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실업의 절망 속에서 스펙(specification) 쌓기라는 레고 게임에 몰두한 채 허우적대고 있으며, 30대는 고용 불안에 떨며 가치 절하된 자신의 노동력을 바겐세일하고 있으며, 40대는 명예 퇴직과 희망 퇴직이라는 퇴출 통지를 기다리며 노후에 대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것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습도 처참하기 짝이 없다. 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 2만 달러 시대를 희망과 기대로 맞이했어야 할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토록 을씨년스러운 것은 바로 경제 위기로 인한 노동 시장의 구조 변화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6월 현재 전체 실업률 3.3퍼센트, 청년 실업률 7.6퍼센트, 전체 고용률 64.8퍼센트로 선진국에 비해 훨씬 양호한 공식 노동 시장 지표를 보여주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이 비참한 까닭은 무엇일까? 과연 청년들에게 중소기업 일자리는 많은 데 게으르고 눈만 높아서 백수로 지내는 한심한 세대라는 비난은 정당한 것인가? 성장의 역사를 이끌어온 60대 이상의 빈곤 실업률이 높은 까닭은 그들이 젊어서 열심히 일을 안했기 때문에 쌓아놓은 경제적 부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노동 시장과 관련된 상식적 질문에 이러저러한 수많은 전문가의 말의 성찬이 오갔지만, 그 어느 누구도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구조와 체계의 속성을, 그리고 변화의 과정과 결과를 차분히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한 바 없다. 정치가와 관료들은 세금을 걷고 돈을 받아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고용 지표를 화사하게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고, 경제학자와 경영학자는 기업 활동의 관점에서 노동력의 저렴한 이용에만 관심이 있었다.
일하는 자의 노동력을 파는 자의 관점에서 왜 내가 취업하지 못하는가, 왜 내가 비정규직이 되어야만 하는가, 왜 내가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하는가, 왜 내가 지금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가에 대해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문제를 고용 체제적 관점에서 경제 위기 이후의 변화를 통해 진단하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 <경제 위기와 고용 체제 : 한국과 일본의 비교>(정이환 지음, 한울 펴냄). ⓒ한울 |
한국은 1990년대까지 기업 내부 노동 시장과 노동의 분절성이라는 일본과 유사한 노동 시장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8년 경제 위기를 거친 이후 우리나라의 노동 시장은 일본과 비교해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정이환의 물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 물음에 답하고자 고용 체제적 관점에서 기업 지배 구조, 임금 체계, 임금 교섭, 비정규 노동 등의 하위 영역에서 일본 고용 체제의 변화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변화상의 특징을 찾아간다.
노동 시장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 시장의 수량적 지표를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경제학적 접근이 아니라 노동 시장의 구조와 노동 시장 내에서 상호 관계적 행위로서의 노사 관계를 같이 결합시키는 사회학적 관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노동 시장 분석이 노동 시장 자료에 대한 정태적 모형 분석에 그치는 주체 없는 구조의 분석이었다면, 이 책은 노동 시장이 갖는 정치경제학적 성격을 고용 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명확히 제시하면서, 노동 시장의 변화를 가져온 주체의 행위인 노사 관계, 특히 노동조합의 전략과 임금 교섭의 결과에 주목한다.
경제 위기와 고용 체제의 변화를 분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측면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은 노동 시장의 핵심적 문제인 비정규직의 문제가 대두되는 중요한 시작점이 바로 외환 위기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경영계와 노동계의 전략적 타협이자 거래였던 노동 기본권의 확장과 정리 해고제의 수용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노사정위원회라는 사회적 틀 내에서 노동 기본권의 확장과 정리 해고제의 주고받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형태의 비정규직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경영계와 노동계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주체의 행위가 이후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 위기 이후 고용 체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 행위 주체의 사회적 관계 맺기의 결과적 측면을 같이 분석하지 않고는 당연히 올바른 분석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책의 핵심적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경제 위기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기업 내 고용 안정의 추이가 상당히 다르다고 할 때 '왜 다른가?'" 그렇다면 이 책이 제시하는 경제 위기 이후 우리나라 고용 체제의 구체적인 변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정이환은 나름의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첫째, 기업 지배 구조의 측면에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기업 지배 구조가 영미식으로 변화되었다고 보기 힘들며, 일본보다 더 주주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있다.
둘째, 임금 체계의 측면에 있어서,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분절성이 강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즉 연공적 임금 체계가 유지되는 영역과 서구식 성과주의 연봉제의 영역이 이질적 영역으로 공존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이질성과 분절성의 이유로 노사의 전략적 측면을 강조한다. 즉, 임금 교섭에 있어서 임금 조율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를 들고 있다.
셋째, 비정규직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특징을 비자발적이고 고용의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임시 노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하나,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일본은 비정규직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보지 않음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비정규직을 비정상적 노동 형태로 보는 인식이 높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경우 자발적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비자발적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실태하고도 일치한다.
이러한 경제 위기 고용 체제의 변화 분석을 토대로 정이환이 내놓는 향후 우리나라 고용체제의 전망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밝지 못하다. 그는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분절성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부분적으로 일부 산업과 일부 직종에서 소수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비정규직 내부의 이절성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실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은행의 무기 직군화 이후 부분적으로 중규직이라는 무기 계약직이 비정규직의 또 다른 하위 범주로 정착되었으며, 기업 규모 별 비정규직의 임금 및 근로 조건의 차이 역시 확대되고 있다. 또 경제 위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성과주의 연봉제의 확산은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공급을 대신하는 직능급 또는 직무급에 기초한 성과 연봉제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임금 체계의 변화는 기업 내부 노동 시장을 강화시켜온 연공급을 약화시키고 기존 내부 노동 시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고용 체제는 일본과 유사한 고용 체제에서 경제 위기 이후 일본과 다른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그 방향이 급격한 영미형 시장주의 모델에 치우쳐 있었으며, 국가와 경영계는 여전히 이러한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노동계의 저항이 이러한 방향의 전면화를 부분적으로 막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 역시 정이환이 전망하듯 향후 노동 시장의 분절화가 심화된다면 지속되기 힘들 수도 있다.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 운동이 사실상 비정규직 조직화에 등을 돌리고 있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쉽게도 이 책은 주체의 전략과 향후 방향에 직접적인 제안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학술 저서의 성격상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책이 정책 보고서나 운동 지침서가 아닌 이상 그러한 내용을 요구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 책이 제시하는 경제 위기 우리나라 고용 체제의 냉철한 분석으로부터 더 인간적이고 평등한 노동 시장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진력하는 것은 정책 담당자 내지는 노동조합 운동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저렇게 논문 몇 개를 얼기설기 엮어 저서라고 내던져진 수많은 책 속에서 명확한 문제의식과 오랜 작업의 과정을 거친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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