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샬라는 열세 살로 가임 연령의 막바지다. 지금껏 사육사들이 숱하게 수컷들을 데려와도 엔샬라는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여왕인들 수컷과는 싸움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지, 절대 주도권을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엔샬라는 "동물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놀라울 만큼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 그 자체다."
사육사들은 엔샬라가 못됐고 무섭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향기를 좋아하는 엔샬라를 위해 사육사들은 아침마다 전시관에 향수를 뿌려준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수컷 에릭을 중매하기로 했다. 과연 엔샬라는 잉태할 수 있을까?
허먼은 왕이다. 우두머리 침팬지 허먼은 로우리 동물원의 일련번호 1번으로서 가장 오래 이곳을 지켜온 왕이다. 허먼의 유년기는 "찰스 디킨스와 찰스 다윈이 공동 집필한 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아프리카 야생에서 태어난 허먼은 밀렵꾼에 의해 어미가 죽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25달러에 어느 가정에 팔려 사람처럼 키워진 뒤, 결국 동물원에 기증되었다.
어려서 옷을 입고 포크를 쓰는 등 사람으로 자랐던 허먼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상대도 인간이다. 금발 여성의 맨 어깨를 보면 성적으로 흥분한다. 수의사가 진정제 화살을 잘못 쏘면 옳다구나 도망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허먼은 다시 쏘라고 가져다 줄 정도로 사람답게 행동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이 되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있다.
그런 허먼도 마흔 살이 넘었다. 알렉스라는 새끼가 쑥쑥 자라면서 무리의 세력 관계는 변하는 중이다. 과연 허먼은 끝까지 우두머리 자리를 지킬까?
2003년 8월, 로우리 동물원에는 왕과 여왕 외에도 1600여 종의 동물들이 그들을 돌보는 100여 명의 인간들과 함께 살았다. 그곳은 점잖고 소박한 동물원이었다. 플로리다의 멸종 위기 종들을 보호하는 일도 했다. 특히 부상한 매너티 64마리를 데려다가 치료한 후 자연으로 돌려보낸 게 자랑이었다.
그러나 로우리 동물원은 다른 동물원에게 관람객을 빼앗기고 있었다. 로우리 동물원에 있는 놀이 기구라고는 말 대신 멸종 위기 동물 모양으로 만든 회전목마 하나가 전부. 놀이동산이니 사파리니 하는 다른 곳들에 비해 시대에 뒤처졌다. 그래서 최고 경영자 렉스 샐리스버리는 큰 결심을 한다. 아프리카에서 야생 코끼리 네 마리를 데려와 새로 아프리카 동물관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코끼리는 관람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워낙 똑똑하고 독립적이며 민감한 동물이라, 데리고 있기가 까다롭다. 다른 동물원들은 오히려 코끼리 관을 닫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로우리 동물원에 코끼리가 한 마리도 없는 이유가 있었다. 10년 전, 풋내기 사육사 한 명이 아시아코끼리에게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음숄로, 머체구, 스툴루, 음발리. 네 마리 아프리카코끼리가 보잉 747기에 실려 스와질란드에서 미국으로 날아오게 된 것은, 그러니까 로우리 동물원의 야심 때문이었다. 야생 코끼리를 동물원에 넘기는 일을 두고 세상이 떠들썩했다. 동물 보호 단체들은 동물원에 폭탄 테러를 예고했다. 스와질란드 동물 보호 구역 측은 늘어나는 코끼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동물원행이 아니라면 인위 도태, 즉 선별적으로 몇 마리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변론했으나, 동물 보호 단체들은 그럴 바에야 안락사를 시키는 게 낫다고 대꾸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까지 나서서 대통령 경호를 방불한 호위 작전을 펼친 끝에, 네 마리 코끼리들은 동물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매일 수 킬로미터씩 걷던 야생 코끼리들은 과연 우리에 잘 적응할까? 최고 경영자의 동물원 확장 야심은 성공할까? 로우리 동물원의 미래는 코끼리들에게 달려 있었다.
