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대단한 지성이었던지 지금도 그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어 그의 이력을 알려준다. 당대의 국사(國師), '나라 스승'이었다니 알 만하다. 헌데 제자들이 모아서 써놓은 스승의 대표적 저술 속에 <삼국유사>라는 책명이 없다. 비석에는 아카데믹한 불교 관련 저술들만 나열되어 있을 뿐, 오늘날 그의 대명사인 <삼국유사>가 없는 것이다.
이건 <삼국유사>라는 책이 일연 스님이 쉬는 여가에 써서 남긴, 말하자면 '심심풀이 땅콩'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대의 시각에는 <삼국유사>가 그의 주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책이 저자의 '운명'일 수 있다는 사실(史實)을 배운다. 글쓴이 제 스스로는 심혈을 기울였다고 해도 그게 심드렁하니 사라질 수 있는가 하면, 심심파적으로 이글저글 엮은 책이 저자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에 글을 쓴 작가들은 많았으나, 생전에 책을 만든 저자가 그렇게 적었던 까닭도.
책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책이란 단순히 먹물로 찍고 실로 묶은 기계적 생산물일 수가 없다. 책은 세월을 염두에 두고 제 삶을 증명하려는 한 인간의 인생 승부다.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터인데, 하물며 책을 쓰려는 일이랴. 저자란 제 책의 독자가 제 자식, 아니 낯모를 자손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짓고 책을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제 책의 군데군데에 "200년 후의 독자는 내 뜻을 알리라" 하고 명토 박아 두었던 그 뜻을 저자들은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게다가 일연과 <삼국유사>의 관계처럼 세월의 얄궂은 장난조차 끼어드는 것이라면, 책을 짓는다는 일은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드는 그런 작업이 된다.
평(評)이란 말(言)과 균형(平)이 합쳐서 이뤄진 글자다.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 '평'이라는 글자 속에 들어있다. ('평'의 반대말은 피(詖)다. 편파적이라는 뜻이다.) 그러하다면 서'평'이란 아무렇게나 쓸 수가 없는 일이다. 책을 쓴 저자 제 스스로 평생을 두고 남길, 아니 역대를 두고 남을 책이라 여겨 썼을 것이니, 그런 책을 두고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가 있을까! 또 독자들은 서평을 읽고서 그 책의 속내를 짐작할 터이니, 또 어찌 함부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사태가 이러하다면 이른바 '주례사 서평'은 죄악이다. 저자에게 해를 끼치고 독자에게 죄를 짓는 짓이다. 텍스트에 대한 깊숙한 이해와 엄정한 객관성 그리고 독자를 위한 소상한 정보의 제공이 갖춰질 때 서평이 된다. 저서에 아부하는 종속물도 아니요,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적인 언사를 남발하는 것도 아닌, 한 자락 드리워진 객관의 엄정한 길을 걷는 작업이 서평이다. 유교의 책 <중용>에서 "하얗게 선 작두날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있으려니와, 중용은 사람으로서 능숙하기 어렵노라"(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라고 하더니, 막상 서평이 그러하다.
나는 여태 동서양 고전 또는 그 고전에 대한 해설서들을 주로 비평해 왔다. 우선 서평을 부탁받으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고전에 대한 주석서, 해설서, 혹은 번역서를 저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동안 기울였을 노고에 옷깃을 여민다. 이 시대가 고전 해설서에 그다지 높은 값을 쳐주지 않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옛말에 구증구포(九蒸九暴)라, 좋은 약재는 '아홉 번 찌고, 또 아홉 번 말린다'고 하였으니, 고전에 대한 저술이나 번역도 그만큼 오랜 공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가령 <논어>에 대한 해설서를 쓰자고 하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선 <논어>를 읽어내기 위해선 고문(한문)에 밝아야 한다. 또 그 뜻을 오늘날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선 우리말글에 대한 구사력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텍스트의 주인공인 공자에 대한 이해와 춘추 시대 사상계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을 해설할 수 있는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까지 갖추어야 한다. (자기 관점, 새로운 견해가 없는 책은 책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서평은 '삼증삼포'라고나 할까, 적어도 세 번은 읽고서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저자와 독자에 대한 예의이리라. 서평을 위해서는 주어진 텍스트를 세 번은 읽고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내심 내가 견지해온 원칙이다.
처음에는 저자의 뜻을 긍정하면서 읽는다. 서문, 또는 책갈피에 보면 저자가 책을 만들 때 임한 의도가 실리어있다. 그 뜻을 염두에 두면서 문장을 따라서 읽으려 노력한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가 않다. 군데군데 '아니다' 싶은 부분이 끊임없이 돌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뜻을 염두에 두면서, 긍정적으로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그 책의 핵심 구절 또는 키워드가 발견되기도 한다. 빨간색 펜으로 밑줄을 긋고, 그 페이지에 스티커를 붙여준다. 이런 경우는 행운이다. 서평을 쓰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런 핵심 문장은 꼭 새겨두어서 독자들의 지남이 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도 발견된다. 옛날에는 일본판 번역본을 중역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우리말 구사력이 떨어지는 저자들을 종종 본다. 영어식 언어 구조에 익숙하다보니까, 우리말로는 생경한 문장이 종종 나타난다. 그 정도가 지나칠 때는 서평 자체가 불가능하다.
▲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정정훈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철저히 인간사의 영역이고 인간의 의지를 실현해 가는 활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정치는 일차적으로 운(fortuna)의 규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밑줄은 인용자, 100쪽)
'정치가 인간사의 영역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라고 요약되는 문장이 '철저히', '결코', '모든'과 같은 단정적인 부사들로 인해 도리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앞뒤로 살펴보니 이런 식의 문장이 많았다. 이점들은 메모해두었다가, 서평을 쓸 때 지적했다. 저자가 다음 책에서 교정해주기를 바라는 충심에서였다.
세 번째는, 앞서 읽었던 것들을 종합하면서 또 서평을 집필할 것을 염두에 두고서 다시 읽는다. 이쯤에서 그 책의 서문에서 밝힌 저자의 집필 의도와 본문 속에 서술된 내용들을 대조해본다. 의도와 내용이 어긋날 때는 책의 질이 뚝 떨어진다. 출판사가 내용을 부풀린 경우도 있다.
막상 서평을 쓰면서는 이 책을 처음 대할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 책과 관련된 최신 학계의 동향이나 저자의 인적 사항도 헤아려본다. 가령 저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학교에서 무슨 전공을 한 사람인지, 또 나이도 살펴본다. 저자의 이력은 글의 속살과 방향을 아는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다. 요즘은 이런 인적 사항이 독자의 선입견을 오도한다고 여겨서인지 소략한 경우가 많은데, 서평을 쓸 때는 가외의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다.
서평을 쓰다보면 '글의 세계'와 '책의 세계'가 다르다는 감회가 들곤 한다. 글의 주인공은 필자이지만, 책의 주인공은 독자라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필자(나)가 주인공이어서 제 생각과 감회를 마음껏 토로할 수 있지만, 책을 만든다고 할 때는 제2의 눈인 '편집자'와 제3의 눈인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만 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 글에 대한 객관화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칠 때 좋은 글을 넘어서 좋은 책이 된다.
물론 독자 위주로, 달리 말하자면 베스트셀러를 만들 요량으로 독자에게 아부하는 글을 쓰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글을 읽을 독자를 염두에 두는 글쓰기와 책 만들기일 때라야, 고전과 현대간의 소통이 가능하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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