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나는 개를 무척 무서워하였다. 개를 무서워하다 보니 어쩌다 개 키우는 집 방문하는 일이 생기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대문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납게 짖어대는 개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꼬리를 살랑대며 친한 척 다가오는 작은 강아지도, 소위 족보 있다는 견공도 나에게는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내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강아지 주인에게 실례일 것 같아 귀여운 척 억지로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보지만, 그때 전해지는 뜨듯하면서 물컹한 감촉은 얼마나 내 오금을 저리게 했던지….
그런 나에게 어느 날 팔자에 없이 개를 키우게 되는 우연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덕에 지금은 개에게서 남다른 감정을 갖곤 한다. 처음엔 가족들이 개를 좋아하는 바람에 억지 춘향이로 개 키우는 데 승낙을 하였지만, 내 옆에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고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멀찍이서 위협적인 몸동작을 하며 지냈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면서 아주 천천히 개에 대한 친밀한 감정이 생겨났고 지금은 그 뜨듯하고 물컹한 감촉이 예전처럼 아주 싫은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도 개와 친하게 되었고 개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종종 자부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동물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가 늘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간식을 줄 때나 사료를 줄 때 산책을 할 때 등 시시때때로 나는 나의 행동이 개 중심인지 내 중심인지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료를 먹이는 것이 개의 건강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용변에서의 냄새를 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가 싶고, 개의 마음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개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개를 집에서 키우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동물을 아낀다는 미명하에 옷을 입히고 미용을 하며 자주 목욕시키고 신발을 신기는 행동들이 과연 동물의 입장을 헤아린 것인가를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동물 애호가
▲ <동물 해방>(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인간사랑 펴냄). ⓒ인간사랑 |
그럼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일은 동물에게도 결코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즉 동물들도 생명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나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인간을 먹을 수 없듯이 동물을 먹을 수 없으며 인체 실험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동물 실험도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동물에게 하는 것은 성차별이나 인종 차별과 마찬가지 의미의 종 차별주의라 한다. 이 정도면 동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며,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피터 싱어의<동물 해방>(김성한 옮김, 인간사랑 펴냄)은 이런 관점을 견지한다. 그는 "해방 운동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게 있다면 그것은 효과적으로 지적을 받아 깨우치지 않는 이상 어떤 집단을 대하는 태도에 숨겨진 편견은 의식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싱어에 의하면 "해방 운동은 도덕적 지평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까지는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었던 관행들이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의 결과임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제안한다.
동정적으로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과 동물의 이익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그들을 먹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을 수 있다.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에는 반대하면서도 고통 없이 죽이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았고 즉각적이고도 고통 없이 도축된 동물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아닌 동물들에게 관심을 갖는 동시에 그들을 계속 먹을거리로 사용하는 것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 우리가 아무리 연민을 느낀다 하더라도 결국 돼지, 소, 그리고 닭을 우리가 이용할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현대인의 육류 소비량은 엄청나다. 명절이나 제사 때만 목구멍에 기름칠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눈만 돌리면 고기집이 즐비한 요즘 세상에서는 가히 신화적이다. 동네 어귀마다 치킨 집이 있어 전화 한 통이면 집에 가만 앉아서도 닭다리를 뜯을 수 있고 삼겹살은 대학가에서 즐겨 찾는 흔한 안주 메뉴가 될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된다.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을 싸가서 영웅이 되었다던 선배들의 이야기는 가공의 허풍처럼 들린다. 아직도 지구의 한편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육류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물 사랑하는 데에도 방법이?
달포쯤 되었을까?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통식 농장의 자연스런 조건을 박탈당한 채 공장식 사육장에서 사육당하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을 방영하였다. 거기에는 태어난 지 하루 된 병아리들이 창문 하나 없는 인공 부화장에서 사육당하는 모습, 열악한 환경에서 자연적 본성을 펼치지 못하도록 감금된 어미 닭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서로의 꼬리를 무는 돼지와 그 '나쁜 습관'의 제거를 위해 꼬리 잘림을 당하는 돼지들, 비좁은 외양간에 감금된 채로 일생을 살아가는 송아지의 모습 등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만이 아니라 다른 종의 구성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 더 나아가 그 관심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한다는 점에서 피터 싱어의 논의는 분명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철학적 경향과 만난다.
싱어가 종 차별주의를 말하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논의할 때 근거로 두는 것은 이성이다. 그러기에 그는 동물의 이익을 위해 일할 때나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논의할 때 비합리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싱어가 동정심 같은 감정을 비판하고 이성에 기반을 둘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감정은 변화무쌍한 것이고 잘못된 믿음에 기초할 수 있으며 비판과 반성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정심은 누구나 다 갖는 것도 아닌데, 어떤 사람은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소를 보고 동정심을 느끼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싱어는 또한 우리가 어떤 고통 받는 동물을 접하게 되었을 때 동정심을 느끼고 그래서 그 동물을 돌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그 감정이나 행위는 사적인 것에 그칠 뿐이며 보다 확대되어 보편적인 윤리를 말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고통 받는 동물에게서 동정심을 느끼고 그래서 돌봄의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와 친한 사람, 같은 지역, 같은 민족, 같은 인종, 같은 성별의 사람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에게 관심을 갖고 동물의 고통을 중지시키려는 노력과 더불어 동물에게도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할 때 이성이나 권리에 입각한 논리들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감정이 지니는 한계성 때문에 감정이 불필요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윤리학에서 감정은 이성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추론과 더불어 동정심이나 돌봄과 같은 감정 역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공장식 사육장이나 도살장을 방문한 사람이 거기서 잔인하게 고통 받는 동물의 현실을 보았다고 할 때 느끼는 그 느낌은 현장을 보지 않았을 때와는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장에서 느낀 사적인 동정심이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서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까지 도덕적 추론을 하고 그것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논의가 가능해진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많은 신경학적 특히 해부학적 증거를 통해 증명된다. 동물들이 비록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고통을 무시해도 좋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생아 혹은 한 살짜리 어린 아이가 언어로 자기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 간주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들이 느낄 고통에 주목하면서 채식주의가 될 것을 말하는 논리는 어딘가 빈틈이 있어 보인다. 채식의 주재료인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곧바로 봉착하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동양적 사고를 떠올려 보게 된다. 유교나 불교에서 생태계 문제는 먹고 먹히는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먹이며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 만물은 한 몸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사물의 고통을 느낄 줄 알고 하나의 기(氣)로 이루어져 있기에 동물, 식물은 인간을 먹이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 식물을 먹을 수 없다는 논의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몸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먹이고 치료하는 감응, 사랑, 상생의 관계가 된다. 중국 명대의 유학자, 왕양명이 말하는 만물일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바람, 비, 이슬, 우레, 해, 달, 별, 새, 짐승, 풀, 나무, 산, 냇물, 흙, 돌 등은 원래 사람과 한 몸이다. 그러므로 오곡과 금수 같은 종류의 것은 모두 사람을 기를 수 있고 약초나 돌 같은 종류의 것은 모두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이것들은 다만 일기(一氣)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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