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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 네가 없으니 아프고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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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성일, 네가 없으니 아프고 또 아프다!"

[최성일을 기억하며] 이 친구야, 저 세상에서는…

머릿속에 생긴 이물질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을 겪어오던 출판평론가 최성일이 지난 2일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 전화로 부음을 전해준 이가 고인과 나눈 인연을 내용으로 하는 애도의 글도 같이 부탁했다. 나는 글 부탁에 선뜻 응낙을 못했다. 그것이 잔이라면 마시고 싶지 않은 잔이었다.

그를 끝으로 본 게 지난 3월이었다. 인천적십자병원이었다. 그때에도 그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오래도록 햇빛을 못 보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 누워 있었기에 본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중환자실이 넘쳐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지만, 그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고인처럼 중환자실에서도 이미 포기한 환자들이었다.

본래 잘 웃던 얼굴인지라 얼추 보면 그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의 몸에 여러 장비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입과 코에도 관이 꽂혀 있었다.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누가 찾아왔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내 신순옥 씨가 말했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곤 했지만 이젠 아예 안 돌아오네요" 하고.

그런 말끝이었을 것이다. 그가 갑자기 온힘을 다해 머리를 허공에 퉁겼다.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 장성익 전 <환경과생명> 주간 그리고 내가 그의 병상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리는 금세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누가 왔는지 알아보지 못한 데 대해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는 반가움을 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떠날 것이라고 짐작해야 했다. 마음이 아팠다. 젊은 아내는 말할 수 없이 의연하고 침착해서 우리는 큰 감동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 출판평론가 고(故) 최성일. ⓒ프레시안
그가 병실에 누워있던 것을 처음 본 것은 2004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하기 직전이었다. 수술 전에 그는 삭발 상태였다. 찾아온 이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으려고 그는 시종 웃었고, 웃음 밑에 깔려 있는 태도는 담담함이었다. 무서운 수술이지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역력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2010년 가을 다시 발작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수년간, 환경 판의 여러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만나곤 했었다. 뇌종양 수술을 마치고 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는 수술 전과 다를 바 없이 한결같았다. 의식을 지닌 그를 최후로 본 게 언제였던가? 작년 가을 이전이라는 것만 떠오른다. 자꾸만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미치겠구나, 왜 그는 그렇게 자주 웃었을까?

이 원고를 청탁한 이에게 나는 조금 더듬거리며 "내가 그에 대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장례식장에 가서 다시 연락을 하겠다" 하고 말한 뒤, 통화를 끝내고 휴대 전화를 확인해보니 지난 밤 늦은 시각에 그의 아내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시골에서 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칡덩굴을 자르던 일을 하다가 늦게 귀경한 나는 제때에 휴대 전화를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알고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목덜미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며 혈압이 높아진다는 것을 시방 내가 이렇게 범상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에 한번 먹는 혈압 약을 그렇다고 두 번 먹을 수도 없다. 알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자주, 떠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가 갈 줄 알았다. 그렇지만 이건 좀 너무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우리 곁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는 사람들이 적잖지만, 그의 경우에도 나이가 들어 떠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67년생이니까 한국 나이로는 마흔다섯이고, 예를 들어 신문의 부고란 같은 데에서 간주하는 나이로는 마흔네 살이다.

아무리 가는 데에 순서가 없다지만, 쉽게 떠나버리기에는 너무 좋은 나이가 아닌가.

머리를 감고, 딴에는 점잖은 옷을 찾아 입고, 안 신던 구두까지 꺼내 신고, 집을 나설 때 바깥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금년치 장마가 시작되고 두 번째 폭우였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까지 가야 1호선으로 부평에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신연수역으로 가는 인천 시내 지하철로 갈아타야 장례식장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지난 3월에도 그런 코스로 병실을 찾았었다. 내 집에서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잠실나루역에서 전철에 오른 뒤, 나는 겨우 한 정거장째인 잠실역에서 갑자기 내렸다. 책방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우산의 빗물을 털어 누군가 구겨버린 비닐봉지에 말아 넣은 뒤, 나는 잠실의 지하 책방에서 어렵잖게 책 한 권을 골랐다.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부피의 책이어야 했다. 책방에 들어간 지 5분도 안 되어 바로 골라 값을 치른 책은 살림지식총서 369번 <도스토옙스키>였다.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할 머나먼 지하철 행로 동안 볼 책을 고르려고 책방에 들르기도 했지만, 후배의 장례식장에 가는 걸음이 딴에는 무거워서 샛길로 조금 새면서 당도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도스토옙스키를 주제로 여러 논문을 쓴 박영운이라는 러시아 문학자였다. 그가 쓴 책의 24쪽에서 27쪽까지에는 1849년 2월 22일, 도스토옙스키가 형장에 끌려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의 극적인 체험에 대해 기술되어 있었다. 페트라스프스키 회원 20명이 8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급하게 사형 선고 절차를 치른 뒤에 형장에 끌려갔을 때, 연병장에는 단두대와 말뚝 역시 20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죄수들이 두 줄로 자리를 잡자 일렬횡대로 서 있던 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읽고 총을 겨누는 순간, "안 죽여도 된다" 하는 황제의 집행 유예령이 내려진다. 이것은 "자칭 민중을 사랑한다는 조무래기 지성인들을 한번쯤"(24쪽) 질겁할 정도로 혼쭐내주기 위한 차르의 연극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도스토옙스키의 이 특별한 체험은 20년쯤 지난 뒤 그의 <백치> 1부 5장에 자세하게 묘사된다.

