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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싸웠던 진짜 적은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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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싸웠던 진짜 적은 '그'였다!

[프레시안 books]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궁정 대신과 이단자 :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그리고 근대 세계에서 신의 운명"이라는 원래 제목이 암시하듯이, 두 철학자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매튜 스튜어트의 이 책에서 굳이 제1주연을 꼽자면 라이프니츠이다.

헌데 한글 번역서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석기용 옮김, 교양인 펴냄)는 지명도를 고려한 탓인지 스피노자를 앞세웠다. 제목의 이름 순서부터, 표지 그림의 얼굴 크기로 보나 이름의 활자 크기로 보나 스피노자가 1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처럼 주연 자리를 꿰찼는데 얼떨결에 2인자로 밀려난 라이프니츠가 좀 억울할 법하다.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많은 애독자를 거느린 편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정우의 <접힘과 펼쳐짐 : 라이프니츠, 현대과학, 역>(2000년), <주름, 갈래, 울림 : 라이프니츠와 철학>(2001년)이 나오기 전까지 실상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비슷한 시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스피노자가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은 제법 인기 있는 철학자로 떠오른 데 비해 라이프니츠는 여전히 우리에게 서먹서먹한 철학자이다.

가장 큰 이유라면 그의 철학이 보여주는 맥락 없는 난해함 탓이 아닐까 싶다. 신, 영혼, 실체 따위의 고전적인 개념들을 전혀 새로운 문법으로 결합시켜 놓은 데다 내용이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그의 형이상학을 힘겹게 읽어가다 보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희한한 체계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튜어트의 작업은 라이프니츠를 이해하는 하나의 가능한 길을 제시한다.

"라이프니츠가 무엇에 찬동한 것인지는 간혹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가 무엇에 반대한 것인지는 한 단어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바로 스피노자이다" (466~7쪽)

▲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매트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기, 교양인 펴냄). ⓒ교양인
지나치게 깔끔해서 오히려 조심스러워지긴 하지만 이런 스튜어트의 주장은 확실히 흥미롭다. 그는 1676년 11월에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를 몰래 찾아가 며칠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프롤로그에서 예고된 (그리고 번역서 제목에서 강조된) 두 대가의 비밀스런 만남은 마침내 책의 11장에서 성사되는데, 예고편에서 잔뜩 바람을 넣었던 것에 비해 정작 본편은 이렇다 할 내용 없이 싱거운 편이다. 하기야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엿볼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라고는 라이프니츠가 남긴 메모 한 장뿐이라니 아무리 총명한 저자라도 별 수 없는 일이겠다.

대신 스튜어트가 촉을 세우는 것은 만남 전후 라이프니츠의 입장 변화이다. 스피노자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라이프니츠가 남긴 메모들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얻어낸 결론은 이렇다. 한때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357쪽).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를 만난 바로 그 시점에 스피노자에 관해서 마음을 바꾸었다"(427쪽).

뿐만 아니라 스튜어트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신 개념에 대한 반동으로서 자기 철학을 다듬어갔다. "라이프니츠 완성기 철학의 제1원리이자 근대성에 대한 그 나름의 독보적인 응답의 출발점을 표시해주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거부이다"(436쪽). 나아가 그는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 로크, 뉴턴을 비판하고, 루이 14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며, 중국 철학을 재검토한 것도 모두 '스피노자의 유령과의 싸움'으로 읽어내려 한다.

그런데 반전이랄까, 이런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의 철학에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스피노자적 특성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스튜어트의 지적이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주요 철학 개념들을 하나하나 분석함으로써 그것들이 겉보기와는 달리 얼마나 스피노자주의를 닮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라이프니츠는 결국 "스피노자의 신을 믿지 않는 스피노자주의자"(544쪽)였다는 것이다.

