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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가 불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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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가 불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프레시안 books] 워렌 버거의 <글리머>

오래 전, 문학평론가 김현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과연 우리가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고는 스스로 대답했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라고.

저널리스트 워렌 버거가 쓴 디자인 인문서 <글리머>(오유경·김소영 옮김, 세미콜론 펴냄)를 읽다 보니,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랐다. 디자인에 관한 책을 소개하면서 엉뚱하게 문학 얘기를 꺼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디자인 역시 비슷한 질문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세계는 과연 살 만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워렌 버거는 디자인에 관한 오랜 비난의 역사를 복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물의 세계를 개선하고 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달려왔지만, 태생적으로 자본과 기업의 생리에 이끌려 다니기 쉬운 것이 디자인이었다. 디자인의 과잉은 성장의 부정적 측면에 많은 부분 연루되어 왔으며, 과다 소비를 부추기면서 세계의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해 왔다는 혐의를 받아 왔다. 저자는 '디자이너가 지옥에 이르는 열두 단계'라는 소 목록을 소개하며, 그 혐의로부터 디자인이 여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아무도 원치 않는 물건의 포장을 더 커 보이게 디자인하기.
- 새로 지은 포도 농장이 유서 깊은 곳인 듯 꾸미기 위해 와인 라벨을 디자인하기.
- 9·11 테러 기념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세계무역센터에서 나온 강철로 메달을 디자인하기. ('디자이너가 지옥에 이르는 열두 단계')


미술가들도 때로는 현실과 괴리된 창작의 산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공허와 싸우게 마련이다. 디자인의 영역에서는 자본의 윤리와 창작의 윤리가 훨씬 더 복잡하고 집요하게 얽혀 있을 터. 그러니 디자이너에게는, 조만간 쓰레기장으로 직행할 산업 폐기물도, 수집가에게 고액으로 팔려가 장식용으로만 사용될 의자도, 심란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때 '스타일'로 최고의 몸값을 구가했던 디자이너 필립 스탁마저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내가 이제껏 디자인한 물건은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도마 위에 올리고 똑같은 비난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일도 역시 부질없는 일이다. <글리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도대체 이 현실 세계와 디자인의 관계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생산적인 담론을 테이블 위에 올리는 것.

디자인, 계획의 예술

▲ <글리머, 디자인이 반짝하는 순간>(워렌 버거 지음, 오유경·김소영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그렇다면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 보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몇 가지 훌륭한 정의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문장들을 적절히 혼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디자인은, 특정 사용자를 염두에 두고, 특정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거나, 인간의 관심과 능력을 향상시키는, 아이디어, 절차, 시스템의 표현이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이 단순히 상품의 외관을 더 예쁘게 만드는 차원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누구나 일상에서 스스로를 디자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옷을 입을까, 지하철을 탈까 아니면 버스를 탈까, 매일 아침 우리는 사소하고 즉각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더 나아가, 집 안의 가구 배치부터 우리가 사는 지역의 사안들까지, 계획과 결단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삶에 산재해 있다.

한마디로 인생 자체가 '계획의 예술'이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디자인은 이미 인간사와 동시대 현실에 깊이 개입해 있는 셈이다. 이 관점은 책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어서, 사소한 단어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잘못 디자인되었던 기획인 이라크 전쟁' 같은 표현을 보라. 요컨대, 인간은 모두가 디자이너라는 것이다.

디자이너처럼 사고하는 법?

사실, <글리머>를 얼핏 보면 디자이너가 읽어야 할 이론 서적 혹은 예비 디자이너를 위한 지침서로 오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일독의 가치가 있으리라.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저자는 디자인의 역할을 근본에서부터 되짚어 본다. 그리고 회심의 질문을 던진다. "유능한 디자이너처럼 사고하는 법은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개인과 사회가 맞닥뜨리는 무수한 문제들을 풀 하나의 방정식으로서 디자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내 삶에는 답이 없어!'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 변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정치가들, 기업가들, 과학자들, 사업가들, 사회운동가들, 아니,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말이다.

이제는 자기 계발서로 오인 받을 차례다. 어쩌면 그게 정확한 분류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저자는 '기존의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의 이동'이라는 표현을 빌려 디자인을 정의한 다음, 이 문장이 지금껏 출간된 모든 자기 계발서의 부제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농담을 덧붙였으니.

