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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학생 죽인 "경찰에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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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학생 죽인 "경찰에 표창!"

[해방일기] 1946년 7월 27일

1946년 7월 28일

정판사 사건과 뚝섬 위조지폐 사건의 공판을 법원 4호 법정에서 개정할 예정이던 7월 29일 9시에 수천 군중이 몰려들어 큰 소동을 빚었다. 이로 인해 개정은 몇 시간 뒤로 미뤄졌다. 법정에서 벌어진 일은 내일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법정 밖의 소동을 먼저 살펴본다.

군중의 폭력에는 투석 외에 아무 무기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의 발포로 청년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부상했다.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은 '공포'를 쏘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택상에게 '공포(空砲)'의 개념이 무엇이었는지 참 의아하다. 실탄이 나가지 않는 공포탄을 넣고 쏘는 것이 공포라고 나는 알고 있는데, 그는 "살해할 의사"만 없으면 실탄을 쏘더라도 '공포'가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장 부장과의 문답"

30일 장(택상) 경찰부장과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무장 안 한 민중에게 발포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답) 어제 같은 상태에서는 옳다고 생각한다. 공포를 발한 것은 살해할 의사와는 다르다.
(문) 공포에 의하여 살해된 것은 경찰의 책임이 아닌가?
(답) 경찰은 추호의 책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찰의 훈로를 표창할 생각이다.
(문) 당신이 현장에서 지휘하였다는데 그것은 사실인가?
(답) 그 날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아서 잘 기억하지 못하나 그런 말을 하였다면 이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유신문> 1946년 7월 31일자)

진짜 엽기적이다. 조현오보다 더하다. 투석 정도 군중의 폭력에 발포로 대응한 것이 옳단다. '공포'가 사람 죽인 데 대해 경찰은 "추호의 책임"도 없단다. 게다가 자기가 현장에서 지휘한 사실도 잘 기억하지 못한단다. 이 기사는 "자료 대한민국사"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에서 찾아낸 것이다. "자료 대한민국사"의 정판사 사건 관계 기사는 거의 모두가 <동아일보> 기사뿐이다. 어찌된 일인지 모를 일이다.

7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군중 속에서 쏜 일탄"이 경관 머리에 맞았다는 내용도 있는데, 천하의 <동아일보>가 사실무근의 내용을 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 '돌멩이 일탄'을 맞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 기사인데도 "자료 대한민국사"에 없어서 "한국 근현대 신문자료"에서 찾은 것이다.

"법정 싸고 소동하는 군중 / 해산-제지코저 발포"

이 날 상오 6시부터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60명의 경찰대가 출동하여 경성지방법원 내외를 비상 경계하는 중 이른 아침부터 몰려드는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서 8시 30분경에는 수천 명이 둘러싸고 그중에는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조선공산당 만세를 고창하는 사람들도 있는 중 상오 9시 10분 전 피고들이 트럭 한 채로 들어오자 후문에서 돌팔매가 들어오고 정문에서는 순경의 발포 사건이 일어나 성동중학생 1명이 총에 맞아 생명이 위독하고 한 명이 다리를 맞아 방금 대학병원에 입원 중에 있다.

그리고 군중 속에서 쏜 일탄은 경관 머리에 맞아 소동을 일으켰는데 급보를 받은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시내 각서 무장경관대를 출동시켜 겨우 하오 1시경에 군중을 해산시키고 그 후부터는 교통을 차단한 후 공판을 계속하였다.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죽은 청년이 하늘을 향해서 쏜 유탄에 맞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니, 사정거리가 얼마나 짧은 총이기에 하늘을 향해 쏜 총알이 같은 법원 구내에 있는 청년을 죽였을까? 90도 각도로 쏜 총알인가? 7월 30일자 <자유신문> 기사 중 대학병원 의사를 인용한 상처 묘사를 보면 하늘에서 떨어진 총알은 아니었다.

"유탄으로 빈사의 중상"

법정 밖에 소란 중의 유탄으로 인하여 시내 경동중학 3학년 3반 전 군(이름은 아직 불명)은 탄환이 얼굴을 뚫어 빈사의 중상을 입고 경대병원에 입원하였다.

