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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설악산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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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설악산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꽃산행 꽃글·11] 아니 벌써! 설악산 대청봉이네!

출판계에서 일하는 몇 분과 설악산 등산을 했다. 서울의 새벽에 출발해서 백담사를 거쳐 소청에서 일박을 했다. 다시 설악의 새벽에 출발해서 중청, 대청봉을 거쳐 오색으로 내려오니 점심 무렵이었다. 아직도 취침 중인 중청대피소에서 동해 오징어잡이 불빛을 보았던가. 희붐한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았던가. 그건 기억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으로 남은 게 있다.

우리가 오색으로 하산할 때 그곳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하행길, 그이들은 상행길.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을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지만 그런 만큼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힘내시라고 덕담을 건네고 헤어지면 그이들은 내려가는 나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이 사실은 더 위험한 법이다. 하산 길도 너무 가파르고 길어서 지루하고 발바닥도 몹시 아팠다. 그때 그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이 힘든 코스로는 설악산에 절대 오르지 않겠다는 사소한 결심을 했었다. 4년 전의 일이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해 2시간 정도 걸었을까. 설악폭포에 도착해서 배낭을 벗고 기지개를 켜는데 4년 전의 그 사소한 결심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오색에서 출발해서 설악산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 그러나 단순한 등산은 아니고 설악산의 멸종 위기 식물을 조사하는 팀의 보조 요원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나는 묵묵히 일행의 뒤를 따랐다. 나의 사소한 결심을 내세워 등산 코스를 변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멸종 위기 식물이 내 발길에 맞춰 피고 질 리도 만무했다. 식물은 땅과 한 몸이니 움직여야 하는 것은 동물인 나여야 했다. 그러기에 그런 것쯤이야 사소함으로 분류해 놓지 않았겠는가.

설악폭포 계곡의 물은 시릴 만큼 맑았다. 설악폭포의 바위에 잠시 누웠다가 오늘 올라가야 할 대청봉 쪽을 보니 복장나무, 사스래나무, 거제수나무 들이 어울려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겨우 바깥으로 드러난 이 물에 탄복하지만 이 나무들은 이 계곡보다 더 깊고 깊은 곳을 흐르는 물을 먹는다. 그래서 그 물들이 지금 물관을 통하여 저 푸르름의 높이에 도달한 것이다. 잎사귀의 혈맥마다 신선한 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푸르름 뒤에는 까마득한 대청봉의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컷 찍고 무거운 다리를 일으켰다. 4년 전의 나처럼 대청봉에서 내려오는 몇 분과 엇갈렸다.

▲ 복장나무, 사스래나무, 거제수나무 등이 어우러진 녹색의 잔치판. ⓒ이굴기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라고 고은 시인은 노래했지만 나는 지금 작정하고 식물에게 덤벼든다. 물론 4년 전에는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꽃은 내 눈으로 들지 못했다. 그저 깔딱거리는 숨소리에 정신을 몽땅 얹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등산로 옆으로 피어난 저 꽃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그 꽃은 내 가슴에 노루오줌으로 들어와 앉는 것이었다.

▲ 노루오줌. ⓒ이굴기

지금 이 시각은 하루의 초입이고, 이곳은 설악산의 하부이다. 그래서 아직 눈에 띄는 꽃들은 별로 없었다. 드디어 꽃들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따라 금마타리가 흔했다. 금마타리는 금마타리로 나의 마음에 피어났다. 이름도 예쁘고 꽃도 예쁘다.

▲ 금마타리. ⓒ이굴기

어느 모퉁이를 돌았던가. 작은 바위틈 저만치에 노란꽃이 숨어 있었다. 국화방망이였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희귀한 꽃이다. 훤칠하게 쭉 뻗어오른 가지 위에 무더기로 꽃들이 달려 있다. 키도 비슷한 두 포기가 햇볕을 쬐며 발돋움하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게 아니라 설악산 계곡의 한 방향을 나란히 바라보는 다정한 부부 같았다.

▲ 국화방망이. ⓒ이굴기

설악산은 큰 산이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갈 수 있는 동네 뒷산이 아니다. 이렇게 큰 산이라면 식물들도 키가 유달리 크지는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기껏해야 고등학교 때에 도달한 170센티미터 내외의 키에서 어름어름 살듯 풀이나 식물들의 높이도 같은 종이라면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식물의 다양성에서 설악산은 이름값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가려면 고개를 여러 번 넘고 아주 가파른 경삿길을 치고 올라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서 좌우의 길을 조금 벗어난 곳곳에서 의미심장한 꽃들을 만났다. 다음은 그 굽이굽이에서 만난 식물들이다. 설악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이 방대했는지 가슴으로 들어올 때의 느낌도 보통은 넘었다.

눈개승마 정향나무 배암나무 멍덕딸기 눈젓나무 만주송이풀 두메오리 홍괴불나무 세잎종덩굴 만병초 부게꽃나무 검종덩굴 땃두릅나무 시닥나무 다람쥐꼬리 산앵도 산쥐손이 꽃개회나무 호랑버들 이노리나무 청시닥나무 자주솜대 개현삼 투구꽃 진범 산시호 민둥인가목 원추리 기생꽃 산철쭉 분비나무 청분비나무 마가목

▲ 만주송이풀. ⓒ이굴기

▲ 세잎종덩굴. ⓒ이굴기

▲ 기생꽃. ⓒ이굴기

예전의 나에게 설악산이라면 출발하는 오색과 도착하는 대청봉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지루한 발걸음과 고된 헥헥거림. 눈썹을 적시는 땀방울과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끈의 쓰라림.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 긴 거리를 꽃들이 구름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비로소 내 눈으로 들어오는 꽃과 나무들이 그 사이와 높이를 잘게 부수어 놓고 있었다. 나는 여울목의 징검다리 건너가듯 꽃들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나가면 되었던 것이다.

▲ 범꼬리. ⓒ이굴기

범꼬리가 지천에 완연했다. 세찬 바람에 하늘거리는 범꼬리를 찍고 허리를 문득 폈다. 여기는 어디인가. 돌무더기가 많이 나타났다. 경사도 아주 완만해졌다. 가까이에서 우뚝 서 있는 화강암 표지석이 보였다. '1708M 대청봉'라는 붉은 글씨가 육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벌써! 설악산 맨꼭대기에 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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