부에 출입한 자는 모두 애국자이며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나를 테러의 괴수라 하였으니 이것은 자신이 부정치 않는다. 금월 6일 우리 민족 전체가 경의를 다하여 봉장케 된 3열사에 윤 이 영 의사의 의거에 있어서는 김구가 사주하였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표된 것이다.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서는 이 이상의 방법이라도 취하였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일분이라도 불리한 조건이 된다면 나는 오늘이라도 단에 나리어 동포 앞에 솔직히 사의를 표하려고 한다. 친애하는 동포여! 절역에서 전전할 때에 고국의 산하를 바라보면서 그리운 동포를 연상할 때에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를 뜻하였으랴? 동포여 반성할지어다. 동포여! 단결할지어다.
중간 부분에서 "모두 애국자이며 사상가이며 정치가"라고 한 대목은 비꼰 말인지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로 기사 원문을 확인해 봐도 그대로 나와 있다. 설마 이것도 <동아일보>에서 변조한 내용은 아니겠지?
공산당이 그를 '테러 괴수'로 비판하는 데 대한 항변이다. "그래, 나 테러 괴수 맞아! 난 그걸로 항일 했어. 그게 어때!" 들이받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공산당의 김구 비판은 '테러 괴수'보다 이승만과 함께 '파쇼 영수'로 규정하는 것이 주류였다. 지난 연말의 반탁 운동 시작 이래 김구의 행보는 좌익만이 아니라 중도 입장에서 봐도 파쇼적인 면이 보였을 것 같다.
해방 1주년을 맞아 모처럼 국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7월 4일 "동포에게 고함"에서 말했던 것처럼 좌도 우도 없는 민족 단결을 그는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1년 전과 같은 초연한 위치가 아니었다. 극좌는 그를 적대하고 있었고, 극우에게는 그가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중도파의 그에 대한 신뢰는 줄어들어 있었다. 민족 지도자로서 김구의 위상은 1년 동안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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