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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주례사' 서평을 쓴다!"

[1주년 특집] 이정모, 서평과 통하다

2003년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라는 책을 읽었다.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박사 과정 재학 중에 원로 교수의 표절 사실을 논문에 발표한 것이 문제 되어 스승들에 의해 매장(?)당했던 젊은 문학 평론가가 저자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핍박받는 이에 대한 소극적인 연대의 표시 같은 것일 게다.

아홉 명의 저자들은 각기 다른 책을 예로 들었지만 한결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략 정리하자면, "비평이 가장 좋은 말을 해주는 결혼식의 '주례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비평이 아니다. 그것은 출판사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야합이다. 출판 자본이 주도하는 '스타 시스템' 또는 '베스트셀러 시스템'에 비평가가 포섭돼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이거야. 누군가 나에게 책에 대한 비평을 맡긴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야!"라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 <인간의 미래>(라메즈 남 지음,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그러다가 2007년 8월 <한국경제신문>에서 문화부 기자를 하는 한 시인이 전화를 해서 <인간의 미래>(라메즈 남 지음,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펴냄)에 대한 서평을 청탁해왔다. 돈이 궁했던 나는 무조건 하겠다고 대답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출판사에서 주소를 묻는 전화가 왔고 책이 퀵 서비스로 배달되었다. 봉투 속에는 '보도 자료'라는 것도 들어 있었다. 우왕! 정리 잘했다.

"아니, 이걸 그냥 신문에 실으면 되지. 무슨 서평을 따로 쓰라고 해? 야~, 기자들은 참 좋겠다. 거저먹네, 거저먹어!" 이런 생각은 잠시. "가만, 보도 자료를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신문 기자와 편집자에게 증명하려면 무지 힘들겠는걸!" 그렇다. 나는 첫 번째 서평을 오로지 신문 기자와 편집자를 위해 썼다. 내가 끝까지 다 읽고, 혼자 힘으로 썼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300쪽이 넘는 책을 정독하고 (다행히 책이 재밌었다.) 서평을 한달음으로 썼다.

책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무엇이고,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하여 독자가 이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를 썼다. 다 쓰고 보니 책의 장점만 다룬 게 보였다. 책에 좋은 면만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책의 단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게 바로 주례사 비평이잖아!" 하는 반성의 울림이 있었지만, "지면도 작은데 단점까지 지적해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합리화의 울림이 훨씬 컸다.

그 후로 지금까지 대략 서른 편 정도의 서평을 썼다. 대부분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펴내는 격주간지 <기획회의>의 '전문가 서평' 꼭지에 쓴 것이다. 이 경우에는 '주례사'에 대한 고민이 크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한 달 동안 읽은 과학책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판단한 책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굳이 억지로 주례사를 쓸 필요가 없다. <기획회의>의 독자는 대부분 출판계 종사자다. 특별히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서 판단할 사람들이므로 책 내용을 정리하고 내가 생각한 책의 의의를 평가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언론사 서평이다. 다양한 층의 온 국민이 독자다. 그런데 언론사가 청탁하는 경우 책이 두껍다. 예를 들어, <과학, 우주에서 마음까지>(존 랭곤 외 지음, 정영목 옮김, 지호 펴냄)는 484쪽, <거의 모든 것의 미래>(데이비드 오렐 지음, 이한음 옮김, 리더스북 펴냄)는 540쪽이다. 하지만 신문사가 내게 준 시간은 2~3일에 불과하다. 정말 내가 그 시간에 그걸 다 읽고 서평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서평을 쓰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지만 신문사는 책의 두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쓴 분량에 따라 원고료를 지급한다. (나는 두 손 번쩍 들고 외친다. "서평 원고료는 서평 원고 매수가 아니라 책의 쪽수에 따라 지급하라! 비-정-규-직-철-폐! 투쟁! 결사-투쟁!") 2~3일이라는 시간 동안 책을 읽기에도 급급하여 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틈이 없다. 게다가 지면은 얼마나 작은가! "그나마 좋은 과학책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은 '주례사'라는 결단을 내리게 한다.