스튜어트의 견해에 대한 세세한 논평을 위해서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발전사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어찌 됐든 산발적인 자료들을 재구성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특히 스피노자와의 관계 속에서 라이프니츠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이 책의 무시못할 공적이다. 그가 어지간한 라이프니츠의 행적들을 모두 스피노자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대목은 다소 과한 듯하고 더 많은 논거를 필요로 하리라 여겨지긴 하지만 해석의 시야를 넓혀주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나는 라이프니츠가 주자학을 논평하는 대목에 눈이 갔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을 통해 주자학을 접한다. 선교사 롱고바르디는 '태극'(太極) 또는 '이'(理)가 비인격적 제1원리라고 전해주지만 라이프니츠는 그럴 리 없다며 태극은 인격적 주재자일 것이라 반박한다. 주자학에서 동아시아적 유신론의 함의를 읽어내려 하는 한형조는 <왜 조선유학인가>(2008년)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탁견을 호평했지만, 나는 여행기만 읽은 독자가 여행가의 오류를 지적하는 듯한 그 고집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스튜어트의 해석을 따라 보자면, 라이프니츠는 주자학이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되기를 원치 않았으리라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당장 한형조만 해도 주자학과 스피노자를 연관 지어 언급한다.) 중국의 정신 문명을 높이 평가했던 라이프니츠는 중국인들이 계시 신학을 받아들이기 전 순수하게 이성적 추론에 의해 도달한 자연 신학이 스피노자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껄끄러웠을 법하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영향 관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두 철학자 모두와 관계하면서도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 또 다른 주인공에게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제목에 나타나듯 제3의 주인공은 신이다. 신은 만물을 다스리는 제1원리이다. 적어도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17세기에 신은 골치 아픈 이름이 되었다"(290쪽). 신의 이름으로 가공할 학살이 자행된 30년 전쟁을 겪고 난 유럽인들에게 이제 신은 만물을 다스리기는커녕 인간 세계를 다스리기도 벅차다는 것이 드러났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모두 자신들의 철학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바랐다.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받고 내쳐진 이단자 스피노자는 "관용의 원리에 토대를 둔 세속 국가의 확립"(56쪽)을 꿈꾸었다. 분열된 것들의 조화와 화해 가능성에 대한 각별한 믿음을 지녔던 궁정 대신 라이프니츠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재통합"(143쪽)을 꿈꾸었다. 두 사람 모두 신이라는 주제와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내놓을 때 "그의 근본적인 목표는 시민 위에 군림하는 신권정체라는 국가 개념을 세속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구축된 새로운 국가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183~4쪽). 그런데 이를 위해 먼저 쳐내야 할 것은 낡은 신 개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대중이 믿는 미신적인 신성은 신권 정체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버팀목이다"(446쪽). 그래서 <에티카>에서 그는 자의적인 폭압을 행하는 인격신이 아닌 자연 그 자체의 이법으로서의 신을 내세운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통합 교회의 종교적 교리를 위한 철학적 토대를 제시"(435쪽)하려 했다. 교리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진 신을 이성의 바느질로 봉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정 체제를 통해 통합을 이루려 했던 그는 과학적 사유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 개념을 추구하면서도 지성과 의지를 지닌 전통적인 신 개념 또한 보존하려 했다.

"스피노자가 신권 정체의 압제라고 부른 바로 그것을 라이프니츠는 모든 가능한 정치 제도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여긴다. (…) 그는 자신의 신 개념이 문명을 지켜낼 것이라고 우리를 안심시킨다. 실제로 그 개념은 단일한 교회 아래에 통합된 기독교 공화국을 건립하기 위한 기반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446쪽)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라이프니츠는 최선의 세계를 창조해낸 예정조화의 신을 내세운다.

요컨대, 스튜어트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주로 신정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의 일환"(301쪽)으로 이해하며,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역시 유럽 통합을 위한 "매우 정교한 형태의 정치 수사학"(447쪽)이라고 본다. 그의 관점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래서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청되는 그런 제1원리가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책을 덮고 나서 해볼 수 있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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