사형 판결문이 낭독되고 집행 유예가 내려지기까지 20분쯤이나 15분쯤의 시간 동안, 몇 분 뒤에는 갑자기 죽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던 그 짧은 순간,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요지부동의 처형을 목전에 둔 인간의 마지막 5분'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정신의 변화에 대한 치밀하고 예사롭지 않은 심리 묘사를 인류에게 선사했던 바, 그 대목은 이렇다.

사제 한 명이 십자가를 들고 그들 각각에게 다가갔습니다. 살아 있을 시간은 5분도 남지 않았을 것 같더랍니다. 훗날 그는 그 5분이 끝없는 시간의 확장, 거대한 재산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는 이 5분 동안에 최후의 순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동안에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했다는 겁니다. 우선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의 시간을 쓰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1분은 마지막으로 주위의 광경을 둘러보는 데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일을 결정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는 그 일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박영은 지음, 살림 펴냄), 25~26쪽)

최성일이 세상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5분은 어땠을까?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기관이 심장도 아니었고, 콩팥도 아니었고, 간도 쓸개도 아니었고, 뇌였기에 그가 맞닥뜨렸을 5분에 대해 아직 지상에 살아 있는 우리가 마구 추측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책에서 보니 이집트 사제들은 사람이 죽어 미라를 만들 때 그의 내세를 위해 뇌는 버렸지만 심장은 몸속에 보관했다고 적혀 있었다(<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빅터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서커스 펴냄), 98쪽).

마음은 심장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붓다가 아난에게 마음을 어디 내놓아 보라고 주문했었다. 범람하는 최근의 뇌과학 쪽의 학설은 마음이라 일컫는 정신 현상이 있다면 그것을 관장하는 기관은 심장이 아니라 뇌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분위기로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이집트의 사제들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그럴까? 심장과 뇌의 어떤 신비로운 물질이 인간이 생각을 할 때 같은 반응을 한다는 이야기도 나는 듣거나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비록 뇌에 이상이 생겼지만 최성일은 마지막 5분을 그의 망가지지 않았던 심장으로 스스로 잘 정리했으리라 믿는다.

그가 마지막 5분에 뇌를 다쳤다는 이유 때문에 두 손을 놓고 함락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는 명민한 사람이었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누구나 쉽게 버리는 신문지도 그냥 안 버리고 스크랩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몇 안 되는 뛰어난 출판평론가였기에 출판사에서 그에게 흔쾌하게 보내주었던 책들을 그는 한 권도 안 빠뜨리고 꼼꼼하게 자신의 공책에 기록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게 출판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이였다. 그는 권위의 사람이라기보다는 권위에 저항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래도록 의식을 잃은 상태로 죽음에 이르렀다곤 하지만, 그의 심장마저 엄습해온 죽음의 권능에 무방비로 쉽게 함락 당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는 죽음에 어떻게 저항했을까? 남긴 말이 없으니 알 재간이 없다. 말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그의 책들이다. 세상에 책을 남기다니. 놀랍고도 두려운 일을 그가 한 셈이다.

아내에게는 의식이 잠시 돌아왔을 때,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와 같이 그의 아내로부터 들었는데, (우리는) 그 말이 "고마웠다"는 말로 들렸다.

3월에 병실에 갔을 때, 아내는 다른 말도 덧붙였었다. 아이들에게 한 말이었다.

"서해는 인해를 잘 돌봐 주거라. 인해는 누나 말 잘 듣고."

서해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다. 인해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의 아들이다.

15년간 200여 명의 기라성 같은 사상가들을 성실하게 요약하면서 빼어난 리뷰를 작성했던 이가 남긴 의식적인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너무나 쉬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외국어를 많이 알아서 우리말에 외국말을 자주 섞어 쓰던 이들도 떠날 때에는 어려서 쓰던 모어 중에서도 쉬운 말 몇 마디를 남기곤 한다.