그런데 <글리머>는 자기 계발서 치고는 꽤 묵직한 주장을 던지고 있다. 으레 디자인이란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일, 즉 외부에 행하는 기능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글리머>는 디자인이 오히려 '해방되는 일'에 가깝다는 사실, 즉 내면의 성찰과 각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마음의 관성 벗어나기

우리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관습에 길들여진다. 사회는 숟가락질에서부터 성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옳고 좋은 것'에 관한 규칙을 학습시키고, 우리의 뇌 역시 습관적으로 기존의 것을 반복하려 든다. 어느 순간,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가 않다. 삶의 대부분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낡고 익숙한 사고 패턴이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리고 좋은 디자인이란 늘 그 관성을 멈추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 브루스 마우의 <거대한 변화>. ⓒdesignflux.co.kr
<글리머>의 저자는 정체된 현실을 뛰어넘는 무모한 시도와 노력의 중요성에 관하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왜?'라고 끝없이 묻는 아이처럼,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고 상상하면서, 일상의 우연 속에서 해법을 떠올리는 것. 그 시도가 낳은 혁신적인 사례도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품위를 유지하면서 탈 수 있는 휠체어, '아이들에게 노트북 한 대씩'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조그만 녹색 컴퓨터, 달리기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의족, 저가의 디자인으로 자연 재해 지역을 재건하는 건축 그룹 등.

몇 해 전 디자이너 브루스 마우는 이러한 디자인들을 모아 <거대한 변화>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종류를 불문하고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디자인들을 발굴하여 진열한 전시였다. '디자인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철학이 세계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이 메시지는 독일의 개념 미술가 요셉 보이스를 연상케 하는데, 그는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강연, 교육, 정치, 행동,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확장된 예술 개념이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는 예술의 탈신비화로 이어진 것이다.

디자인, 혁신 그리고 희망

▲ 요셉 보이스. ⓒartsandecology.org.uk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브라이언 콜린스에 따르면, 디자인이란 '희망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다. 세상을 바꾼 디자인 제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브루스 마우도, 전 세계에서 참여자를 모집해 오크나무 7000 그루를 심었던 요셉 보이스도, 결국 희망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 현실에 두 발을 온전히 딛고 선 디자인은, 혁신과 동의어면서 동시에 희망과 동의어여야 한다. 그동안 혁신이라는 말은 기업에 의해, 자본주의에 의해, 지나치게 남용되고 오용되어 왔다. 혁신이란, 더 많이 생산해내거나 더 많이 감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글리머>의 저자 역시 오늘날 디자이너는 물건을 만드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경험을 주조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리라.

직업적 디자이너가 아닌 이들에게 '경험의 디자인'이란 한층 넓은 삶의 반경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도시의 도처에 모여든다. 집회가 열리고, 농성장에서 공연을 하고, 낭독회를 연다. 최근 그런 현장을 목격한 이라면 아마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세계를 바꾸기에 앞서 나부터 바꿀 수 있다는, 작지만 단단한 믿음들이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변화를 말이다. 즐겁게 투쟁하는 법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잡년 행진'은 또 어떤가? 지난 7월 잡년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판 슬럿워크(Slutwalk)가 펼쳐진 뒤, 참여자에 대한 비방과 인격 모독, 제목에 대한 비난과 훈수까지, 갖가지 뒷담화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유쾌한 기획이 이루어낸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니고 무엇일까? 왜곡된 성 관념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했지만,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더 큰 권위주의의 면면들, 그 비루한 마음의 관성을 오히려 확인하고 곱씹는 계기가 되었으니.

용역 깡패의 발길질에 부서진 기타로도 즐거운 무대를 만드는 것. 소풍 가듯 연애하듯 타인의 현실에 연대하는 것. 복장의 자유를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호명의 문제, 언어의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것. 진정한 혁신이란 이런 게 아닐까?

디자인이 반짝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브루스 마우는 묻는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하나의 디자인 프로젝트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세계를 통째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질문일 것이다. 물론이다. 모든 것은 디자인될 수 있다. 그러니 바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고, 촉수를 예민하게 벼려야 한다. 삶의 곳곳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가능성의 순간들, 글리머(Glimmer) 모멘트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주의하자.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고 개선시켜야 할 대상으로 삼는 태도 역시, 마음의 관성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때로 그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많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를 하기로 하는 의욕적인 디자이너인 동시에,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사려 깊은 디자이너로서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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