그렇다면 '프레시안 books'에 쓰는 서평은 어떨까? <기획회의>와 오프라인 신문은 원고지 12~13매라는 분량 제한이 있지만, 온라인 신문인 '프레시안 books'의 경우에는 분량의 제한이 없다. 물론 15~20매에 맞춰달라고는 하지만 그걸 지킨 적은 거의 없고 편집자도 불평하지 않는다. "스크롤 조금 더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여유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을 매우 충분히 준다. 보통 1~2주의 여유가 있는데다가 나온 지 꽤 지나서 내가 이미 읽은 책을 청탁하기도 한다. '프레시안 books'의 기획위원들은 온라인 매체의 최대 장점인 '속보성'을 과감히 포기했나 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프레시안 books'에도 '주례사 서평'을 쓰고 있다. 분량의 제한도 없고, 비판적으로 읽을 시간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내가 정한 책이 아니라는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다. 내게 청탁하는 편집자는 언제나 "선생님, 이러저러한 '좋은' 책이 있는데, 선생님이 서평자로 '딱!'인 것 같아서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다. '기획위원과 편집자가 좋은 책이라고 이미 말하는데, 내가 뭐라고 토를 달겠는가!' 하는 것은 핑계고, 나는 어느덧 출판사나 작가들과 야합하여 악평을 쓰지 못하는 서평가가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서평을 쓰는 것은 어쩌다 한 번이지만, 남이 쓴 서평을 읽는 일은 주례 행사다. 토요일 오전은 서평을 읽는 시간이다. (석간인 <내일신문>과 <문화일보>에는 금요일 자에 서평이 실리지만 이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중앙 일간지의 서평을 꼬박꼬박 읽는다. 그 이유는 책을 다 살 돈이 없고, 설사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겨레> 고명섭의 서평처럼 서평만 읽고도 마치 책을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을 좋아한다. '프레시안 books'에서 예를 들자면, 제2호에 실린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 대한 홍승수와 김윤성의 논쟁 서평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척'에는 한계가 있다. '척'을 뒷받침 하려면 어느 정도는 책을 실제로 읽어야 한다. '프레시안 books' 제29호에 실린 <지금, 경계선에서>(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샘앤파커스 펴냄)에 대한 이종필의 서평이나 제33호에 실린 <인류의 위대한 여행>(엘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책과함께 펴냄)에 대한 김명남의 서평처럼 "이 책은 꼭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샘솟게 만드는 서평이 매주 두세 개는 된다. 이젠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나는 매주 두세 권의 책을 산다. 그리고 그 가운에 한 권 정도를 제대로 읽는다. 서평가가 좋다고 한 책은 실제로 좋았다. 서평에 속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고백하건데, 나는 서평으로 독자를 속인 적이 있다. 일종의 자업자득이었다. 어떤 출판사의 책에 대해 서평을 잘 쓰고서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지면을 허락받은 필자로서의 과도한 권력 행사였다. 나는 그 책을 읽을 때의 불편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그 부분이 오히려 좋았단다.

이제는 그 출판사를 떠난 편집자는 내게 이메일을 통해 두 차례나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의 불평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얼마 후 다시 그 출판사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게 됐다. 솔직히 그 책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그 책을 강력 추천했다. 마치 오심을 저지른 심판이 다른 오심으로 보상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신랑 신부를 잘 아는 주례 선생님은 굳이 그들의 단점을 주례사로 지적하지 않는다. 대신 따로 타이른다. 오탈자와 같은 작은 실수를 굳이 서평 말미에 지적해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살지 말지 고민하게 하는 서평이 있다. 그런데 오탈자 지적하는 게 서평가의 역할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지적을 하는 서평에도 같은 실수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세밀한 지적은 인터넷 서점의 독자 평이 담당하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서평의 역할은 책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여 책이 사회에 녹아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주례사를 통해 두 젊은이가 가정을 이루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 나는 오늘도 주례사 서평을 쓴다. 그러니 독자들은 조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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