갑갑하다, 든가, 너무 어둡다, 든가, 아프다, 든가, 무섭다, 든가, 착하게 살아라, 든가, 미안하다, 든가, 고맙다, 든가……그런 말 정도를.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이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도 우리는 싱싱한 얼굴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잘난 체 활동할 때에도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 살아 있는 시간이 아주 잠시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2호선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뒤에는 도스토옙스키를 읽기가 힘들어졌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 빠뜨렸구나. 신도림역을 몇 정거장 앞둔 2호선 도림역에서 나는 또 그만 내렸다. 도림역을 신도림역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내 본래 주의부족한 사람이긴 하지만, 왜 그랬을까? 나도 내가 저지른 짓을 모르는데, 누가 나를 분석할 수 있을까? 같은 노선의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가 다시 올라탄 뒤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신도림역에 이르는 동안 조금 멋쩍어진 나는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다시금,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부평까지 가는 1호선 안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미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꺼내 읽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가 20년이나 흐른 뒤에야 그 '5분'에 대해 다른 입을 통해 말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개천에는 거대한 황토물이 넘실거리며 아파트단지 언저리를 감싸고 흘렀다. 여러 지류에서 넘칠 듯이 흘러내려 큰물에 합류하는 물빛이 모두 황톳빛이었다. 급하게 공사 중인 4대강의 장마 모습들은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내가 차창 밖으로 본 곳은 아마도 안양천이었을 것이다. 내 옆에 서 있는 청년들은 네팔에서 온 줄로 알았더니 필리핀에서 온 젊은이들이었다. 한두 마디 건넨 뒤 웃었더니 그들도 웃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이 다치지 말고 돈 많이 벌어 귀국하기를 바랐다. 아랍 쪽에서 온 친구들도 보였다. 그들은 모두 턱수염이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턱수염을 사내가 반드시 길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알고 있다.

비에 젖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다시금, 세상을 떠난 최성일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는 다시는 장맛비를 못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못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동안일지 모르지만 나는 어쨌거나 지금 황톳물과 다 젖어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고, 그는 어젯밤부터 더 이상은 이 세상의 어떤 풍경도 못 본다.

신연수역에 내리니 다섯 시경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오기 전에 역사에서 장성익 주간과 조성일 씨를 만났다. 조성일 씨는 장 주간과 같이 오랫동안 계간 <환경과생명>에서 일하던 젊은이다. 지금은 폐간된 생태 잡지 <환경과생명>에서 그들이 일할 때 우리는 자주 만났었다. 환경 책 목록 <환경책, 우리 시대의 구명보트> 같은 비매품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러한 편집 작업도 최성일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고인과 동갑인 조성일 씨가 문상을 온 것이다. 나와 겨우 12년 차이인데, 내 의식 속에는 그들을 '젊은이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마흔 네 살 정도의 나이를 나는 아마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빌어먹을 청춘, 빨리 지나가기를 늘 바랐었다.

조성일 씨 역시 뇌종양에 걸려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뿐인가 공교롭게도 그의 아이들도 고인이 남긴 아이들과 나이가 같았다. 그래서인지 조성일 씨가 말했다.

"제 집사람이 부음을 듣고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랑 비슷한 게 많아서 그랬을 거예요."

장성익 주간은 나를 만나던 순간, 책 한 권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 했다. 서둘러 그랬는지 책이 그의 주머니에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얼핏 보니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였다. 연전에 한 매체(<시사인>)에 그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적도 있었기에 아는 체를 했더니, 그가 겸연쩍어 했다.

그나 나나 장례식장에 오면서 각기 따로 출발했으면서도 책 한 권씩을 부적처럼 주머니에 꽂고 왔던 것이다. 언제쯤 이 인간들이 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특히 장례식장에 가는 이런 날, 이런 폭우 속에서는 전철에서 그냥 흔들릴 일이지, 꼭 주머니에 책 한 권 챙겨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책은 무엇인가? 남의 생각이나 남의 느낌들이 글자로 묶여 있는 서물이 아니겠는가? 왜 잠시라도 죽음의 소식에 멍한 상태로 혼자 힘으로 집중하고 몰두하지 못할까? 실로 하찮은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지상에 올라온 뒤, 적십자병원으로 꺾이기 직전의 구멍가게에서 우리는 또 꾸물거렸다. 영안실에 당도하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비는 그치지를 않았고, 우산을 썼지만 내 어깨는 금세 다 젖었는데도 나는 목이 탔다. 구멍가게에서 캔커피를 하나 샀다. 장성익 주간과 조성일 씨는 뭘 골랐는지 모른다. 캔커피로 목을 축이고 나서야 가게 옆 건물의 계단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우리는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그가 너무 좋은 나이에 갔다는 말을 했고, 남겨진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조성일 씨와 고인이 같은 나이에 뇌종양 수술, 아이들의 나이가 같다는 것 등, 세 가지가 공교롭게 일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더 나눴다.