<생명은 위독 / 경대 문외과 담> 경대 부속병원 문외(과?) 한격부 씨는 환자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인사불성이다. 탄환은 아래턱뼈를 부수고 후경부(後勁部) 근육에 남아있다. 지금 응급 치료를 하고 있으나 생명이 위험하다."

<이신생 군 담> 중상 당한 전 군을 업고 온 이신생 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다. "앞에 있는 전 군이 피를 흘리며 넘어졌으므로 이를 떠메고 가까운 적십자병원으로 가려 하였으나 경관이 통행을 일체 용서치 않아 다시 반대편 길로 떠메고 갔더니 상부 명령이 없이는 통과를 못 시킨다 하며 거절하므로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망연히 있다가 겨우 자동차로 성대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당시에 그 총알을 요새 CSI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조사했을까? 내 상식으로는 턱과 목을 맞춘 총알이 하급 경관들의 캘빈 총으로 쏜 것이라면 관통을 못 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간부들이 갖고 있던 권총탄이 아니었을까? 혹시 장택상 본인이? 에이~ 쓸 데 없는 상상은 그만두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극우파에서는 좌익이 폭력에 나섰다는 선전을 펴는 데 진력했다. 사건 직후 하지 사령관의 발언에서 그런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점까지는 하지도 좌익을 테러의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지 중장은 이와 같이 교사를 받은 폭도군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경찰이 보여준 견인한 태도를 칭찬하며 소수의 상해만으로 이 난경을 선처한 것은 전혀 경찰관의 인내와 관용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당국의 한 가지 과오는 너무 어떤 선동적 단체에서 테러에 대한 대대적 반대 선전의 진의를 믿었던 것이다. 정의를 요란스럽게 부르짖고 테러행위를 비난하던 그들 자신이 갑자기 그런 술책을 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1일자)

<동아일보>는 8월 6일자와 7일자 2회에 걸쳐 모처에서 입수했다는 공산당의 '선동 계획' 전문을 게재했다. 실제로 공산당에서 이 비슷한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었을 것 같고, <동아일보>에서 양념을 얼마나 쳤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긴 내용이고 상세한 설명을 붙일 여유가 없지만, 당시 공산당의 전술 전략(적어도 우익 일각에서 공산당의 전술 전략으로 선전하고 싶어 하던 내용)이 상당부분 반영된 내용으로 보고 전체를 붙여놓는다.

예민한 내용이기 때문에 8월 6일자 게재 내용은 "한국 근현대 신문자료"와 대조해 일부 수정했는데, 8월 7일자는 이 기사가 실린 제2면이 나오지 않아 "자료 대한민국사"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올린다.

"좌익계의 긴급 선전 선동 방침 알려지다."

과연 전율할 일이었다. 저 精版社 위폐 사건이 어째서 허구한 사건이었던가? 다만 관계자의 전부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들 좌익 진영은 이번 위폐 사건의 공판을 깨트려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관계자가 左든 右든 위폐 사건은 독립 전야의 국민 경제를 최대한도로 혼란시킨 범죄 사 상의 큰 기록이다. 그런데 보라! 소위 "729캄파를 중심으로 한 緊急宣傳 煽動方針"이란 모종의 서류가 7월 29일의 위폐 사건 공판을 전후하여 전달되어 무서운 파괴 행위의 채찍을 들고 당원을 호령했던 것이다. 이하는 모 방면에서 전달된 선동 계획의 전문이다.

1) 투쟁 성과와 자기비판

A) 성과

(1) 공판의 연기를 위한 방침이 관철되어 당의 위신을 굳게 지킬 수 있었고 조직된 대중을 더욱 공고한 지반에 놓게 되었다. 더욱이 노동자 학생이 제일 용감하게 선두에 나선 것은 큰 성과였다.
(2) 반동 진영의 야만성을 더욱 날카롭게 폭로하여 더 많은 대중을 우리당 주위에 집결 조직할 계기를 만들었다.
(3) 경찰의 반동성과 아울러 그의 반동적인 상부와 비교적 순직한 하부(일부 악질분자를 제외)의 격리를 민중 앞에 노정하였다.

