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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가면 죽는다" 알면서 탈출 못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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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가면 죽는다" 알면서 탈출 못하는 까닭은?

[철학자의 서재]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삶의 고됨

아직 한 해를 거두려면 많은 날들이 남았지만 두려움이 앞선다. 반 년 남짓한 세월에 동물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많은 생명들이 죽었기에 그렇다.

흔히들 삶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라 한다. 고된 것이 삶이기에 어떻게든 꿋꿋이 헤쳐 나가길 바란다고들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반쪽 말처럼 들리는 이유는 표현이 잘못 도치된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삶의 고됨을 진단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이토록 삶을 고되게 만드는가. 삶이 어느 정도까지나 고되게 되었기에 생존의 부르짖음에 그토록 냉정해지고 막다르게 취해진 죽음들에 그토록 무감각해진 것일까.

삶의 불만 목록들

프랑스 혁명 전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175년 만에 삼부회 회의를 소집해 전국에서 수집한 불만들을 검토하려 했다. 당시 불만 목록들은 4만 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이 목록들은 그러나 역으로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주체를 부각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면 같은 맥락에서 우리 삶을 고되고 불만스럽게 하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낮은 투표율로 뽑힌 위정자들의 친기업적 반서민적 정책들, 과거사 진실 화해 위원회의 미완의 종결과 친일 경력자들의 미화 조짐, 시민에 대한 국가의 잦은 소송, 수사권을 둘러싼 검찰의 조직 이기주의, 끝없는 물가 상승과 800조 원에 달하는 가계 부채, 하천과 토지 등 생태적 공유물의 개발을 통한 사유화, 지식의 가속적 상품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이런 것들을 일일이 수집해 본 적이 없지만 몇 가지 범주로 묶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에 좋은 지침을 주는 책이 바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펴냄)이다.

▲ <다중>(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펴냄). ⓒ세종서적
물론 <다중>의 저자들은 전 지구적 차원의 불만 목록들을 범주화한다. 그러나 여기서 열거되는 범주들은 우리의 문제들과 꼭 닮았다. 지구화 시대에 일국적 차원의 문제들이 이미 국제적 소통 맥락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범주들은 대의(代議)의 불만들, 권리와 사법의 불만들, 경제적 불만들, 삶정치적 불만들이다.

각각의 범주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들은 쉽게 눈에 띈다. 낮은 투표율만이 대의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가 경제를 상당 부분 잠식한 대기업의 이해는 곧 국가의 이해로도 표현된다. 이를테면 주요 기업의 비선거적 대의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기업의 후진국 진출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다양한 과거사 진실 화해 위원회를 통한 인권의 회복은 각종 국제 재판소처럼 효과적인 사법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지배 권력에 의해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가난의 지리적 계층적 양극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빚이 노예화의 합법적 메커니즘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댐 건설이나 하천 정비가 생태적 공유 공간을 자본주의적으로 재편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러한 불만들은 분명 다양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건만 분개의 목소리는 먼 메아리로만 들리는 듯하다. 왜일까. 살기에 바빠서. 대학 진학에, 학점 관리와 취업 준비에, 결혼, 주택 마련, 대출 이자에, 양육비, 학원비, 조기 퇴직, 노후 대책에 여념이 없어서, 온갖 걱정들 중 하나라도 놓치면 그런 삶의 가능성조차 없을 것 같기에.

다시 고쳐 묻자. 우리는 왜 삶을 고되게 하는 것들을 놓지 않고 오히려 그 고된 삶을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일까. 언젠가 누릴 행복?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런 행복이 별을 따는 희망만큼이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일상화된 예외 상태

우리의 일상적 삶이 그 자체로 희소해져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위기 자체가 우리 삶의 조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삶의 부정이 곧 삶의 내용이 된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중>의 저자들은 그 이유를 예외 상태의 항구적 보편화에서 찾는다. 이제 대외 관계와 국내 관계 모두에서 예외가 그 자체로 규칙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려면 그냥 저녁 뉴스 채널을 한 번 틀어보면 된다. 단순한 날씨 보도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시민을 겁주지 않는 소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위기가 삶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편재하게 된다면, 전쟁과 예외 상태가 무제한적이고 항구적이게 된다면, 삶의 모든 가능한 대안들은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 정상은 예외의 침묵과 허용 속에서만 가능하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조차 이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지경이다. 언젠가 도래할 정상적 삶을 위해 지금 감내해야 할 예외 상태의 기간은 무한정 연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해 지금 신경을 곧추세워야 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점점 더 반복해 강조된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 지금 감내해야 할 물가 불안은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변할 줄 모른다. 정상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자력의 항시적 위험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필요악이다. 예외 상태의 일상화가 우리의 삶이 되어 버렸다. 예외를 벗어난 일상은 이제 TV 다큐에만 나온다.