준비해간 부조금을 영안실 입구에 마련된 흰 봉투에 넣고 이름을 쓴 뒤에 나는 담배 한 대를 더 피웠다. 잠시 후, 피할 수 없이 영정 앞에 섰다. 늘 그가 자신의 책에서 즐겨 사용하던 사진이 영정 안에 있었다. 그것은 그의 옆모습이었다. 그가 남긴 책의 책날개에 저 사진이 더러 흑백으로 담겨 있곤 했는데, 영정 안의 모습은 컬러 사진이었다. 배면은 붉은 색이었다. 그것은 단풍이든가 붉은 담처럼 보였다. 목덜미를 덮는 외투 깃으로 보아 초겨울쯤의 사진이었다. 책에서도 자주 봤으니 저것은 그가 좋아하던 사진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누구든 영정 앞에 두 손 모으고 서 그것을 바라볼 때 차오르는 그 특별한 감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모습은 비록 살아 있을 때의 그 모습이되, 그 모습이 영정이라는 형식의 틀 속에 확고하게 담겨 있으므로, 그의 모습은 영원 속으로 잠겨버린 셈이다. 여전히 지상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운다. 영정 앞에서는 누구나 공손해질 수밖에 없다. 영정과 영정을 바라보는 사이의 심연은 불가해하고 오늘도 깊다. 고인과 오열을 터뜨려야 마땅할 관계를 가졌던 이들은 대개 영정을 바라보는 그 순간 무너지곤 한다. 두 번 깊숙이 오래 엎드려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목덜미에서 뜨거운 기운이 두 서너 줄기 뒷통수 쪽으로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망자에 대한 읍을 마치고 발을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여 몸을 돌리는 순간, 그곳에는 여덟 살짜리 상주 인해가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고인의 조카와 같이 서 있었다. 큰딸 서해는 여식(女息)이라 상주의 자격이 없다는 완강한 유가(儒家)의 풍습이 그곳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사내 조카는 도우미, 결국 우리는 여덟 살짜리 상주에게 크나큰 위로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옛 어른들이라면 이때 아이에게, 아이 엄마에게 무슨 말을 건넸을까?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다는 죄괴감이 들었다. 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천붕(天崩)이 무너졌나이다, 슬픔의 끝까지 애곡하시되 부디 몸을 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시대는 그 위엄과 바람막이 같은 튼튼한 격식으로 인해 의젓한 시대였다고 말해도 된다. 우리는 이럴 때 할 말을 배우지 못한 세대였다. 어린 상주와 절을 하는 순간, 뜨거운 것이 이번에는 눈두덩 쪽으로 치솟았다.

상주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부조함 옆에 그의 책 두 권이 보인다.

▲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최성일 지음, 연암서가 펴냄). ⓒ연암서가
한 권은 얼마 전에 출간된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연암서가 펴냄)였다. 최성일의 관심은 베스트셀러 혐오와 사상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과학 영역에까지 미쳤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게는 그가 중학교 때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 땅에서 괄목할 만한 대활약을 펼치는 어떤 잘난 제자는 그를 하늘처럼 떠받치고 있지만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최성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윌슨의 원주민 책임론이나 미국 중심주의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에 최성일은 특유의 까칠한 어조로 비꼬고 있었고, 다카기 진자부로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생태운동가들, 생태학자들에 대한 최성일의 신뢰는 깊다. 사람들은 그런 최성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책은 어떻게 출간되었는가. 그러고 보니 할 이야기가 있다. 지난 3월에 박병상 소장의 연락을 받고 그의 병상을 찾았을 때다. 장성익 주간, 박병상 소장 그리고 나는 우리가 온 것도 모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최성일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해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병동 복도 끝자락의 비상구 바깥 난간에서 담배를 피우다 문득 병문안에 감사를 표하는 아내에게 "묶지 않은 원고가 있겠지요?"라고 물었다.

그의 아내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말은 안 했지만, 이 책이 출간되면 그가 살아 있을 때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발간한 셈이 되지 않겠는가, 라는 표정을 서로 나눴다. 살아는 있되 의식이 없는데, 한 권의 책이 더 발간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세 사람의 같은 속내는 책이 묶이면 많지야 않겠지만 인세가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아내에게 물었다. "최성일 씨가 친하게 지내던 평론가가 누구였느냐"고. 한기호 소장과 이권우 선생의 이름이 나왔다. 두 분 다 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누구든 좋으니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최성일 씨의 아내는 이권우 선생의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했다.

"병상에 왔다"고 한 뒤에 "그에게 묶지 않은 원고가 있다고 들었다, 책을 묶어드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이권우 선생은 나와 생면부지였으나 따뜻하고 극진한 어조로 전화를 받아주었다. 그는 흔쾌히 "출판사를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목소리로 느껴지는 그의 어조에서 그가 예의 바르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고마웠다.

그리고 얼마 후 5월에 발간된 책이 바로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였다. 누구도 특별한 관심을 안 가진 그 과학책 서평집은 최성일이 썼지만 이권우 선생이 묶은 책이다. 선뜻 책을 펴내준 출판사 연암서가에도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런 우정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은 고인의 아내가 우편으로 내가 주중에 일하고 있는 시골로 보내주었다. 책을 잘 받았다고 답신을 하면서 나는 지난 번 문안 갔을 때 당신의 의연함과 침착함에 깊이 감동했노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 책으로 인한 이야기가 또 있구나. 책이 나온 얼마 후였는데, 박병상 소장이 출판 기념회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저자가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데 무슨 출판기념회를? 싶었다. 의식이 멀쩡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는 출판 기념회 참석은 여전히 쑥스럽다. 그러나 평소 과묵하고 착하기만 한 박 소장의 제안에 반대 의견을 내기는 어려웠다.

