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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은 '남녀평등', 이남은 '공창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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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은 '남녀평등', 이남은 '공창 논란'

[해방일기] 1946년 7월 21일

1946년 7월 21일

일기 내용이 38선 이남의 상황에 너무 치우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북 상황에 관한 자료와 연구 성과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 해방 후 1년이 지나는 동안 이북보다 이남에서 새로운 일이 더 많이 일어났다.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조선의 중심지인 서울이 이남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하나고, 소련보다 미국의 정책에 가변성이 컸다는 사실이 또 하나였다.

1946년 여름까지 이북 지역의 정치적 변화를 요약한 대목을 찰스 암스트롱의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에서 뽑아 보았다.

북한에서 당과 국가는 대중적인 방법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토지 개혁은 북한 사회의 가난한 농민 대다수가 공산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일성은 전형적인 레닌주의 방식인 소수 엘리트의 전위 정당을 통한 활동보다 사회의 빈곤하고 소외된 계층 사이의 지지를 모으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는 김두봉으로 대표되는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그가 주도하는 신민당도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소련식 표준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년간 대중적 반일 투쟁을 위해 활동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경험을 반영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인민 대중들은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정치적 협조로 얻는 이익뿐만이 아니라, 정치 동원과 조직화를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고 자각하면서 매우 새로운 차원의 집단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북한의 대중들은 법률 문서, 구직 원서, 학력 기록, 그리고 정치·사회적 조직 가입 기록 등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 정체성, 즉 새로운 사회 분류에 의해 재규정되었다. 이는 여성, 빈농, 노동자 및 청년 등이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대기 중인 자각 집단임을 의미한다. 즉 근대 국가가 그들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들의 지지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구성된' 범주에 속하였다.

예를 들어, 여성은 조선 역사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존재하였으나,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또한 '해방'되어야 할 사람의 범주로서의 '여성'이라는 개념은 단지 19세기 이후에 정립된 생소한 것이었다. 노동자들 역시 식민지 시기에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특정한 집단 이해를 가진 집단으로서의 빈농의 경우도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이는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 의하여 부분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청년층이라는 어린이와 성인 사이의 모호하고 폭발력 강한 범주는 대중 교육의 새로운 대상이었고, 또한 반식민지 운동, 우익 정치 조직, 그리고 공산주의 동원을 위한 힘의 근원이었다. (…) 이와 같은 각각의 집단들은 새로운 정치 체제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광대한 사회 조직 속으로 흡수·동원되었다. (<북조선 탄생>, 121~123쪽)

이남 지역에서 두드러진 정치적 변화가 신탁 통치 반대의 명분, '영수' 중심의 정치 조직, 미군정의 지원, 군중 동원과 흑색선전 등 피상적인 요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동안 이북 지역에서는 소외 계급의 정치적 자각을 촉진하는 사회 혁명을 통해 정치의 대중적 기반이 확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이 장악한 공산당과 중국에서 돌아온 독립동맹이 손잡고 여타 정파를 압도하는 정치적 변화의 주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공산당의 주도권 장악을 지원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남에서 미군이 한민당과 극우파의 득세를 위해 군정청과 경찰의 요직을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련군은 공산당이 인민위원회에서 우세를 차지하도록 배경 조건을 만들어주었을 뿐이지, 우격다짐으로 빼앗아준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도 통일전선을 통해 협조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가급적 소련군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1945년 10월 8~10일에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리고 뒤이어 5도행정국이 출범했다. 이북 지역 정치 조직의 출발점인 이 단계에서 소련군은 조선민주당과 공산당의 통일 전선을 지원했다. 이 연합 체제가 1946년 초 조만식의 반탁 고집으로 좌초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자료에 소련군이 조만식에게 '찬탁'을 요구했다고 되어 있는데 정황에 맞지 않는 것이다.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일반적 지지만을 요구하며 신탁 통치에 대한 의견은 보류할 것을 부탁했을 정황이기 때문이다. 소련군과 공산당 쪽의 통일 전선에 대한 필요가 컸기 때문에 통일 전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신탁 통치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서둘러 요구하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것 같지 않다. 3상 회의 전체에 대한 찬부와 신탁 통치에 대한 찬부가 혼동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하기 힘들다.