▲ <동물원>(토머스 프렌치 지음, 이진선·박경선 옮김, 에이도스 펴냄). ⓒ에이도스 |
인기 있는 동물들은 트레일러를 타고 뉴욕까지 달려가서 전국에 방영되는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마케팅에 활용하면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최고 경영자는 '사파리 와일드'라는 제2의 동물원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순조롭지는 않았다. 어딘가부터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로우리 동물원은 상승만큼이나 급격한 추락을 맞는다.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틱할까. 여왕 엔샬라와 왕 허먼이 맞이하는 최후도, 경영자와 사육사들이 휘말리는 분란도, 마치 일부러 쓴 극본처럼 느껴진다. 이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하면 스포일러가 되겠다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30년 기자 경력의 저자 토머스 프렌치는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시종 담담하게 펼친다.
<동물원>은 동물원의 동물들과 인간들을 둘러싼 한 편의 거대한 탐사 보도다. 가령 프렌치는 동물원 경영자와 동물 보호 단체들의 갈등에서 양쪽 의견을 둘 다 소개할 뿐,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동물원을 둘러싼 딜레마가 어떤 이데올로기적 치장도 없이 맨얼굴로 독자에게 와 닿는 것은 저자의 그런 중립적 시각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동물원은 존재부터가 딜레마다. 인간은 손수 야생에서 동물들을 잡아다 우리에 가뒀으면서도 동물들이 폐쇄 공간에 감금된 모습을 보기는 싫어한다. 인공 폭포나 가짜 새똥으로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지만, "지능이 조금이라도 있는 동물이라면 가짜 새똥 따위에 속지 않는다."
그렇다고 동물원이 마냥 악한 존재일 리 없다. 스와질란드 코끼리를 동물원에 가두는 대신 안락사 시켜야 한다는 동물 보호 단체들의 주장에 나를 비롯하여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원이 새끼들을 마케팅에 활용하여 관람객을 불리는 것이 정서적으로 불편하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멸종 위기 종을 인공 수정으로 번식시키는 행위 자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동물원이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동물들은 동물원에 있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동물원의 운영에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동물원을 만들고, 구경하고, 반대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일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변덕, 가끔씩 발휘되는 지혜가 동물원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프렌치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들이 로우리 파크에 오게 된 사연을 한데 모아 보면, 동물들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잃어버린 야생성에 대한 인간의 열망. 자연을 찬미하면서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숲을 초토화시키고 강을 오염시켜 동물들을 멸종 위기에 몰아넣으면서도 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 이 모든 것이 포로들의 정원에 전시되어 있었다." (47~48쪽)
이런 역설은 사육사들이 제일 잘 안다. 그러나 사육사들은 야생은 자유이고 동물원은 구속이라는 이분법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자유라는 개념은 애초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인구 과잉의 지구에서 멸종 위기에 시달리는 동물들에게 야생의 삶인들 진정한 자유이겠는가. 자연은, 그리고 동물은, 자유나 정의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스와질란드 동물 보호 구역의 운영자가 말했듯 "대자연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생존에 관해 말하자면, 동물원은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로우리 동물원에서 인공 수정을 통해 아기 코끼리가 태어났을 때 동물원을 둘러싼 논란이 일시적으로 잠재워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생명은 논쟁이 아니다. 배고픔에 떨며 이 세상에 나온 생명을 어느 누가 밀어낼 수 있을까." (288쪽)
ⓒ프레시안(손문상) |
<동물원>은 인간들뿐 아니라 동물들의 마음까지 취재하려 노력한 저자가 고마워지는 책이다.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동물원의 사회·문화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적절한 선택이 아니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동물원을 섭렵하지도 않았다. 한 동물원의 운명 공동체인 동물과 인간을 흡사 자연에서 야생 동물 관찰하듯이 지켜보고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포로들의 정원' 동물원에 관해서 이보다 더 완전한 이야기가 다시 쓰일 수 있을까. 나는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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