엔간하면 가보려고 했으나 나는 그때 마침 시골에서 오두막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불 불참했다. 나중에 듣자니 장서가 예진수 선생, 환경정의 오성규 사무처장 그리고 박병상 소장, 장성익 주간이 그 이상한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다고 했다. 나는 박병상 소장이 원하는 대로 출판 기념회 비용만 곧바로 송금했다. 비용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축하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날 오래도록 술을 마셨다고 했다. 나는 시골에서 내 오두막 공사를 돕는 시골의 이웃과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6월 초순의 어느 날 그의 아내로부터 편지가 한 통 왔다.

나는 그 편지를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겠다. 아무리 선의와 우정에 대한 감사의 편지라 하더라도 사신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내 방식으로 편지의 일부는 소개하고 싶다.

서해와 인해 어머니 신순옥 씨는 "남편을 들여다볼 때마다 남편의 반쪽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면서 "알맹이가 빠져버린 빈껍데기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오늘 병원을 나오면서 저 역시 빈껍데기가 되어가고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편과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일궈낸 삶이라고 불린 것들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지금, 제 존재감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이 빈 자리를 채워줄까요? 존재감이란 게 온전히 저 혼자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관계망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서 한쪽을 상실하고 나면 뒤뚱거릴 수밖에 없나 봅니다"라고 말했다.

서해와 인해 어머니가 덧붙였다. "이토록 헛헛할 수가 없습니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세상은 초록으로 저리 눈부신데, 남편은 무엇을 위해 저리 힘든 사투를 벌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자연처럼 남편도 제 몸에서 오는 계절을 맞아 생명의 봉오리를 밀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묻고 있었다.

아내의 바람이 우리의 바람이기도 했다. 슬프고 무겁고 간절하면서 깊은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는 "최성일 씨의 출판 기념 행사는 조촐하게 잘 치렀습니다" 하고 불참한 내게 알리면서 "주인공은 정작 잠이 들고 잠든 사람 가슴과 배 언저리에 책과 봉투를 얹어놓고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참석하신 분은 박병상, 장성익, 예진수, 오성규 선생님입니다. 참석하신 분들께 저자의 책에 하고 싶은 말을 남겨달라고 제가 부탁을 하였습니다. 출판 기념회에 저자 사인을 받아가지 못한 마당에, 오히려 사인을 해 주고 가는 꼴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이 가져가게 할 생각입니다"라며 비록 불참했지만 축하금으로는 참여했던 나에 대한 극진한 인사를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편지의 맨 끝줄이 읽기 힘들었다.

"남편의 몸 상태는 악화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가라앉고 있습니다."

책을 펴내자는 제안은 비록 내가 했지만 정작 출판 기념회에는 불참한 나는 땅속에 그와 같이 묻을 메시지를 남기지 못했기에 이토록 힘겨운 심정으로 이토록 재미딱지 없는 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빈소 앞에 놓인 다른 한 권의 책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이었다. 하드커버의 800쪽짜리 묵직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최성일 생전에 5권이나 묶여 나온 책이었다. 책을 펴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최성일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최성일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그러나 첫 책은 2002년 출판사 '책동무 논장'에서 나왔다. 그는 첫 책의 '감사의 말'에서 "책을 엮으면서 감사의 말을 쓸 때가 제일 기쁘다"고 하면서 연재 지면을 허락해 준 <도서신문>의 박철준 선배, 당시 임재걸 주간, 강병국/이영진 편집장에 대한 인사부터 밝혔다. 책으로 정작 묶게 된 것은 당시 편집장이었던 강병국 변호사가 권해서라고 하며 후하게 책정해 준 원고료에 대한 감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분들의 노력으로 한 젊은이가 오매불망 원하던 프리랜서, 혹은 출판평론가로 살 용기를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 간명한 이치를 업신여기면 안 될 것이다.

혹자는 그를 까칠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최성일의 인사성은 참으로 유별날 정도인데, 그게 나중에 그를 환경 판에 끌어당기는 데 한 역할을 한 내가 겪은 최성일이기도 했다. 그는 글줄이나 쓰고, 다소 알려진 이름들이 흔히 소홀히 대하기 쉬운 보통 사람들에게 극진했다. 누구나 한결같이 대했다. 주변을 잘 살펴보시라. 매우 잘났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실로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에도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고, 지극히 오만하고 경솔하고 방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는 이번에 빈소에서 한기호 소장을 처음 만났다. 새벽까지 그와 같이 보냈는데, 그 역시 장례식 다음날 자신의 블로그에 "최성각 선생을 처음 만났다"고 쓰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내 후배뻘 되는 사람이었지만 나보다 연상인 사람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좀 뻣뻣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를 자신보다 어린 사람으로 간주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이 될수록 살아온 이력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사근사근해졌다. 말하면서 그는 자주 내 무릎에 손을 대곤 했다.

