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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일당은 왜 좌우 합작을 반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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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일당은 왜 좌우 합작을 반대했나?

[해방일기] 1946년 7월 25일

1946년 7월 25일

7월 25일에 좌우 합작 2차 예비 회담이 열리고 이어 제1차 본 회담이 열렸다. 미군 연락장교로 버치 중위가 참석한 반면 소련군 연락장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허헌의 결석이다. 허헌은 사흘 전의 예비 회담에도 참석하지 않았었다.

좌우 합작 제1차 정식 회담이 25일 덕수궁에서 개최되어 의사 진행 원칙 규정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변인으로 우익 측 金朋濬 좌익 측 李康國 양씨가 선임되었고 회담 결과에 대한 공동코뮈니케는 동 대표 회의에서 결의된 안건을 각기 민주의원과 민전에 보고하여 쌍방의 동의를 얻은 후에 발표하기로 되었다.

◊ 좌우합작위원회 발표

좌우합작위원회는 7월 25일 오후 2시 반 덕수궁에서 金奎植 씨 사회 하에 우측 대표 金奎植 元世勳 安在鴻 崔東旿 金朋濬 5씨와 좌측 대표 呂運亨 成周寔 鄭魯湜 李康國 4씨 참석으로 정식 회담이 개시되었다. 의사 규정이 통과되었고 미군 연락장교로 버취 중위가 출석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27일자)

허헌은 5월 하순 좌우 합작 논의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여운형과 함께 좌익 대표로 널리 기대를 모은 인물이었고, 본인도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5월 23일 러치가 여운형과 그를 초청해 우익의 김규식, 원세훈과 함께 4인 회담을 가지도록 권유받고 6월 14일과 6월 22일 실제로 그런 회담에 참석했다. 10인 대표가 정해진 후 7월 16일 버치 중위 집에서의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 후 합작 회담에 다시 출석하지 않았고 좌우 합작에 관한 견해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합작 진행에 실제로 반대한 것으로 분석된다.

좌우 합작에 대한 일부 극우파의 반대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거니와, 극좌파의 태도에도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중 허헌의 태도 변화는 이 문제가 반영된 것이었다. 허헌이라는 인물을 한 차례 살펴보겠다. 심지연의 <허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 잘 정리되어 있다.

1945년 11월 27일, 막 귀국한 김구가 국내 정치 세력을 대표하던 안재홍(국민당), 송진우(한민당), 여운형(인민당), 허헌(인공) 4인을 연쇄 접견했는데, 접견을 앞두고 비서 장준하가 4인의 프로필을 정리해 드렸다. 허헌의 프로필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허헌> 건준의 확대위원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인물. 사회주의 좌파 경향의 변호사 출신으로 날카롭고 강한 의기의 소유자라는 중평. 부위원장 당선으로 안재홍은 저절로 물러나고 여운형과 좋은 콤비가 되었지만 그 역시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위된 상태.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의 '인민대표회의'에서 '임시 정부 조직 법안'을 통과시키고 그 법에 의한 '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킴.

허헌(1885~1951년)은 식민지 시대에 김병로, 이인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거물 법조인이었다. 1929년 6월 신간회를 장악한 좌익 계열이 그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했기 때문에 좌익과의 친연성이 나타났지만 그 자신이 적극적인 좌익 활동을 한 일은 없었다.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간 복역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후 별다른 대외 활동 없이 지내다가 1943년 단파방송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년 남짓 복역한 후 해방 몇 달 전에 출옥했다.

황해도 신천에서 은둔 중 해방을 맞은 허헌이 8월 말 서울로 올 때는 건준의 좌경화로 인해 부위원장 안재홍이 물러날 마음을 먹고 있을 때였다. 위원장 여운형과 부위원장 안재홍이 모두 사표를 낸 상황에서 9월 4일 건준 전체 회의는 두 사람의 사표 반려와 함께 부위원장에 허헌을 추가할 것을 결정했다. 안재홍은 사임을 강행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허헌이 안재홍의 자리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이 시점에서 허헌의 좌익 관계를 심지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 시기 그는 독립 운동가를 포함하여 어렵게 지내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당 사건 변호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는데, 이 중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 일제 시기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독립 운동이나 이념 문제로 재판을 받는 일이 많아 그가 변론에 나서는 일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딸 또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기에 그의 주위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허헌을 둘러싼 이러한 인간관계는 해방된 다음에도 단절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어렵게 살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그대로 실천했으며, 해방된 조국에는 이러한 불평등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변에서 그를 좌경적인 인물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허헌 자신이 결코 자신의 이념을 표방한 적이 없었음을 생각할 때 그는 해방정국에서 다른 많은 사람처럼 타의에 의해 좌익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허헌 연구>, 95쪽)


본인이 이념을 표방한 적이 없다면 "타의에 의해 좌익이 된 인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 해방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헌을 좌익에 동정적일 뿐, 본인이 좌익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고 봤을 것 같다. 그러나 건준 부위원장을 맡은 후 그의 행적은 '골수 박헌영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준 일을 맡자마자 인공을 출범시킨 데서부터 시작한다. 인공 수립에는 여운형도 찬성했지만, 여운형 등 중도파는 건국 노력의 상징적 출발점을 만드는 목적이었다. 부서를 만들고 책임자까지 일방적으로 지명해서 귀국할 임정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드는 것은 박헌영의 전략이었고, 이것을 허헌이 앞장서서 수행했다.

