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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설가가 광화문 흙을 씹어 먹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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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설가가 광화문 흙을 씹어 먹은 이유는?

[꽃산행 꽃글·13] 풀, 나무, 흙, 시궁창이 풍기는 냄새

1

"세상에 이름 모를 꽃이 어딨노! 이름을 모르는 것은 본인의 사정일 뿐. 이름 없는 꽃은 없다. 모르면 알고 써야지! 모름지기 시인 작가라면 꽃의 이름을 불러주고 제대로 대접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소설가가 있다.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사하촌' '수라도' 등의 작품을 남긴 요산 김정한(1908~1996년)이다. 흔히들 쉽게 쓴다. 산에 가니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네. 만약 그렇게 쓴 이가 요산을 만났다면 꼼짝없이 그런 불호령을 들어야 한다. 선생이 남긴 것은 소설만이 아니다. 손수 식물을 꼼꼼히 그리고 지역별로 서로 다른 식물의 이름을 채집한 공책도 여러 권 남겼다. 선구적인 식물 관찰 일기이자 도감이 아닐 수 없다.

요산은 1936년 소설 <사하촌>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1940년 일제의 발악이 극도에 달하자 붓을 꺾는다. 그리고 1966년, 쉰여덟의 나이에 이르러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한다. 이때 붓을 다시 드는 소회를 밝힌 글은 지금 읽어도 뭉클하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지겹도록 오래 꾹 참아 왔었지만, 독재 권력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되, 마치 남의 땅 이야기나 옛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따라지들의 억울한 사연들에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창비에서 펴낸 <김정한 소설 선집>을 뒤적거리는 것은 요산의 소설을 다시 읽고 무슨 독후감을 쓰려는 게 아니다. 수록된 열일곱 편의 소설의 한 배경이 되는 식물의 생태계를 조사하기 위함이다. 과연 요산의 소설에는 허투루이 꽃이니, 풀이니, 나무니 하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애매한 형용사를 함부로 얹어놓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구체적인 이름을 가지고 인물들과 섞여 있다. 데뷔작인 <사하촌>에만도 감나무, 뽕나무잎, 두렁콩, 포플라나무, 백양목, 느티나무, 소나무, 박, 치자나무가 나온다. 버섯은 더욱 구체적이다. 송이, 참나무버섯, 소케버섯, 싸리버섯. 그뿐이 아니다. 정자(亭子)나무도 나온다. 그리고 몽둥이도 그냥 몽둥이가 아니라 벚나무 몽둥이로 적시한다.

▲ 고향 마을에 있는 정자나무.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이굴기

2

"쉰여덟에 이르도록 나는 내가 내 나라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 관해서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이지만 나는 실은 기억에만 의존해 왔다. 그런데 기억이란 기껏해야 결점과 왜곡투성이의 밑천일 뿐이다. 나는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르고, 그 산과 물 또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책이나 신문을 통해서 미국의 변화를 알았을 뿐이다.

허나 어디 그뿐이랴. 25년 동안 내 나라를 몸으로 느껴보질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써왔던 셈이다. 이른바 작가라면 이것은 범죄에 해당될 터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눈으로 과연 이 거대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다시 발견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찰리와 함께한 미국 여행>(존 스타인벡 지음. 이정우 옮김. 궁리출판 펴냄))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직접 설계하고 주문 제작한 트럭을 운전하면서 애견 찰리와 함께 미국의 뒷골목 여행을 떠난 소설가가 있다. 트럭의 이름은 로시난테. 돈키호테의 애마에서 따온 것이다. 4개월간 34개주를 누빈 생생한 여행. 그 소설가의 이름은 존 스타인벡(1902~1968년). 여행을 마치고 4년 후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식물은 어떻게 등장할까. 대표작인 <에덴의 동쪽>(정회성 옮김. 민음사 펴냄)과 <분노의 포도>(김승욱 옮김. 민음사 펴냄)를 살펴보기로 했다. 너무 두꺼운 장편 소설이라 전부 조사하기엔 무리였다. 소설의 첫 대목을 펼쳐보았다. 작가는 <에덴의 동쪽>에서 세 번째 문장을 이렇게 적는다.

"나는 어렸을 때 보았던 갖가지 풀들과 신비한 꽃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분노의 포도>에서는 첫머리를 이렇게 연다.

"오클라호마 시골의 붉은 색 땅과 회색 땅에 마지막 비가 부드럽게 내렸다. 이미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빗줄기가 개울을 이루어 흘러갔던 흔적 위로 쟁기들이 오락가락했다. 마지막 비에 옥수수가 쑥쑥 자라고, 길가의 잡초와 풀들이 점점 퍼져 나가 회색과 검붉은 색을 띠고 있던 땅이 초록색에 가려 사라져 버렸다."

그는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냄새에만 신경을 쓰고 이름은 그리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일까. 존 스타인벡이 여섯 살 아래의 요산을 만났다면 쓴 소리 한 마디 들었을 지도 모른다.