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그가 이번에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서둘러 최성일의 책 5권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의 직원들이 밤을 새워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선언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전량 최성일의 유족에게 드리겠다"고. 그가 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사망 소식을 듣자 곧바로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세상에 알렸고, 그의 트위터를 통해 빈소를 찾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직업상 성격상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 매체에 부음을 알렸고, 그 소식이 널리 담겼다. 그 직전에 한권으로 묶은 이 책이 <조선일보>만 빼고 널리,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 것은 순전히 한기호 소장의 덕택인 것으로 느껴졌다. 토요일에 최성일이 세상을 떠났는데, 토요일 이 나라 언론의 책 소개 면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로 도배했다고 한다. 나는 시골에서 거위와 닭들과 노느라 보지 못했다.

신문도 우편으로 하루 늦게 오후에 배달되기에 나는 몰랐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된 지 이틀 후에, 그러니까 자신의 책이 전화번호부처럼 두텁게 무슨 대종회 족보처럼 한권으로 묶여져 기사가 터진 날 오후에 최성일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래서 이미 살아 있으되, 가사상태였던 최성일의 만년은 지인들의 노력으로 인해 화려했다고 말해도 누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 화려한 일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한기호 소장은 과감하고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한 3만권 팔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최성일의 출판평론가 15년 세월의 퇴직금 정도로 유족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글쟁이라기보다는 내가 보기에 출판 사업가 같았다. 매우 대범하고 사내답기조차 하다. 멋있고 아름다운 일은 바라보기에는 쉽지만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과학 서평집을 선뜻 연암서가에 알선해준 이권우 선생이나 한기호 소장에게 나는 이번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한 가난한 책벌레에게 그들이 보여준 우정과 용단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한 소장이 바라는 것처럼, 나 역시, 강준만 교수조차도 최성일의 작업으로 인해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첫 책의 뒷표지에 붙인 추천사)한 적이 있는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이 책은 널리,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책이 발간되고 이틀 후 저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13년 2개월간 218명의 사상가들을 요약한 리뷰의 정확성과 집요한 성실성 때문이다. '인생이나 사회 문제 등에 대하여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 철학 사상 등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사상가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자세히 살핀 최성일은 사상가를 거창한 이론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책과 관련된 기준은 2권 이상의 번역서가 나온 사람, 그리고 <도서신문>에 연재할 때 구할 수 있는 사람 등의 조건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저자 최성일의 개인적 취향이 압도적으로 작용했다. 누군들 안 그러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자크 라캉은 너무나 인기가 좋지만 취향이 작용해 첫 책에서는 뺐고, 에리히 프롬도 너무 많은 번역서가 나온지라 뺐다고 했다. 리영희, 김민기, 서경석, 김기협 등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삶의 끝 날까지 자기 생각으로 일관한 우리말을 같이 쓰는 사상가들도, 틀림없이 더 풍족하게 다뤘을 것이다.

"학생들은 누구를 찬양하고 그를 흠모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레이몽 아롱이 말했다. 최성일은 거기 조건을 달았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가라 해도 그를 무작정 흠모하거나 무조건 찬양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바로 그런 반듯하고 건강한 시각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어떤 블로그에 애도를 표한 한 독자의 말처럼 이제 <책으로 만났던 사상가들>이 되었다.

최성일은 까칠한 사람이기도 했다. 만나면 늘 웃었지만, 그의 글에는 독이 있었고, 야유도 적잖고, 단호한 경멸도 넘친다. 2001년에 그가 펴낸 첫 책은 <베스트 셀러 죽이기>였다. 한기호 소장은 얼마 전 교보문고의 부탁으로 <베스트셀러 30년>을 정리했는데, 그게 잘못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성일은 베스트셀러를 경멸했다. 그런 시각이 최성일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기점이 되었다. 그는 화제작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곧 사라질 것들과 오래 남을 것들을 구분하는 식견이 있었다. "읽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읽는" 생활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최성일은 두루뭉수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빈소에서 한 40대 편집자에게서 들은 한 일화도 빠뜨릴 수 없다.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한 잡지가 있었다. 잡지를 받아든 최성일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빨간 색으로 교열을 보았다. 교정을 본 게 아니라 틀린 문맥, 잘못 설정된 시각, 책(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두루뭉수리의 불성실을 그는 꼼꼼하게 표기해서 우편으로 잡지사에 보냈다. 그리고 짧은 메모를 첨가했다. "우리, 좀 제대로 합시다"라고.

