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어 내 위로 누군가가 엎어지고, 내 옆에도 누군가가 넘어지고 말았다. 무르팍이 쓰라린 것은 둘째 치고, 섬뜩한 공포가 밀려왔다. 머릿속에 하얘졌다. 다행히 경찰이 더 이상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던 모양, 내 위로 더 이상 쓰러지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옆을 보니 내 옆에서 넘어진 분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 펴냄)의 작가 김중미였다.
함께 골목길을 달리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가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큰일 났어요. 우리 (기찻길옆 공부방) 아이들 다 데려왔는데, 어떻게 찾지?" 반갑습니다, 선생님 작품 잘 읽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 애들도 선생님 책 좋아해요, 거긴 어때요, 이런 덕담 나눌 여유도 없이 우리는 헤어졌다. 1분도 되지 않을 만남이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 것이다. 한참을 후퇴하여 다시 도로에 주저앉았을 때, 끄트머리에 한 무리의 꼬마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아이들을 다독거리고 있는 김중미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비를 쫄딱 맞았지만, 한 무리로 소담스레 둘러앉아 뭔지 모를 먹을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깊은 밤, 아스팔트 위의 아이들은 참 아름다웠다. 진짜 작가, 김중미를 그렇게 거리에서 만났다.
'희망 버스'는 확실히 중독성이 있다. 거기 한 번 다녀오면 다음날 운신을 못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버리지만, 다시 3차, 4차를 기다리게 된다. 그래도 거기 가면 사람 사는 것 같고, 거기 모여 있는 낯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그래도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김진숙의 연설이, 그리고 희망 버스를 다녀온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확실히 다르다.
뭐랄까, 이 시대의 중요한 어떤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희망 버스를 기획하고 이끄는 시인 송경동도, 거기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밤을 새는 김중미도, 부산역 앞 문화제에서 쩌렁쩌렁한 시를 낭송하던 시인 심보선, 김선우 들도 아름답다. 휴대전화를 타고 오는 김진숙의 우렁찬 연설과 그의 목소리에 눈물짓는 참가자들도, 밤새 먹을거리를 나누고, 도로 위에서 보도블록에서 고단한 한뎃잠을 자는 이 모든 풍경들도 대단히 시적이고, 그래서 문학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희망 버스를 통해 문학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카나파니와 김연수, 문학이란 무엇인가
희망 버스를 다녀온 뒤에도 김진숙의 트위터에 접속해서 그의 안위를 챙기게 된다. 폭염이 내리쬐노라면 뜨거운 크레인 위를 거닐고 있을 김진숙과 크레인 쇳덩어리를 지나 김진숙의 살갗을 스쳐갈 뜨거운 바람을 생각한다. 달아오른 쇳덩이, 훅훅 스쳐가는 질식할 것 같은 바람, 이 숨 막히는 연상들 속에서 나는 오래전 읽은 한 작품을 떠올린다.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윤희환 옮김, 열림원 펴냄). 그 자신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한 주역이었으며, 서른일곱 나이에 의문의 폭탄 테러로 세상을 떠난 청년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있을 무렵, '프레시안 books'에서 작가 김연수의 북 콘서트 기사를 보았다. (☞관련 기사 : 40대 '청춘' 고백 "마리화나도 없고, 그래서 잡은 건…")
그 기사는 이 작품에 기묘하게 포개졌다. 마리화나 때문이다. 쇳덩이와 마리화나, 두 상징 속에 얹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문학이란 "나는 너다"라고, 대학 시절 읽었던 황지우는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김진숙을 생각하는 지금 나는 카나파니의 작품에 기대어 '문학이란 쇳덩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연수는 '문학이란 마리화나다' 하고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다.
팔레스타인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농부, 아부 카이스
▲ <뜨거운 태양 아래서>(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열림원 펴냄). ⓒ열림원 |
아부 카이스, 10년 전까지 팔레스타인의 농부였던 초로의 늙은이다. 매년 봄마다 그와 가족들에게 "돈과 올리브를 주었던" 열 그루의 올리브 나무는 없다. 그의 고향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지난 10년간 그는 난민촌에서 빵 한 조각 얻기 위해 관리들의 모욕을 견디며 기다랗게 줄을 서야 하는, "남루한 헛간에 웅크린 늙은 개"처럼 살았다.
쿠웨이트에서 택시 운전으로 돈을 번 친구가 난민촌에 있는 그를 찾아와 쿠웨이트 밀입국을 권한다.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 올리브 묘목 몇 그루를 사는 것,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이라크까지 왔지만, 거기서 밀입국 업자인 뚱보에게 비참한 꼴을 당한다. 돈을 좀 깎아달라는 그에게 뚱보가 하는 소리란 "싫으면 조용히 꺼져 달라"는 것이다.
"머리통 전체가 내부에서 솟구친 눈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낀 그는 뒤돌아서서 거리로 나온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수천 마일 떨어진 그의 고향까지 흐르는 샤트 강가로 간다. 그는 대지 위에 철퍼덕 눕는다. 코로 스며든 흙냄새가 강물처럼 그의 혈관으로 쏟아 부어진다. 이 소설은 아부 카이스의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시작된다.
