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그 라이만 감독의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 <본 아이덴티티>. ⓒnaver.com |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진짜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 경험을 갖고 있다. 또 정체성이란 개인의 화두일 뿐 아니라, 한 공동체의 법과 제도 안에서 한 개인이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와 같은 아주 사회적인 질문도 던진다.
지난달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열린 '청춘의 고전' 네 번째 시간에는 <본 아이덴티티>를 통해서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 강의가 진행됐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는 '정체성'을 화두로 개인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소개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정은 교수에 따르면, 자기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는 △사고의 동일성, △육체의 동일성, △타인의 인정이 있다.
과거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자라서 부정할 수 있듯이, 우리는 사고와 가치관, 감정과 외모까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변화 가운데서도 여전히 동일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정신의 기억이다.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했던 다른 행동을 내 기억 속에서 연결할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의 '내'가 전부 하나의 '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케인의 행적을 따르는 과정에서 본은 비록 정신의 기억은 잊어버렸지만 전투 능력과 경계하는 습관 등 '몸'이 과거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으로서 암살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그에게 직업적인 습관이 몸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육체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육체적인 기억만으로 내가 나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외따로 떨어져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증거'는 바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들의 인정이다.
<본 아이덴티티>에도 타인들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본을 기억하면서, 그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그를 본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를 케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를 본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본이고, 케인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케인인 것이다.
이정은 교수에 따르면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장면이다. 그는 "지금 강의에서 만났기 때문에 여러분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하겠지만,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냥 '아줌마'로 불리지 않겠느냐"며 "(정체성은) 내가 나를 인정하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동체 속의 '나'
이렇게 수많은 개인이 어울려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규정 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오늘날 가장 큰 단위의 공동체인 국가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시민 혹은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 국민' 혹은 '미국 시민'과 같은 정체성을 지녀야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정은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는 존재'라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관념은 현실에서는 무력하다"며 "국경으로 경계 지어진 현실 속에서는 국가 공동체 안에서 법, 제도,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 국민 혹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정은 교수는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국가) 공동체에 대해 두 가지 엇갈린 시각이 있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시각 중 하나는 인간은 원래 홀로 태어났으나, 각각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어냈다는 개인주의에 의거한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의 관점에 따르면, 공동체의 형성에는 어떠한 필연성이 없으며, 따라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공동체의 규칙과 다를 때 그것을 자유롭게 깨버릴 수 있다. 사회를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본 홉스부터 루소의 사회계약론, 롤스의 사회정의론까지 모두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정은 교수는 지난해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을 예로 들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샌델은 완전한 공동체주의자는 아니나 공동체주의적인 발상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샌델은 "우리가 공동체에서 어떤 혜택을 받았으므로 그것을 돌려주어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부담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샌델은 현재 미국 사회에 만연한 견해, 즉 개인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발휘한 능력과 그에 따른 성과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는 자유 시장 경쟁주의에 일침을 놓는다. 개인이 누리는 성과는 "혼자 잘나서" 실현된 게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공동체로 다시 분배되어야 마땅하다.
이정은 교수는 "이렇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샌델의 견해는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며, 사실은 헤겔이 말했던 상호 주관성에 바탕을 둔 '인륜적 국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이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고자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보았던 헤겔은 사회계약론의 발상을 넘어선다.
이정은 교수는 "헤겔은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만 추구하다보면 결국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그런 상황을 경계했다"며 "즉 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것이 바로 '인륜적 국가'라는 문제의식으로 확장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정은 교수는 결론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개인과 개인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자기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 주체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 각각이 '타인의 인질'(레비나스)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나의 정체성도 또렷해지고, 삶도 더욱더 윤택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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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원 제이슨 본의 자아 찾기부터 헤겔의 법철학까지 종횡무진 오가며 진행된 이정은 교수의 '청춘의 고전' 네 번째 강의는 약 150명의 호응 속에서 막을 내렸다.
다섯 번째 강의는 7월 16일 6시 같은 장소에서, '성 정체성과 음양남녀'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김세서리아 성신여자대학교 연구교수가 동양의 고전 <주역>과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섞어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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