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휴대 전화에 문자가 뜬다. 문화부에서 출판을 맡고 있는 신문사 후배가 보낸 것이다. 퇴직한 선배를 챙겨준다고 매주 글을 부탁해 온다. 그런데 <십자군 이야기>? 아, 시오노 나나미의 신작? 국내 출판사를 옮긴데다 선인세가 높다고 해서 출판가에 작은 화제가 됐던 그 책. 얼마 전에 각 신문에 나란히 서평이 실렸던 책.
십자군 전쟁은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알고 싶던 테마였다.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것과 달리 추악한 면이 있는 걸 알고는 이런저런 책에서 토막난 이미지를 갖던 터였다. 지은이도 신뢰가 가기에 서평을 보고는 읽어야지 하고 벼르던 참인데 잘 됐다. 책이나 원고의 분량도 그리 부담되지 않으니 얼른 오케이 답장을 보낸다.
한데 왠지 몸이 오글거린다. '서평'이란 말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고를 청탁하는 쪽에선 뭐라 부르든 서평을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서평이라기엔 한참 모자라니 책 소개 글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당연히 도서평론가니 출판평론가란 타이틀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 <십자군 이야기 1>(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나대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겸손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내가 이런 방어적인 생각을 갖게 된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책이 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2001년 펴낸 <신문의 북 리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책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신문의 출판 면을 비평하는 글을 모은 것인데 이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좀 길게 인용해 본다.
"서평은 '도서 평론'의 약칭으로, 도서에 관련된 내용과 형식을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더 높은 수준의 도서를 이용자에게 제시하려는 방법과 문체를 말한다. 즉, 서평은 도서의 저술 동기와 목적, 성격, 이론적 배경, 발견된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 내용의 범위, 결론, 제언 응용 등을 간결하게 기술하여 독자가 필요로 하는 도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서평은 독자들에게 신간 도서나 참고 도서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소개하고 특정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는 각 분야의 새로운 연구 성과에 대한 정보와, 그 정보의 논리적 접근을 용이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2차 자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서평은 책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굳이 이 책을 들먹이지 않아도 평론은, 시답잖은 정치 평론을 제외하면, 대상을 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들춰내고, 가치를 재어 수용자의 이해와 감상을 돕는 일종의 창작이다. 그러니 서평을 제대로 하려면 지은이의 전작(前作)을 모두 읽거나 저술 혹은 연구 방향을 잘 아는 것은 물론 책이 다룬 분야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서평 대상이 된 책의 특장과 핵심 포인트, 미덕과 한계를 보여주면서 저자의 특성, 더 알고 싶거나 비교해 볼만한 책을 귀띔해주는 것이 좋은 서평이라 하겠다.
문제는 이런 서평을 쓰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책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온갖 분야의 책이 나온다. 그런 만큼 도서평론가든 교수이든, 직업적 책 비평가는 상상하기 힘들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이 관심 있는 책 또는 저자의 글을 재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도서평론가' 또는 '서평전문가'란 타이틀을 지닌 이들로선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400쪽 짜리 책을 이틀 안에 읽고 1000자 정도의 글로 소개하는 경우에 이르면 교과서적인 도서 평론은 그야말로 천연기념물 정도의 희귀품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를 포함해 책 소개 글을 쓰는 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서평에도 다양한 종류, 등급이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서평(Descriptive Book Review)'이란 게 있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비평적 서평'과 달리 대중매체에서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평가보다는 요약, 소개에 비중을 둔 형태이다. 그리고 실제 대중매체에 실리는 대부분의 서평은 글쓴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여기 속한다.
이런 현실에서 좋은 '서평'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함이라고 믿는다. 다르게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서평의 목적은 책의 평가가 아니라 독자의 선택과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여겨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독자나 나아가서 저자의 머리위에서 폼 잡는 서평을 쓸 사람은 많지 않고 여러 분야의 책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공연히 서평이랍시고 책에 대해 찧고 까부는 서평은 마땅치 않다. 서평자는 지식을 과시하는 대신 파일럿이 되어야 한다. 물길 안내인처럼 책에서 가치 있는 대목은 무엇이고, 어떤 의견은 무슨 책과 더불어 읽어보는 것이 좋다는 둥 책 읽기에 대한 안내에 치중하는 편이 낫다.
다음은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 어차피 '서평'은 책에 비해 분량이 턱없이 적다. 기계적으로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핵심을 골라내 소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서평'을 읽고 무언가 하나라도 얻게 해주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든, 학설이든, 일화든 심지어 조크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 물론 중립이니 객관성이니 하는 말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래야 한다. 이는 저자나 출판사를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서평을 읽고 해당 책을 읽으라는 뜻을 담는 게 아니라 해당 책을 읽는다면 이런저런 점을 눈여겨보라는 조언을 하겠다는 자세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거의 모든 평론에 쏟아지는 '주례사 비평'이란 비난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 다시 <십자군 이야기>(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문학동네 펴냄)로 돌아가자. 가장 이상적인 서평자는 누굴까. 우선 서양사, 바람직하기는 중세 유럽사나 중동사를 전공한 이가 좋겠다. 그래야 십자군 전쟁에 대한 학문적 성과와 연계지어 이 책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싶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을 많이 읽어 그의 성향과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주눅이 든다. 이 조건에 제대로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다. 그렇지만 마음을 추스른다. 종합지의 일반 독자를 위한 글이다. 분량도 1000자에 불과하다. 이 정도 마당이면 지식의 다과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라 자위한다.
키보드 앞에서 잠깐 고민한다. 뭘 담을까. 작품의 의의? 십자군 전쟁이 황권과 교권이 대립한 가운데 정치적 책략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이 교과서와 달리 성전(聖戰)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식자들에겐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인데…. 한계는? 기억을 되살리느라 장서 목록을 뒤진다. 6000여 권의 '볼 만한(내 기준으로)' 책을 지은이, 분야, 한 줄 요약 등을 엑셀로 정리한 것이다. 아, 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이른바 성도(聖徒)들의 만행에 놀랐던 책이다. 함께 읽으라고 이걸 알려줘야지.
저자 소개, 이건 필요 없다. 전작 '로마인 이야기'가 밀리언셀러고, 지은이도 몇 차례 방한하면서 다양한 인터뷰가 실린 바 있다. 한 줄로 그치자. 그런데 주경철이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산처럼 펴냄)에서 시오노의 시각에 대해 비판한 글이 있었는데…. 상당히 공감이 가는 지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이걸 언급할까.
잠시 고민하다 접는다. 균형 잡힌 읽기를 위해서는 필요하겠지만 서평 분량도 적은데 굳이 넣을 필요는 없겠다. '주례사 비평'이란 비난이 있는 것은 알지만 굳이 단점을 시시콜콜 들춰 식견을 과시할 게 아니라 수많은 책 중에 다른 좋은 책을 골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출판사가 아니라 독자를 위해 쓴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되지 싶다. 결국 한계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뭘 앞세울까? 종교를 빙자한 세력 다툼, 그 와중에 나타난 인간 욕망의 파노라마, 이를 압축해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전쟁을 제창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부응해 나온 말이다. 이게 좋겠다. 이걸 던져놓고 '그것'의 검은 속셈을 뒤져내면 책의 의의는 충분히 전하겠다.
얼개가 섰다. 토닥토닥.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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