그런 작업을 해보라고 누가 시킨 게 아니었다. "제대로 하자"고 말한 최성일은 이 나라에서 어떤 집단보다도 <조선일보>를 경멸하고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는 골수 '안티 조선' 글쟁이였다. <조선일보>가 제대로 굴러갈 사회를 역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인 김수영을 단군 이래의 최고의 시인이라는 허튼소리를 불사할 정도로 좋아했고,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지식인, 그보다는 작가 고종석의 책은 단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모아 읽었다고 자주 밝히곤 했다. 작가 고종석은 술을 마시다가 부음을 듣자 바로 달려왔었다고 빈소에서 들었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3일 오후 5시 10분부터 발인날이었던 4일 4시까지 빈소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어린 상주는 엎드려 절 받는 일에 지쳐 나중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놀라운 일은 고인과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적잖았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책방(알라딘)에서 근무하는 젊은이도 그를 생전에 본 적이 없는 이였고, 출판사 사장도 그런 분들이 계셨다. 누구보다 반가운 이는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였다. 그는 내가 앉아 국밥을 받은 건너편 상에 어떤 이와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권 교수는 내가 믿고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문학 지식인 중의 한 분이다. 나중에 자리가 좀 정리되자 그와 독대해 몇 잔의 소주를 나눴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문학 판의 어른들,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의 빈소에도 저는 안 갔습니다. 그분들을 비록 존경하지만, 제가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이 후배 평론가의 빈소에는 달려왔지요. 나는 고인이 보여준 비평 정신을 귀하게 여겨왔지요."

한 지식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 그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믿음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어 기뻤다. 나는 환경 판의 일들에서 최성일의 협조를 많이 받았다는 말로 고인과의 인연에 대해 말했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자 우리는 명색이 글쟁이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우리 문학 판의 타락과 오염을 개탄했다.

길게 이야기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나야 문학 판 따위에서 일찍 떠난 사람이지만, 그의 고뇌가 마음 아팠다. 헤어질 때 권 교수는 나의 생태산문집, <날아라 새들아>(산책자)에 수록했던, '생태적 위기와 새로운 글쓰기'를 공감의 마음으로 잘 보았고, 그 내용의 일부를 문예지 <문학수첩>에 인용하기도 했다는 말을 건넸다. 우정의 얼굴이었다. 나는 <문학수첩> 몇 호이냐고 물으려 하다가 참았다.

신촌의 내 단골 헌책방 '숨어있는 책'의 노동환 대표와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책값도 얼마간 할인해주는 조기남 씨도 다녀갔는데, 헌책방에서가 아닌 그곳에서 벌써 7~8년째 매주 만나다시피 하는 그들을 만나니 여간 반갑지 않았다.

최성일의 무엇이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폭우를 뚫고 빈소로 향하게 했을까.

사실 그 빈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빈소였다. 창비, 예스24, 푸른숲, 한겨레출판, 사회평론 등의 대형 출판사들 몇 군데의 화환이 놓여 있었고, 나중에 부키의 박윤우 대표, 그린비의 유재건 대표, 인사 나누고 싶었던 사계절의 강맑실 대표, 들녘의 이정원 대표 등, 귀한 이들이 다녀갔지만, 그래서 "아아, 최성일은 출판계에서 귀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이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너끈히 증명되었지만, 나는 권성우 교수처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순수한 독자의 자격으로 빈소로 달려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여덟 살짜리 상주와 그 누나를 뜨거운 눈길로 지켜본 데 대해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먼저 쓰기 멋쩍어 미뤘던 최성일과 나와의 인연을 간략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이 길고 지루한 글을 서둘러 마쳐야겠다. 최성일을 나는 언제 처음 만났을까? 나는 잘 기억을 못했다. 그러나 꼼꼼하고 정확한 최성일은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펴낸 책에 대한 나의 책,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펴냄)를 읽고 최성일이 쓴 서평이 '프레시안 books' 바로 이 지면에 담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밝혔다.

아마도 1997년께였을 것이다. <출판저널>로부터 제프리 무세이프 메이슨의 <코끼리가 울고 있을 때>(오성환 옮김, 까치 펴냄)라는 책에 대한 짧은 서평을 부탁받았다. 동물들에게도 이른바 고등 감정이라 일컫는 감정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고등 감정, 하등 감정 따위의 개념이 인간들이 제멋대로 만든 틀려먹은 개념이라는 내용의 책이었다.

당시는 이메일 시대가 아닌지라 글쟁이는 청탁받은 매체의 담당자와 잠시 만나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면서 원고를 전달하곤 했다. 당시 내게 청탁을 한 이는 누구였을까? 그곳에도 얼마간 근무한 적이 있는 문학 평론하는 후배 남진우였을까? 아리송하다. 원고를 전달하고 편집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최성일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내 글을 본 적이 있다며 내게 인사를 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낯선 남의 편집실에서 불현 듯 만난 한 젊은이를 내가 후일에 다시 기억할 재간이 없었다.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치밀한 성격에다 상처에 민감한 최성일은 그런 나의 몰기억에 대한 섭섭함을 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밝히고야 말았다.