아무튼 조만식과의 충돌 외에는 크게 두드러진 문제없이 이북 지역의 정치 조직이 진행되어 1946년 2월 8일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 결성에 이르렀다. 신민당을 창당할 독립동맹 세력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비된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통일 전선을 중심으로, 기존의 인민위원회 외에 조선민주여성동맹(1945년 11월 결성), 직업동맹(1945년 12월 결성), 농민동맹(1946년 1월 결성)과 북조선민주청년동맹(1946년 1월 결성) 등이 그 기반이 되었다.

임시인위 결성 바로 다음 달에 시행된 토지 개혁에서 임시인위의 정책 집행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토지 개혁은 해방 조선의 개혁 과제로서 광범위한 합의의 대상이었지만, 방대한 사업인 만큼 시행 방법에 논란의 여지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이남 지역의 논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북 지역에서 이 방대한 사업을 불과 한 달 내에 이뤄낸 것은 대단한 집행 능력이었다.

토지 개혁은 워낙 해방 조선에서 널리 관심을 끌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남 지역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연구자들의 큰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큰 정치적 함의를 가진 개혁 조치들이 임시인위에 의해 속속 집행되었다. 1946년 6월 24일 발포된 '노동법령'과 7월 30일 발포된 '남녀평등권법령'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찰스 암스트롱은 노동법령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로운 노동법은 8시간 노동, 정해진 1일 식량 배급, 표준화된 임금표, 2주간의 유급 휴가, 단체 협상 권리, 그리고 위험한 작업장에서의 야간 노동 금지 등을 요구했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법률은 노동 운동이 투쟁했던 요구들, 그리고 식민지 산업화 과정에서 부정되었던 요구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노동 개혁에 대한 정권의 강조가 비록 물질적 혜택이 즉각적으로 뒷받침된 것은 아니었지만, 북한 정부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자료들조차 "북한 주민들의 눈에 노동 계급의 지위를 어느 정도 제고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북조선 탄생>, 144~145쪽)

이남에서는 이 시점에서 노동 문제에 관해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던가?

상무부 노동국장 李大偉 발표에 의하면 군정청 요청에 의하여 재일본연합군최고사령관의 노동정책고문으로 있는 노동고문사절단 중 2명이 2일 경성에 도착하였는데 이 2명은 전시동원 사무국에서 노동력 노동문제상담역으로 있던 파울·스텐지필드 단장과 국립전시노동위원회 조선위원장으로 있던 일리암·H·모파산 박사라고 하는데, 이들은 노동계의 제반 문제 특히 노동 관계, 노동자 보호 제도에 중점을 두고 조사할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14일자)

이북에서 임시인위가 틀 잡힌 노동법을 내놓고 있는 시점에서 미군정은 노동 문제 조사를 위해 전문가를 불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인위와 직업동맹 사이의 협력 관계와 달리 군정청이 전평을 대결 상대로 여기고 있던 관계도 이 진도 차이에 일조했을 것이다.

여성 문제는 농지 문제나 노동 문제처럼 부각되어 있지 않았던 것인데, 잠재적 의미가 큰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착수했다는 것은 당시의 이북 정치 체제를 높이 평가할 일이다. 남녀평등권법의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제1조. 국가 경제 문화적 사회 정치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여성들은 남자와 같은 평등권을 가진다.
제2조. 지방 또는 국가 최고 기관에 있어서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으로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3조. 여성들은 남자와 동등의 노동 권리와 동일한 임금과 사회보험 및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어성들은 남자들과 같이 자유 결혼의 권리를 가진다. 결혼할 본인들의 동의 없는 비자유적이며 강제적인 결혼은 금지한다.
제5조. 결혼 생활에서 부부 관계가 곤란하고 부부 관계를 더 계속할 수 없는 조건이 생길 때에는 여성들도 남자와 동등의 자유 이혼의 권리를 가진다. 모성으로서 아동 양육비를 전 남편에게 요구할 소송권을 인정하며 이혼과 아동 양육비에 관한 소송은 인민재판소에서 처리하도록 규정한다.
제6조. 결혼 연령은 여성 만 17세, 남성 만 18세부터로 규정한다.
제7조. 중세기적 봉건 관계의 유습인 일부다처제와 여자들을 처나 첩으로 매매하는 여성인권 유린의 폐해를 금후 금지한다. 공창 사창 및 기생 제도를 금지한다.
제8조.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의 재산 및 토지 상속권을 가지며 이혼할 때에는 재산과 토지 분배의 권리를 가진다.
제9조. 본 법령의 발포와 동시에 조선 여성의 권리에 관한 일본 제국주의 법령과 규칙은 무효로 한다.
본 법령은 공포하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46년 7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 (박현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기의 여성 정책',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419~420쪽에서 재인용)

