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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산행에 준비물은 '빈 도시락'! 그 이유는…

[꽃산행 꽃글·10] 텅 빈 줄기, 빈 도시락, 빈 몸의 합창 소리

지난 4월 한 달 동안 목요일을 지나 주말로 기울어질 무렵이면 은근히 기다려지는 한 통의 편지가 있었다.

그것은 강남구 일원동 한결빌딩 302호의 (주)동북아식물연구소에서 발송하는 편지였다. 그것은 우표의 낙인도 없이 우체부의 수고도 없이 곧바로 인왕산 아래 통인동의 내 컴퓨터로 순식간에 배달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신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알뜰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간이 빨리도 가는군요. 마지막 야외 실습인 태백산 교육이 진행됩니다. 수료식도 있을 예정입니다. 손님 몇 분이 동참해 축하해 주실 예정이시고요. 마지막 실습답게 하동 분들도 합류하여 좋군요. 거리를 마다않고 배움을 찾아오시는 열정이 부럽기만 하군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이번 파라 교육을 통해 얻으신 모든 것들이 하시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길 기원합니다.

제6기 파라 교육 태백산 야외 실습(제4차)을 다음과 같이 실시합니다. 날짜 : 2011년 4월 23일(토)~24일(일). 모이는 장소와 시간 : 23일 오후 3시 대청역 3번 출구 앞. 준비물 : 빈 도시락, 학습 준비물, 간식, 세면 도구, 장갑, 방한복. 권희정 드림."


등산하는 사람을 이렇게 나눌 수도 있겠다. 무지 빨리 걸음으로써 산꼭대기에 오르는 데 의미를 두는 이들. 이왕 높은 산에 왔으니 천천히 걸으며 주위 경치도 감상하고 맛난 음식 먹는 것에도 의미를 두는 이들. 두 그룹을 상대로 여론 조사까지 할 것이 무어 있겠나. 그저 각자 취향대로 등산했다가 하산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내 둔한 짐작으로도 후자가 단연 대세일 것 같았다.

위에 적은 바대로 나는 4월 한 달 동안 매주 집중적으로 색다른 산행을 했다. 그것은 꽃산행이었다. 서울 가까이에 있는 천마산을 시작으로 먼 산을 갔다. 장성 백양사를 품고 있는 백암산, 순창의 회문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백의 태백산. 그 험한 산을 가는 데 필요한 준비물 중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멀고 높은 산을 가는 데 체력을 보강할 영양식도 모자랄 판에 빈 도시락이라니! 일반 등산객이 보기에 참 이상한 품목이 아닐 수 없었다.

유일사 입구에 내려 산행을 시작하고 삼백 걸음 정도 걸었을까. 문득 현진오 박사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근방에서 꽃냄새가 나질 않습니까?" 현 박사가 코를 내밀며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그 말에 화답하듯 홀아비바람꽃, 선괭이눈, 큰뱀무 등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우리 일행의 발길을 붙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앉았다, 구부렸다. 엎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서 가파른 등산로, 간벌을 하고 있는 임도, 너덜겅, 계단, 바윗길 등을 오르고 올랐다. 그 사이사이에서 처녀치마, 노루귀 등을 관찰했다.

▲ 처녀치마. ⓒ이굴기

▲ 노루귀. ⓒ이굴기

오늘 산행에서 단연 돋보이는 꽃은 한계령풀이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계령풀'로 명명된 식물이다. 만주, 아무르 지방에서도 자생하는 세계적인 희귀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북부의, 높은 산에서, 드물게 자란다. 태백산의 어느 한 골짜기를 치고 올라가 백두대간의 능선에 당도하니 그 귀하다는 한계령풀 군락이 활짝 우리를 맞이했다.

▲ 한계령풀. ⓒ이굴기

천제단으로 가는 길. 태백(太白)이라 그런지 능선에는 묵은 눈이 아직도 곳곳에 있었고 낙엽 밑에는 얼음이 단단했다. 어떤 구간은 눈 녹은 물로 길이 축축했다. 더디 오는 봄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주목이 긴장하며 서 있었다. 이곳은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분다. 나무의 팔들이 모두 구부러지거나 한쪽으로 쏠려 있다. 지금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천둥과 벼락이 숨어있는 곳이라서 그런가. 질컥이는 바닥보다 텅 빈 공중이 나무에게는 더 시련인 것 같았다.

▲ 주목. ⓒ이굴기

아무리 식물 공부를 한다고 식물들과 가까이 하고 싶지만 엄연히 서로 몸은 아주 다르다. 식물에게는 입이 없다. 대신 잎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 잎의 뒷면에는 기공이 있어 그곳으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놓는다. 나는 야무진 입을 크게 달고 있다. 그리고 입술 안쪽에는 이가 용도도 다양하게 무려 28개!

천제단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열었더니 빈 도시락이 아니었다. 태백산민박촌 위 당골의 길목식당에서 간밤의 숙취를 북엇국으로 달래고 난 뒤 내 손으로 직접 담은 밥과 반찬이 그곳에 빼곡했다. 두부조림, 멸치볶음, 오이절임, 김치, 계란말이, 곰취장아찌.

산중 도시락치고는 근사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참이슬 한 잔. 한 움큼 입안에 넣은 뒤 이들을 죄다 동원해서 끊고 섞고 돌리고 찧고 빻고 씹고 우물거린 뒤 목구멍 너머로 보내주었다. 이슬 먹고 자란다는 풀들이 보자면 참 그악스러운 식욕이라 하겠다.

이윽고 도시락을 다시 빈 도시락으로 만든 뒤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오전과 거의 비슷한 동작을 되풀이하면서 거의 다 내려왔더니 백단사 근처의 약수암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서 나뭇가지 사이로 요사채가 보이고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났다. 좁은 함석 굴뚝을 빠져나온 흰 연기는 하늘의 깊이를 재면서 더욱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연기>를 떠올리는 기막힌 풍경이었다.

호숫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 집 한 채 /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 이 연기가 없다면 /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 /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 약수암. ⓒ이굴기

약수암 근처에는 호수 대신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이 개울가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물푸레나무, 귀룽나무, 회나무, 물참대, 고광나무가 그들이었다. 비록 저 연기가 없다 해도 나는 적막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식물 공부에 관한 한 나보다 훨씬 윗길인 선배님들한테 이름을 묻고 적으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중에서 특이한 게 물참대였다. 일행 중 한 분이 전지가위를 꺼내 마른 줄기 끝을 조심스레 자르더니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보세요. 이 물참대의 줄기는 속이 텅 비어 있어요!"

▲ 물참대. ⓒ이굴기

▲ 물참대 가지의 빈 구멍. ⓒ이굴기

등산할 때에는 없었는데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겨난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배낭에서 쇠 젓가락이 빈 도시락의 벽을 긁으면서 내는 소리였다. 시골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등에서 나는 그 소리는 책보 매고 등하교할 때, 필통에서 연필들이 내는 소리와 꼭 같았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물참대 가지의 텅 빈 구멍을 보면서 내 몸도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득 배가 고파진 것이다. 물참대 가지의 빈 구멍, 배낭 속의 빈 도시락 그리고 나의 빈 몸. 갑자기 허기도 왕창 몰려오고 다리도 무지 뻐근했지만 그 텅 빈 것들이 어울려내는 합창 소리가 등을 떠밀어주었다. 아무리 배가 등가죽에 붙으려 해도 땀은 계속 나는 법이다. 내려올수록 배가 더욱 홀쪽해졌다.

그통에 몸도 덩달아 공명통이라도 되었을까. 아래로 걸음을 옮길수록 소리가 더욱 커졌다.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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