<다중>의 저자들은 예외 상태의 시작을 1972년 미국과 소련의 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에서 본다. 그리고 예외 상태의 본격적인 전개를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 이후로 측정한다. 과거의 전쟁은 피아(彼我)가 선명하게 구별되었다. 적은 영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력이 응집된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과의 전쟁은 자국의 정상적 삶 밖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은 날로 확산되는 작은 위협들에 더욱더 초점을 맞추고 심지어 적을 새롭게 생산하고 변형시키기도 한다. 범죄와의 전쟁, 물가와의 전쟁, 국가 보안과 명예를 위한 전쟁에 흉악범은 얼굴이 공개되어야 하고, 노동 가치가 발버둥 쳐서는 안 되며, 국제회의를 모독하는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 위기로 지칭되는 것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이에 덧붙여 간과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 모든 위협들 하나하나에, 그 모든 위기들 하나하나에 문제시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생명의 어느 한 도구적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자체라는 것이다. 학점 관리 한 번 잘못하면 네 사회 진출 전체가 달라진다. 상관 말 듣지 않으면 네 퇴직 시점이 달라진다. 너의 임금에 대한 협상이 아니라 너의 직업 유지에 대한 협상이다. 너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은 국가 내 너의 존립의 부정이다.

삶권력과 삶정치

그러나 예외가 그렇게까지 일상화되었다고 해서 이 일상적 예외를 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예외의 일상화는 불가피한 사회학 법칙인가, 아니면 언제든 변혁 가능한 새로운 권력 기제인가.

<다중>의 저자들은 예외 상태의 항구적 보편화를 새로운 권력 기제로 본다. 오늘날 권력은 죽음의 예외 상태를 지속적으로 조성함으로써 자신에게 복종하는 삶 자체를 생산하고 규제하는 삶권력(Biopower)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삶권력의 주체는 일국적 차원의 주권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제국적인 주권자를 가리킨다.

제국이란 <다중>의 정의에 따르면 초국가적 기관들과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 그리고 지배적인 국가들을 결절로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네트워크 권력을 말한다. 따라서 제국은 제국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의 정치, 경제, 군사 복합 권력 집단을 가리킨다. 일국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이러한 권력 집단이라는 것이다.

<다중>의 큰 장점은 신자유주의 이후 삶의 위기를 그렇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에 있다. 삶 유지의 어느 한 계기라도 박탈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는 바로 삶 자체가 문제시되고 있는 자들이다. 아니, 오늘날 안정적으로 보장받는 고용이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말해 산업 정규군은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빈자이다. 동시에 빈곤한 삶의 과정이 삶권력의 생산 과정이 된 오늘날, 사회적 생산 과정 외부의 산업 예비군 같은 것도 없다.

<다중>의 저자들은 고된 삶의 항상적 빈곤 속에서 공통적인 삶을 능동적으로 생산하는 주체를 다중(Multitude)이라 부른다. 그리고 삶권력에 대항하는 이들의 생산적 삶의 활동을 삶정치(Biopolitics)라 정의한다.

다중의 대안들

다중은 중앙 집권적 대항 권력을 통해 저항하지 않는다. 다중은 분산된 네트워크를 통해 다점적으로 행동한다. 다중은 그때마다의 거점에 떼로 모여든 지성을 통해 소통하고 공통적 삶을 생산한다. 다중이야말로 전 지구적 시대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절대적 직접 민주주의의 주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면적 위기가 조성된 풍토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능성을 전망하려는 대목들은 특히 흥미롭다. 대의 개혁의 사례로서 세계 곳곳의 NGO들의 세계사회포럼(WSF) 창설, 권리와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주장되는 진실 화해 위원회의 상설화, 경제 개혁의 목표로서 탈자유주의적이고 탈사회주의적인 공통적인 것의 창출, 삶정치적 개혁으로서 제안되는 독립 미디어 활성화 등, 이미 현실에서 진행 중이고 진행 가능한 다중의 여러 삶정치적 활동들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목격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우리 사회 다중의 가장 대표적인 삶정치적 활동은 바로 촛불 집회일 것이다. 최근 스테판 에셀이 역설한 분노의 목록들을 진단하고 평화적으로 저항하라는 외침은 이미 여러 촛불 집회를 통해 한국 다중의 현실 경험이 된 상태이다. 그리고 등록금 문제를 학교 당국과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로 들고 나온 대학생들에게서 한국 다중의 밝은 지성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복지가 우리 사회의 전면적 화두가 된 것 또한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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