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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늪'에 빠진 보수, '덫'에 걸린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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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늪'에 빠진 보수, '덫'에 걸린 진보

[철학자의 서재] 이광일의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았다

<삼국지>를 시간 때우기 책으로 읽는다. 때우는 책읽기이므로 대중없이 읽는다. 그러다 보면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는다.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적벽대전 이야기다. 반면에 삼국지의 초기 영웅들이 사라진 후반부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제갈량과 사마중달의 전투 부분은 이루지 못한 꿈의 아쉬움 때문인지 들여다보게 된다. 제갈량은 죽어가면서도 꾀를 내어 사마중달을 퇴각시킨다. 이 대목이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았다(死諸葛, 能走生仲達)"는 고사를 남긴 부분이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 제갈량의 지략에 감탄할 때도 있지만, 사마중달의 신중함에 공감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2일 제5회 지방선거가 있었다. 이것의 결과에 대한 평가도 각자의 몫이겠다. 정치평론가들의 평가 중 하나가 이른바 '친노 진영 인사의 부활'이었다. 그들이야 자신의 소신과 자질로 당선된 것이지만,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위의 고사였다.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쫓았다!

가끔 술자리에서 선생님들의 한탄을 듣는다. 존경하는 위인이나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상위 랭크에 있을 때다. 특히 젊은이들의 지지율이 높다는 보도에 침통해 한다. 나야 박정희 시대가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별로 없지만, 그 분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론조사를 보면, 전직 대통령 중 박정희가 부동의 1위이고, 현직 정치인 중 차기 대통령 1위 후보는 그의 딸이다.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은 다시 '박통의 시대'가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를 쫓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부활처럼 보인다.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들

▲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이광일 지음,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나야 소위 '박정희 신드롬'을 소 닭 보듯 해왔다. 보수 논객이나 학자들이 박정희를 찬양할 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밀려난 보수파의 허탈함에 대한 자기 위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을 '향수와 위안'으로 이해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높은 등록금과 취직의 어려움이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 정치 권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비판과 좌절'로 이해했다. 이광일은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메이데이 펴냄)에서 현재의 어려움을 "'제2의 박정희'와 같은 탁월한 엘리트의 출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여기까지가 정치권과 여론에 나타나는 박정희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반면에 '박정희 신드롬'을 학문적인 방법으로 평가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박정희 시대 달리 표현하면 개발 독재 시대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요 공식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경제 성장의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의 독재 체제 특히 유신 체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민주화를 위한 경제적 초석으로서 '필요악'이란 관점에서 재평가를 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연합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중간의 입장에서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공정한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이 항상 든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광일은 이 책에서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제 성장이 '반인권, 억압의 정치'와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경제 성장'과 '정치 억압'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통한 평가가 "죽은 자들의 정치"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기존의 방식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성적표로 말하면, 경제는 A고, 정치는 F다. 그러면 합산 평균이 그의 평점이어야 하고, 최소한 경제는 성적을 잘 받은 것 아니냐는 평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나도 평가받으며 성장하였다. 지금도 많은 영역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에 근거한 평가라는 이유로 지배적 평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조건이 박정희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는 묻는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근거한 평가들이 국가, 그리고 근대 정치 및 그 핵심인 민주주의 문제를 사회와 경제 등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thing), 혹은 그 어떤 중립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다시 그는 묻는다. 민주주의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외부에서 떡고물을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자기 통치'와 '자기 의지의 실현'으로서 재구성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는 박정희를 경제와 정치의 분리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과거 지향적인지 보여준다.

경제와 정치의 씨줄과 날줄로 엮기

박정희 시대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추억거리가 없다. 나의 철없는 기억들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을 때 채널 권을 넘겨주지 않는 외할아버지를 야속해하며 장기판 알까기로 그 마음을 달랬다. 박정희가 서거했을 때도 문화방송(MBC) 10대 가요제를 연기하고 정규 방송을 중단한 방송국의 행태에 불만이 더 많았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형과 누나에게 자랑했더니, 자신들은 빵을 상으로 받았다는 말에 억울해 했다. 누구는 빵을 주고 누구는 빵을 주지 않는 학교의 행태에 섭섭했던 기억이다. 물론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이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겠지만, 구슬과 딱지치기에 미친 아이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을 것이다.

이광일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철없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요즘도 가끔 볼 수 있는 '대한 뉘우스'가 소개하듯이, 뉴스와 홍보 차원에서 보여주는 사건들의 단편은 아니다. 저자는 경제와 정치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박정희 시대의 모순을 밝혀내고, 그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외재화되었는지 그리고 또 그 바깥에서 어떻게 투쟁했는지 보여준다.

박정희 시대와 이 시대의 유사성

이 책은 박정희 시대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책이 아니다. 경제와 정치를 통일적으로 사고함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려 할 때 빠지기 쉬운 이론적 함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대의 지표와 담론들을 엮어 보여줌으로써 박정희 시대를 분석하기 위한 통합적 모델을 제시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느꼈던 점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민중의 삶은 고단하다는 것이다. 경제 개발이란 구호 아래 대기업은 국가 정책의 여러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정경 유착 형식의 스캔들은 당시에도 있었다. 경제가 양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상대적 박탈감과 어려움은 그 당시에도 여전하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을 펼치던 현 정부도 선거가 다가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뒤늦게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를 깨달았는지 '동반 성장' 구호를 내세운다. 이광일이 '종속성'으로 표현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은 뿌리가 깊다. 공작 기계나 기초 및 중간 부품을 조달하는 중소기업의 육성보다는 수입을 통한 조달과 대규모 사업 확장에 주력한 대기업의 입장에서 '동반 성장'이란 염두에 없었다. 사실 '공정 거래'라는 규범적 원칙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위한 저곡가 정책"에 시름하던 농민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그 양태는 조금 바뀌었다. 저곡가 정책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는 개방 농정에 농민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경제 성장의 주력군으로 호명되었던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은 오늘날 비정규직의 그것과 닮았다. 총인구의 65퍼센트에 달했던 농민의 해체에 따른 이농과 도시 인구 증가는 오늘날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화 속에 도시 빈민의 삶은 또한 오늘날 용역 업자에 이러 저리 쫓겨 다니는 그 삶과 다르지 않다. 땅주인과 개발 업자가 얻는 이익과 도시 빈민들이 쫓겨나면서 얻는 이익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토건 국가', '부동산 공화국'이란 말이 생겼을까? 이광일이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경제의 독점과 종속적 성격이 정치의 독재적 형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책 전반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주의 급진화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경제와 정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그것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광일의 다음과 같은 물음에 있다.

과연 이 당시의 경제 성장은 박정희의 공적인가? 아니면 민중의 땀과 피눈물의 산물인가? 경제 성장을 위해 민중들이 동원되었지만, 언제나 경제와 정치의 권력 바깥으로 배제되지 않았는가? 박정희 시대에 줄기차게 벌어진 민중의 권리 쟁취와 반독재 운동은 단순히 독재자를 대체하거나 타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민중의 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이광일은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을 뛰어넘기' 위하여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결론으로 내세운다. 이 부분은 이론적 쟁점이 더 연구되고 토론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광일은 자신의 입장이 무페와 라클라우 유의 '급진적 민주주의'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도 "노동 중심성이라는 과거의 유령"에 집착하는 것보다 "각 운동(정치)의 입장에서 어떻게 자본을 넘어설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실천 프로젝트를 제출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 본다.

그는 그 동안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비민주성과 반민주성을 비판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동력인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오늘날 실천의 그것이다. 만약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면, 박정희는 '자유주의자들에겐 늪'이고 '진보에게 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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