남쪽에서 여성 문제 논의는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을까? 1946년 5월 27일 '부녀자 매매 금지령'이 군정청 법령 제70호로 발포되었는데, 6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관련기사가 실렸다.

"다시 뻗는 포주의 마수, 대책 강구가 절대로 긴요"
법령 제70호로서 부녀자의 매매 행위가 일소되고 기왕의 계약도 무효로 되어 노예와 같이 취급받던 불우한 부녀들은 해방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령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아야 할 유곽의 창기들 앞에는 아직도 그 거취에 확연한 길이 터지지를 않는 모양이다. 즉 이번 공포된 법령만으로써는 아직 공창(公娼)이 폐지되는 것도 아니어서 포주와 창녀 사이에 특수한 사정은 법령 제정의 근본취지와 어긋나는 말 못할 심정을 빚어내고 있다.

법령으로 공창제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니 계속하겠다는 포주가 있는가 하면 해방되어도 오도 갈 데도 없는 창녀를 다시 머무르게 유인하려는 경향도 있다. 또한 이와 반대로 공창을 폐지하면 사창이 늘게 되므로 폐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등 공창 문제를 싸고 파생하는 문제는 지나칠 수 없는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터이다. 어쨌든 공창 제도 그 자체가 세기적인 죄악으로서 인육 매매를 공공연히 인정한다는 것은 문명국가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제도로 이를 단연히 철폐할 새로운 대책 강구가 절대 긴요하다.

◊ 최 경무부차장 담
경무부 최 차장은 이 공창 제도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령의 문면을 통해 보면 노예 대우를 받던 여성 매매를 금지하고 이에 유사한 폐풍을 일소하는 데 있으니 장차는 공창 폐지까지도 염두에 두고 일해야 할 줄 안다.
어쨌든 불우한 여성들도 이 기회에 기운을 얻어 자기의 인권을 찾고 자유민으로서 생활 방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런 방면의 영업을 하는 업자들도 법령의 좋은 취지를 이해하여 되도록이면 해방되는 여성들의 앞길에 지장이 없도록 온정으로서 처결을 하여 주기를 바란다. 공창을 전연 안 둔다든가 존속시킨다든가 업자의 직업 보도에 대하여서는 따로이 그때 협의하여야 할 줄 안다."

◊ 조선여자국민당수 임영신 담
"공창제 또는 이에 유사한 제도를 설치시켰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큰 동시에 여성의 자각이 부족하였던 만큼 이 기회에 온 여성의 자각을 촉진하는 바이다. 따라 금후는 법적으로 공창 제도를 단연 폐지하기로 주장하는 바이다.

공창제가 나쁜 이유로는 성병으로 사회의 해독을 끼치고 나아가 가정생활을 파괴하며 나아가서는 자녀 교육에 큰 지장이 있을 뿐 이로운 점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금후는 이 제도로서 해방된 여성에는 직업을 주도록 하여 다시금 마굴과 같은 인육시장으로 여성이 나오지 않게 나올 수 없게 사회의 힘으로 방지 선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리함으로써 저절로 공창과 사창은 조선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줄 안다."


여성의 적극적 권리는커녕 최소한의 보호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판에 경찰 고위 간부는 "업자들의 온정"을 바라고 있다. 게다가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여성 정치 참여에 앞서 나선다는 임영신은 "여성의 자각"을 촉진하기에 바쁘다. 이북의 임시인위가 개혁의 일거리를 열심히 찾아 나서고 있는 시점에서 이남의 군정청은 닥치는 일거리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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