허헌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공과 민전 등의 활동에서 박헌영에게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박헌영을 위한 허헌의 최대의 공헌은 1946년 가을 남로당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위원장을 맡은 것이었다.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을 바라본 남로당 결성 과정은 8월 초 인민당의 합당 제안부터 시작해 진행을 살펴보겠거니와, 이 과정에서 허헌은 "박헌영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평판을 얻는다. 신민당의 백남운 위원장이 비민주적 진행 방법에 반발하자 허헌이 느닷없이 신민당에 입당, 친 박헌영계의 힘으로 당권을 장악하고 일방적으로 합당을 추진했다. 반대파들을 떨궈 내고 억지로 3당을 합쳐 만든 남로당의 위원장을 맡은 것은 박헌영의 대리인 역할이었다.

박헌영의 모험주의 노선에 충실히 협조하고 추종한 행적을 보면 "타의에 의해 좌익이 된 인물"이라는 관점이 매우 어색하다. 이념 없이 양심의 기준만을 추구한 사람으로 보기에는 극단적이고 정략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은 대목이 너무 많은 것이다. 심지연은 여러 차례 허헌의 오류를 인간적인 이유로 이해하려 애쓴다. 예컨대 <허헌 연구> 135~136쪽에서 허헌이 좌우 합작을 등진 이유를 "국제 정세가 냉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볼 때 박헌영의 전술 전략에 집착한 이유가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허헌이 7월 16일 모임 이후 좌우 합작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박헌영의 좌우 합작 반대 입장에 따른 것으로 심지연은 보았다. (아래는 <허헌 연구>, 130쪽 주141 내용.)

평양을 방문하고 7월 22일 밤에 귀경한 박헌영은 좌우 합작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박헌영의 견해에 대해 허헌과 홍남표, 이주하가 동조했고, 여운형과 김원봉은 반대했으며, 백남운은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견 불일치로 결론이 나지 않자 박헌영은 5원칙을 제시하고, 민전 의장단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민전의 기본 정책으로 채택하게 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여운형에게는 통보되지 않았다. (<미군 정보 보고서> 제12권, 158~159쪽)

후일 박헌영은 "폭력 하에 강제 합작은 절대 반대"라는 글에서 좌우 합작이란 반동적 친일파 영도 하에 있는 우익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인민들은 이러한 관제적인 강제통일을 절대 반대할 권리를 당당히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합작을 반대했다. (<조선인민보>, 1946년 8월 5일)

박헌영과 허헌이 좌우 합작의 실패를 바라는 생각을 7월 하순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그런 생각을 갖고 회담에 한 차례 출석도 안하면서 형식적인 대표 자리를 허헌이 지키고 있었다면 참 야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원봉과 백남운은 합작에 열의를 가진 좌익 명망가들이었다. 허헌이 7월 16일 모임에 참석한 것도 김원봉과 백남운을 배제하고 대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위 자료에서 박헌영이 주도했다고 하는 '민전 5원칙'은 이런 내용이었다.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삼상 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 통일의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을 매진하되 북조선민주주의 민족 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적극적 행동 통일을 기할 것.
2) 토지 개혁(무상 몰수 무상 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급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제 기본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3) 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여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 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토록 기도할 것.
5) 군정 고문 기관 혹은 입법 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서울신문> 1946년 7월 27일자)

다 좋은 얘기다. 그런데 이런 좋은 내용을 좌우 합작의 목표로 삼자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합작 회담의 전제로 하자는 것은 무리한 요구 아닌가. 이에 대해 우익 쪽에서는 이런 비판이 나왔다.

제1조에서 저들은 임시 정부 수립을 전제로 하는 미소공위 재개 촉진 운동의 근거로서 3상 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자는 기왕에 있어 좌우 분립을 가져왔던 슬로건을 또다시 그대로 걸고 있으나 이는 먼저 임시 정부를 수립시킨 후 정부와 공위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에 의해서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연 불필요한 슬로건을 되풀이하는 것은 분명히 합작 운동을 파괴하는 것이다.

제2조 토지 개혁 중요 산업 국유 민주주의 노동 법령 제정, 제3조 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의 배제 처벌 문제 애국 지사의 석방 문제, 제5조 군정 고문 기관 급 입법 기관 창설 반대 등의 3조항 역시 임시 정부 수립 후에 결정되고 처단되고 해소될 문제이지 지금부터 떠들어댈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안건 처리상의 전후를 망각한 여상 3개조의 불필요한 제의와 절규는 부질없이 혼란과 분립을 조장할 뿐임을 우리는 지적하는 바이다.

그리고 제4조에서 저들은 군정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하라 하고 있으나 이는 무지와 후안무치를 겸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2일자, 강만길·심지연, <항일 독립 투쟁과 좌우 합작>, 199쪽에서 재인용)

제1조에 대한 지적은 극우 쪽으로 치우친 감도 있지만, 2, 3, 5조에 대한 지적은 객관적 입장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4조는 그저 좌우 합작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억지로 꺼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5원칙을 민전에서 결정, 발표하는 과정에서 좌우 합작 회담의 좌익 측 의장이자 민전 의장단의 일원인 여운형에게 알리지도 않았다면 참 한심한 일이다. 회담의 원칙으로서 좌익이 제기할 것이 있다면 여운형을 통해야 할 것 아닌가.

공산당도 민전도 좌우 합작 지지를 표명했다. 그런데 박헌영 일당은 실질적으로 회담을 좌초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극우파와 극좌파가 좌우 합작 실패를 위해 이렇게 뜻이 맞은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좌우 합작이 그들의 '적대적 공생 관계'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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