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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진짜 주인은 '축축한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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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진짜 주인은 '축축한 컴퓨터'?

[프레시안 books] 데이비드 이글먼의 <인코그니토>

맙소사.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한밤중에 옛 애인의 전화번호를 누르다니. 화가 난 직장 상사 앞에서 그의 별명을 내뱉다니. 이번 달 카드 값도 감당이 안 될 지경인데, 또 결제 버튼을 누르다니. 누구나 어이없는 행동을 하고 나면 이렇게 외치곤 한다. 내가 정말로 그랬단 말야?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일상의 많은 순간들이 우리의 판단이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럴 때면 한번쯤 되묻게 된다. 내 행동의 주인은 과연 나일까?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쳤을 때만 그런 의구심이 드는 것은 아니다. 전자기 방정식을 만들어 낸 위대한 수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죽기 전에 방정식을 발견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의 그 무엇'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 역시 비슷한 고백을 했다. "내 머릿속에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인코그니토>(김소희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라는 책을 썼다. '인코그니토(Incognito)'는 '익명의, 신분을 숨긴'이라는 뜻으로, 이글먼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는 익명의 누군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 정체는? 답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다름 아닌 우리의 '뇌'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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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코그니토>(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소희 옮김, 윤승일 감수,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뇌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지 그 내막을 밝히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글먼은 뇌에게 '축축한 컴퓨터'라는 애칭을 붙여준 다음, 이 신비한 기관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프로그램을 탑재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뇌는 인간과 함께 진화하면서 최적화되어, 모든 행동과 생각을 조종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마치 좀비 시스템처럼.

뇌 조직을 다치면 신체의 일부가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뇌가 신경계를 관리하는 중추 기관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뇌가 희망, 두려움, 성적 취향, 유머 감각까지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감정이나 생각을 정신적 영역으로 여겨 온 까닭이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계보는 정신적인 것의 위상을 확고히 해 놓았다. 정신은 인간 고유의 특질로 간주되었고, 육체는 명료한 정신을 방해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인간 중심적인 사상이 지배적이던 19세기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21세기에도 '생각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패러다임의 효력은 끝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니 인간의 사고나 감정이 신경계의 처리 과정과 다를 바 없이 이루어진다는 논리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분석에 의하면 우리가 정신적인 영역으로 간주해 온 많은 것들이 사실은 지극히 생물학적인 법칙에 따른 결과다. 우리는 어떤 외모를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그것은 외적인 기준이나 심미안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호르몬 변화가 드러내는 건강한 가임기의 신호에 가깝다는 것이 이글먼의 설명이다. 뇌에 깊이 새겨진 종족 번식 프로그램이 생물학적 목적에 따라 이성에 대한 호감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진화심리학에 입각하면, 인간의 모든 감정과 판단에는 목적이 있다. 연인에 대한 낭만적 감정이나 엄마가 아기에게 갖는 모성애도 사실은 '맹목적'인 감정이 아닌 셈이다. 이성에 대한 호감은 종족 번식을, 모성애는 종족의 보존과 번영을 위한 장치다. 뇌가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유산처럼 대대로 물려받은 소프트웨어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들을 수면 아래서 작동시켜왔다는 것이다.

이글먼은 다른 많은 진화심리학자들처럼, 인간의 내재된 본능을 설명하기 위해 미의 기준이나 짝짓기, 불륜의 심리 등을 예로 든다. 결국은 모든 것이 진화의 과정에서 촉발된 유혹과 갈망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재미있기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재미있다고 해서 언제나 유쾌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와 감정의 역학 관계들을 경제적이고 기계적인 유전자의 진화 프로그램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게다가 꽤 설득력도 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이 어떤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욕망을 수백만 년 동안 구축된 도구적 본능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성범죄나 가부장적 편견과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 역시 너무나 쉬워질 테니까.

따라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차원에 있다. 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능케 했다는 점 말이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인지의 충격을 경험해 왔다. 그중 기념비적인 충격을 꼽으라면 역시 천동설의 붕괴가 아닐까? 161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입증해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지구인들이 느꼈을 근원적인 불안감, 그것은 아마도 무대의 주인공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엑스트라로 전락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글먼은 흥미롭게도 이야기의 진정한 핵심을 다음 대목에서 찾는다. 인간이 잃어버린 자기중심성이, 미지의 우주를 향한 더 큰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글먼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 이후 인간 내면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고 보았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했고,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이 행동을 조종할 만큼 대단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심지어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독립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과학이라는 재판관이 한결 똑똑해졌으니, 의식과 자유의지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한다는 전통적인 믿음은 천동설에 대한 믿음보다 한결 더 가볍게 깨어질 수밖에.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뇌'라고 이미 대답했지만, 다른 말로 해보자. 한마디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거대하고도 복잡한 '생물학적 네트워크'인 것이다. 도파민에 의해 웃고, 페로몬에 의해 유혹 당한다. 에스트로겐을 주입하면 성적 충동이 강해지고,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작은 알약의 효력을 생각해 보라. 인간은 이 모든 생물학적 혼합물의 변동들로 인해 조종된다. 즉,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활동하는 고유한 '나'라는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신경과학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다수의 군중이 존재한다고 한다. 마치 여러 개의 정당들이 활동하듯이, 이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우리의 심리와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제 짐작이 갈 것이다. 간혹 우리 귓가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던 악마와 천사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우리가 그토록 자주 '지름 신'이라고 일컬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즉, 단 하나의 완전한 '나'라는 것은 없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왠지 혼란은 늘고, 권위는 줄어든 것 같다.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무한한 상상력과 사유의 가능성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은 '뇌'라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의 근원임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철학과 예술의 장을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나와 타자로 이분화 되던 시대의 고리타분한 서정적 자아는 없다. 시적 화자는 유물론적 상상력으로 인해 발랄하게 분해되고, 해체되고, 변신 가능해졌다.

우리는 아픔 없이 잘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섞일 수 있습니다.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별빛. (…) 썩은 과일은 술이 됩니다. 우리는 만두가 됩니다. 끓는 물에 둥둥 떠오를 수 있습니다. 환하게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김행숙, '초대장' 중)

그러나 환원주의 유물론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이글먼이 주장하는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존재의 핵심이 뇌에 있다고 해서, 의식이란 무용하고 헛된 것이라고까지 여길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뇌에 내재된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인 것이다. 프로그램이 엉켰을 때, 즉, 결정을 내리기 힘든 어떤 순간이 발생했을 때, 인간은 '중재'라는 프로그램 또한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의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을 회로에 새겨야 할지 결정하는 것도 의식의 몫일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뇌 과학이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 있다. 이글먼은 뇌에 이상이 생길 경우 뇌의 운영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뇌 손상을 입은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달리해야 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범죄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방안으로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같은 뇌 트레이닝을 제안하는 대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갈망의 절제를 그래프로 훈련시키다니, 과학자의 순진한 시선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윤리적 잣대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방법을 제시하는 그의 태도에서 과학자로서의 신념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라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애초의 질문은 이제 어느 정도 풀린 것일까? 인간은 정말로 세포, 혈관, 호르몬, 유액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로 정의 내려야 할까? 마음은 정말로 심장이나 영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뇌는 마음의 중심부일까 가장자리일까?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이글먼의 말마따나,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아직도 의문으로 가득한 영역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이후 인간의 존재가 새롭게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이라고 표현한다. 누가 그랬던가. 명백히 밝혀진 사실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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