아부 카이스가 축축한 땅 위에 몸을 눕히자, 대지의 지쳐빠진 심장 박동이 모래 알갱이들을 지나 그의 몸 구석구석에 전달되었다. 몸을 눕혀 가슴을 땅에 댈 때마다 그는 대지의 박동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대지의 심장이, 그가 그곳에 몸을 눕힌 첫 순간부터,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빛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가 흙에서 맡은 냄새는 찬물로 목욕한 뒤 축축하게 젖은 아내의 머리칼 냄새이기도, 작은 새 한 마리의 심장의 떨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냄새가 표상하는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시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는 쿠웨이트로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뚱보 따위 인간 말종의 모욕을 일상적으로 견뎌야 한다.
열여섯 소년 아사드와 마완
아사드라는 열여섯 소년이 있다. 그는 삼촌이 너무나 싫다. 자기 딸인, 사촌과 결혼하라고 닦달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이 사촌과 같은 날 태어났고, 그날 아버지와 삼촌이 함께 코란 첫 장을 낭송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삼촌은 "밭에 뿌릴 퇴비 한 자루를 사듯" 그를 구매하려 한다.
답답한 그는 돈을 벌어오겠노라며 삼촌에게 돈을 요구했고, 그 돈으로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오다가 밀입국 업자에게 벌써 한 번 사기를 당했다. 사막에서 죽기 직전에 겨우 외국인 여행객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이제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쿠웨이트로 가기 위해 밀입국 업자 뚱보를 찾아온 것이다.
마완도 열여섯 살이다. 순박하고 맑은 소년이다. 그는 밀입국 업자에게 주어야 할 주선료가 5디나르라는 말만 믿고 고작 7디나르인 전 재산을 만지작거리며 뚱보에게 왔다. 그러나 15디나르를 내라는 뚱보의 빈정거림에 참지 못하고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내지른다. 뚱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경찰에 나를 고발하고 싶다고? 이 개새끼가……." 육중한 손이 마완의 뺨을 후려갈겼다. 마완은 잠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잠시 서 있는 동안, 마완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사실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뺨을 얻어맞고도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느끼는 이 마음의 움직임은 무엇 때문일까. 아랍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일까. 마완이 너무나 순박한 소년이어서일까. 그런데 마완은 이상스런 안도감과 마음의 휴식을 느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을 겪기 바로 전, 그날 아침 그는 아침의 신선함에 겨워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이미' 부쳤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그마저도 이런 일을 겪고 나선 결행하지 못했을 것이었으므로. 어머니가 안심할 것을 생각하며 그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완은 편지에서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비열한 짐승"이라고 써 놓고도 고치지 못한다. X자로 지워진 단어에서 편지를 받아 읽는 어머니가 불길함을 읽어낼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완의 처지는 정말 딱하다. 마완의 식구들은 쿠웨이트에 돈을 벌러 간 마완의 형이 송금해 준 돈으로 근근이 살아왔는데, 그가 결혼하고 나서부터 송금이 뚝 끊어졌다. 자식 부양에 지친 아버지는 구호금으로 지어진 집 한 채를 내세워 폭격에 다리를 잃은 자신의 딸을 짝 지워 주려는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버린다.
마완의 가족은 두 명의 가장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았다. 이제 가족을 위해 열여섯 살의 마완이 쿠웨이트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것이다. 고작 7디나르를 들고서.
밀입국 도전, 물탱크의 쇳덩이
이제 이들은 뚱보를 통해서는 쿠웨이트 밀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뚱보의 사무실 근처를 배회하면서 이들 셋을 눈여겨보고 있던 팔레스타인 출신의 쿠웨이트 용병인 아불 카이주란이 나선다. 그도 한때 뛰어난 운전 실력을 자랑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전사였다. 그러나 작전 중에 의문의 폭발이 있었고 이스라엘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잔인한 인간들은 아불 카이주란을 매달아 놓고 그의 남성을 거세시켜 버렸다. 힘겹게 탈출했지만, 이 일로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생의 의지란, 오직 '돈'이다.
지난 10년간 한순간도 그 고통을 되새겨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상황을 수용해 보려고 지난 10년 동안 노력해 보지 않았던가? 칼자루 아래에 누워 "남성을 잃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다"는 저들의 설득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악한 자식들! (…) 애국심이 무슨 소용이더냐? 국가를 위한 모험에 몸을 던졌는데, 넌 이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게 되었다! 네가 잘한 일은 무엇인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많은 돈뿐이다.
그는 운전 실력을 밑천삼아 부패한 쿠웨이트 장군인 하즈 리다의 운전병으로 일한다. 그는 장군의 밀수를 눈감는 대신 자신은 트럭 뒤에 실려 있는 물탱크에 사람을 실어 쿠웨이트로 밀입국시켜주면서 돈을 번다. 이제 이 세 사람이 지옥 같은 열기가 뿜어대는 한낮, 아불 카이주란의 트럭을 타고 국경을 건넌다.