B) 자기비판

(1) 소위 위폐 사건에 대한 해결 사업의 부족이 드러났다. 그것은 미조직 소시민 대중의 부족으로 알 수 있다.
(2) 대체로 보아 동원 부족과 투쟁에 대한 계획성이 부족하였고 명령 계통이 불충분하였다.
(3) 선전 활동이 동원 활동과 연락되지 못했다.
(4) 아지푸로 활동에 있어 그 내용이 추상적이었다. 당서기국 발표의 예증을 활용할 줄 몰랐다. 아지 내용에 생활문제를 첨부시키지 못한 것.
(5) 삐라 제작이 부족했다. 그리고 부족한 삐라를 유효하게 철포할 줄 몰랐다.
(6) 투쟁의 편향
㉠ 좌경
경관에게 투석한 것
데모에 그룹성을 나타낸 것
미조직 군중의 계급성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만세를 호창한 것
데모에 미조직 군중을 보장하려고 하지 않고 유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경관의 상부 하부를 일률적으로 욕한 것
㉡ 우경
경관이 총을 대인 데 한꺼번에 후퇴한 것
민주 경찰 만세를 부른 것

2) 금후 선전과 선동활동

(1) 소위 위폐 사건의 허구성과 모략성을 더욱 날카롭게 과학적으로 폭로 해설할 것. (특히 서기국 발표의 문건을 더욱 깊이 인식하도록 노력할 것)
(2) 7·29 학살 사건의 진상을 널리 해설하고 경찰 상부(특히 조병옥 장택상)의 야만성을 폭로할 것. 공판정에서 조병옥은 반말로 민중을 모욕하고, 발언하는 사람을 체포한다고 대중을 공갈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6일자)

㉠ 장택상은 자기 부하를 대중 앞에서 구타하여 그의 광견성을 더욱 명백히 노정하였다.
㉡ 살상한 시체를 곧 병원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고 시체 하나는 암장하였다.
(3) 7·29 사건 폭로는 민생 문제와 연결시켜(비컨대 장택상은 은닉미 적발은 게을리 하여도 사람 죽이는 것에만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등) 남조선의 물가고 혼란의 책임을 규탄하도록 할 것
(4) 좌우 합작에 대한 민전의 5대 원칙을 항상 결부시켜 이것을 반대하는 반동 거두와 위폐 날조의 모략을 직접 연결시킬 것
(5)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한 재조사를 강조 해설하고 편당적인 판검사의 기피 운동을 연달아 일으킬 것
(6) 이관술 동지의 무조건 석방을 아울러 주장하여 반동 거두의 발견 조병옥 장택상의 즉시 파면을 요구할 것
(7) 북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토지 개혁 노동 법령 남녀 동권 등)을 선전함으로써 남조선의 혼란을 더욱 깊이 인식케 하고 남조선을 북조선화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남북 통일의 민주 정권 수립에 모든 민중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가 8·15 기념의 민족적 행사에 총연락 시킬 것

3) 선전의 구체적 방법

(1) 야체이카 선전부의 기초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하여 동 선전부 책임 동무는 더욱 열성적으로 선전에 대한 학습을 하고 선전에 유능한 동무들을 발견하여 선전부를 강화할 것
(2) 선전 지시 첨부 삐라 원고를 참작하여 각 분야에서는 최대한도의 능력을 발휘하여 삐라의 발행 배부를 할 것
(3) 간단한 전단을 끊임없이 붙이도록 할 것
(4) 벽서 활동(변소 장벽 전주 등)에 백목으로 쓰는 것은 전연 없다시피 하니 이것을 더욱 장려하며 이번에는 꼭 실행할 것
(5) 집합 활동은 전부터 해 오던 약식으로(대집회 소집회 등)하되 기계적으로 하지 말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타방면으로 계속할 것
(6) 슬로간은 첨부 삐라에 의거할 것. (<동아일보> 1946년 8월 7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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