'프레시안 books' 담당자에게 듣기로 최성일은 부탁받자마자 내 책에 대한 서평을 기꺼이 쓰겠다고 말한 모양이다. 그런 그가 고마웠지만, 나는 감사 전화 한 통화도 못 건넸다. 그 글을 쓰고 얼마 후 그가 발작을 다시 일으켰고, 그 뒤의 시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고도 힘든 시간이 연속되었다. 의식을 곧추세우지 못한 그를 찾아가본들 그게 뭐하는 짓일까. 서평이 발표된 직후 헛소리를 나누더라도, 통화라도 한 통화 했어야 옳았었다.

새나 돌멩이 지렁이에게 풀꽃상을 드리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하던 나는 특히 새만금 살리기 운동에 몰두했었다. 갯벌은 끝내 메워졌지만, 이 세상에 책 한 권은 남겨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최성일에게 그 작업을 같이 하자고 했다. 이번에 묶인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도 최성일은 반다나 시바나 레이첼 카슨, 토다 키요시 같은 생태 사상가들에게 극진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을 눈 밝은 이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베스트셀러 죽이기>로 집필 활동을 시작한 그는 시간이 갈수록 환경 문제, 생태 운동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활발하게 책 이야기를 펼치는 이들 중에도 최성일처럼 그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는 이들은 지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나는 최성일을 좋아했고, 그래서 그가 너무 일찍 떠난 게 큰 손실로 느껴진다.

최성일, 박병상, 장성익, 예진수 들과 나는 서교동 연구소에서 자주 만났다. 어떤 때에는 강화도까지 가서 밤샘을 하면서 책 작업을 했다. 그러기를 몇 달여, 마침내 세상에 나온 책이 풀꽃평화연구소 이름으로 역은 <새만금,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돌베개 펴냄)였다. 갯벌은 잃더라도 어떻게 갯벌이 파괴되었는지 한 권의 책으로라도 증언하자, 그런 취지였다.

최성일은 근원주의자라 일컬어지는 어떤 이들보다도 극단적인 생태론자였다.

환경 판의 일에 최성일과 어깨동무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2002년에 풀꽃평화연구소는 환경정의와 함께 '환경 책 큰잔치'를 벌였다. 환경 문제를 다룬 책들을 망라해 잔치판을 한번 벌여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때 캐치프레이즈는 "새롭게 읽자, 다르게 살자"였다.

환경책의 범주를 정하고, 어떤 책들을 모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그런 작업을 나는 최성일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과 같이 했었다. 독서 운동이면서 동시에 환경 운동이었던 그 작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최성일은 자신의 식견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 그와 내가 만나기만 하면 유쾌한 어조로 따따부따 격론을 벌이는 것을 당시 주변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했었다고 한다. 아까 잠시 언급했던 <환경 책, 우리 시대의 구명보트>의 편집 작업도 이제 생각하니 그와 같이 했던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은 그가 서울대병원에 처음 뇌종양 수술을 할 즈음이었다. 나는 앞서 밝혔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는 그에게 무슨 말인가 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한 말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나중에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2>(2004년)의 권말에 붙인 '감사의 말'에서 병원 종사자들에 대한 헌신을 겪으면서 의료계 종사자들에 대한 편견을 반성하는 글을 펼치면서 그 한 자락에 "소설가 최성각 선생님은 '제발 내 말을 듣게'라는 말로 내 영혼을 울렸다"(256쪽)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 책을 내게 보낼 때 속표지에 써넣은 저자 사인에는 "압니다"라고 한 줄을 적어놓았다. 무엇을 알았단 말일까? 내가 무슨 말을 하면서 내 말을 제발 들어달라고 부탁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다.

사람평가에 대단히 인색했던 그가 생전에 그나마 이 못난 사람을 제법 좋아했던 것 같아서 나는 기쁘다. 그런데 이제 그 기쁨이 끝이 났다. 가난했지만 늘 밝았던 사람, 병이 도지면서 한 달에 30~40만 원으로 겨우 살면서도 아내와 아이들과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 그런데 그가 갔다.

새벽 네 시에 나는 그때까지 같이 빈소를 지켜주던 지인들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안공부공동체의 김종락 대표, 장서가 예진수 선생, 한기호 소장 등이 그들이다. 장지에까지 가기에는 모두 직장이나 약속에 걸려 있었다. 나 역시 장지 동행에는 사정이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실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세상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잘 가거라, 최성일.

그리고 저승에 가면 책 같은 것 읽지 말고, 신문 스크랩 같은 것 하지 말고, 글 같은 것 쓰지 말고, 거기도 야구 경기 같은 게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구경이나 하고 살아라. 그대 좋아하는 모차르트나 하루 종일 들으며 지내거라. 거기서도 뇌종양 같은 것 걸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곧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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