국경경비대가 지키는 관문을 통과하는 6~7분 동안은 지옥 같은 열기가 작렬하는 물탱크의 쇳덩어리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첫 번째 관문은 힘겹게 통과했다. 그런데, 두 번째 마지막 관문에서 일이 벌어진다. 이 대목에서는 읽는 이도 쇳덩어리가 내뿜는 불기운으로 숨이 턱턱 막혀온다.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그런데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서둘러 통행증 서류에 사인을 받아서 트럭을 몰고 관문을 떠나야 하는 아불 카이주란을 같지도 않은 음담패설로 묶어둔다. 시간이 흐른다. 음탕한 상상에 푹 젖은 관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예정되었던 7분에서 무려 14분이 더 지나버렸다. 물탱크 속 세 사람은 어찌되었을까.
겨우 관문을 통과해서 미친 듯 트럭을 몰아 인적 없는 곳에서 물탱크 뚜껑을 여는 아불 카이주란. 세 사람은 이미 죽어 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두 손으로 물탱크 입구를 단단히 부여잡고, 억센 팔뚝에 온몸을 지탱하면서, 그는 물탱크 안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 아불 카이주란은 몸을 굽혀 축축한 잿빛의 털에 귀를 갖다 댔다. 몸은 차갑고 고요했다. 그는 손을 뻗어 물탱크의 뒤쪽으로 더듬어 나갔다. 또 다른 몸 하나가 여전히 금속 지지대를 붙잡고 있었다. 머리 부분을 만져보려 했지만, 축축한 어깨만 손에 잡혔다. 조금 뒤 그는 가슴팍에 대고 있는 머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을 만져 보았더니, 쩍 벌어진 입 속으로 손이 들어갔다.
아불 카이주란에게 남은 임무는 시신을 처분하는 일이다. 매장해 줄 시간은 없다. 그는 한밤중에 쓰레기 처리장에 시신을 버린다. 다음날 아침 발견된 시신을 누군가가 매장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임무를 완수한 그에게 잡아채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리고는 되돌아가서 시신의 호주머니 속에 든 돈을 꺼낸다. 자신이 받기로 되어 있었던 밀입국 알선료이다.
이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한때, 팔레스타인 게릴라 전사였던, 그래도 마완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다른 두 사람과 달리 5디나르만 받기로 약속하기도 했던, 그의 마음속에 죄책감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가련한 사람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때서야 그는 절규한다.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측면을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
왜? 왜? 왜? 하는 울음이 메아리처럼 웅웅 대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문학이란 뭐지?
이런 소설을 왜 읽어야 하나, 싶다. 마음이 아프다. 여기에 무슨 '마리화나'가 있나, '청춘'이 있나, 말랑말랑한 게 있나, 나긋나긋한 게 있나, 핥아주고 어루만져주는 능숙한 손길이 있나. 현대 세계 변방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한 비극이 시커먼 짐승처럼 엎드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고통스런 책읽기의 끝머리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실은, 제 볼 일 다 보고나서는 "왜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냐"고 울부짖는, 사기꾼, 도둑놈, 거세당한 아불 카이주란이 바로 내 자신이라고. 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이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그때서야 나는 쇳덩어리를 스쳐 훅훅 불어가는 불바람 속에 서 있는 김진숙과 연대해야 할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그래, 우리는 모두 아불 카이주란이다.
작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펴냄)에서 자신은 젊은 시절 "마리화나라도 있었으면 그걸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손닿는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낡은 286컴퓨터뿐이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문학은 마리화나의 대용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작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고향 김천에는 "그가 등단시켜주었다는" 또 하나의 성공한 시인 문태준의 고향집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있지만, 아직 그의 고향집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이제 그의 생가에도 표지판이 설 수 있도록 용맹정진하는 일일 것이리라.
서른이 넘어 <청춘의 문장들>을 쓰면서, 청춘의 시절을 회상하는 작가 김연수, 내가 보기엔 아직도 그는 마리화나가 필요한 청춘인 것 같다. 돌이켜보니, 김연수는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이라는 처절한 역사를 다룬 <밤은 노래한다>를 니체의 아포리즘으로써 마리화나 같은 밤의 연기로 아름답게 날려주었다.
김연수에게 문학이란 무엇일까? 뜨거운 태양 아래, 쇳덩이는 아직도 훅훅 뜨거운 바람을 날리고 있는데…. 고통은 아직까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하고 있는가. 김진숙은 왜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사족
김연수 선생께. 야유하려는 게 아닙니다.
<녹색평론> 116호에 실린 '마리 명옥 리'라는 한국계 미국 작가의 글(나는 왜 9살짜리에게 대마초를 주는가)을 보니, 마리화나는 청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너무나 소중한, 극심한 통증을 다스려주는 효과 만점의 의약품이더군요. 후배 문학청년을 위해, 그리고 정체불명의 통증으로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같이 한번 싸워보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문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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