▲ 소태나무. 가평의 호명산에서 식물 사진을 찍다가 잎을 따서 씹어 먹어 보았다. 과연 아주 두텁게 쓴맛이었다. 소태같이 쓰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굴기

3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무교동에 있는 어느 다방 이층에서였다. (…) 여하튼 나는 그날 그의 흉악망측한 얼굴과 겁 없이 큰 목소리에 꽤나 놀랐다. 그 후에 그가 그의 아내를 이끌고 캐나다로 이민 갈 때까지 나는 상당히 빈번히 그를 만났다. 그와 나는 지독하게 술을 많이 마셨고, 많이 다퉜다. 그러는 도중에 나는 그가 무주 출신의 순촌놈이고 막둥이이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는 할머니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이가 많으며, 결코 오입을 하지 않으며, 오입하는 친구를 그렇다고 욕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아내는 메디컬센터에서 수간호사로 있었고, 그는 적은 원고료로 남편의 위치를 고수하며, 금호동 구석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인사를 튼 후 2년 만에 캐나다로 떠났다. 그 동안에 나는 그와 한번 술을 크게 마시고, 종로5가에서 반발광을 하였고, 떠나기 전날 그는 광화문 우체국 곁의 흙을 계속 씹어 먹으면서 자기가 버린 조국을 한탄하였다." ('반고비 나그네 길에', <김현 문학 전집>(문학과지성사 펴냄))

여기에서 '나'는 문학평론가 김현, '그'는 소설가 박상륭이다. 박상륭은 "서툰 영어로 캐나다에서 종합병원 시체부 청소부 노릇을 하며, 혼자 술에 취해 호수가에도 가보고, 인적 없는 거리에서 한국말로 크게 소리지르"다가 장편 소설을 완성한다. 박상륭은 이 소설을 김현에게 보내고 김현은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다. 그 소설의 제목은 <죽음의 한 연구>.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두터운 마니아층을 거느린 소설로 자리 잡았다. 박상륭은 그 고된 이민 생활에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소설 쓰기의 끈을 놓치 않았다. 무엇이 그 소설가를 그리 만들었을까. 많은 것을 들 수 있겠지만 이민 전날 광화문에서 씹어 먹었다는 흙, 광화문을 배회하는 쥐들의 냄새도 적잖게 배었을 흙, 그 흙냄새도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 쥐똥나무. 북악산에서 울타리로 서 있는 쥐똥나무. 열매가 쥐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그 이름을 얻었지만 꽃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이굴기

4

"한국어 중에서도 식물 이름은 한국인의 생활에서 가장 오래 되고도 친숙한 어휘 공책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어의 어휘 체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아울러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해명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미 명명된 식물 이름을 통하여 이름이란 게 사물이 지닌 요체와 특징, 명명자나 사용자들의 인지와 생활을 밀접하게 반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인이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어 식물 이름의 연구>(임소영 지음. 한국문화사 발행)이라는 책의 결론을 요약한 것이다. 저자는 식물학자는 아니고 국어 어휘의 역동성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이다. 언어학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나로선 꽤 어려운 책이었다. 위에 적은 것 말고도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 유용한 정보를 더 얻었다.

그 하나는 어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고 살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기초 어휘(basic vocabulary)란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어휘를 뜻하는 개념이다. 한국어의 기초 어휘는 1500개. 이 중 식물과 관련된 어휘는 28항목이라고 했다. "가시, 가지, 결, 곰팡이, 국화, 껍질, 꽃, 나리, 나무, 낙엽, 단풍, 대(竹), 넝쿨, 무궁화, 봉오리, 뿌리, 솔, 싹, 씨, 열매, 이끼, 이삭, 잎, 잔디, 장미, 줄기, 진달래, 풀."

또 하나. 이 책은 부록으로 우리나라 식물명을 모두 수록하고 있었다. 오로지 이름만으로 특이하거나, 엉뚱하거나, 엉큼하거나, 냄새가 지독하거나,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식물을 골라보았다. 앞으로의 꽃산행에서 부디 이 식물들과 모두 만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 언젠가 저 뿌리들과 몸 섞을 때 서로 낯설어 데면데면하지 않기를!

▲ 애기똥풀. 마을 근처나 길가에서 흔히 만나는 풀이다. 줄기를 자르면 노란 액즙이 나온다. 그게 꼭 애기똥 같다. ⓒ이굴기

가마귀똥 갓똥 강나새끼 개구리발톱 개똥나무 개똥낭 개불알꽃 개불알풀 괴좆나무 꾀꽝낭 꾸지뽕나무 네귀쓴풀 노루오줌 누린내풀 다정큼나무 도꾸발떼 도독놈때 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지팡이 독새기풀 똥고리낭 똥낭 뙤짱 뚱딴지 뚱멀구 띨광나무 띨짱구 말똥비름 말오줌나무 말이빨강냉이 말오줌대 매뿔나무 밥도둑놈 밥쉬나무 방가지똥 뱀의혀 뱀혀 뽈똥나무 비듬나무 빨간개구리밥 빠뿌쟁이 삐들나무 새앙나무 소태나무 속썩은풀 송장풀 술패랭이꽃 쉰쪽마늘 수자해좆 쉬땅나무 실망초 쒜비놈 쒜비눔 쓴마물 쓴너삼 쓴풀 씨아똥 앉은뱅이꽃 애기가래 애기닭의밑씻개 애기똥풀 여우오줌 요강나물 이앓이풀 좀쥐오줌 중대가리풀 쥐꼬리망초 쥐꼬리풀 쥐똥나무 쥐오줌풀 지빵나무 진퍼리노루오줌 코따지 큰도둑놈의갈고리 큰땅빈대 큰가래 큰개불알꽃 털개불알꽃 포리똥나무 헐떡이풀 호라지좆 흰수염며느리밥풀 흰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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