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문학을 다시 묻는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목소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문학을 다시 묻는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목소리

[프레시안 books]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길>

최근 발간된 백낙청의 두 평론집을 읽고 느낀 가장 큰 소감은 그가 치열하고 왕성한 사유를 계속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비평가라는 점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길>(창비 펴냄)은 그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문학에 관해 쓴 평론과 영문학에 대해 1980년대 이래 써온 글들을 묶은 것이고, <세계 문학과 민족 문학 1 : 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창비 펴냄)는 각기 1978년, 1979년 발간된 두 평론집을 하나로 묶어 새로 발간한 것이다.

▲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거의 40년에 육박하는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한 문학평론가가 발전시켜온 사유의 궤적이 현실의 변화와 외부의 도전에 응전하면서도 애초의 중심을 잃지 않는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체험이다.

백낙청이 40년 전에 제기한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의 관계, 리얼리즘론 등의 문제설정은 2011년 현재 시점에서도 큰 틀의 변화 없이 견지되고 있다. 그 사이 이 이론에 불어 닥친 숱한 비판과 저항을 생각해 보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영문학의 고전에 대한 주체적 읽기를 시도하면서 한국 문학에 대한 구체적 비평과 실천적 개입을 소홀히 하지 않는 백낙청의 부지런한 작업은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오늘날 다수 후배 영문학자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40년에 이르는 백낙청의 사상적 궤적을 이 짧은 대중적 서평에서 감당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최근 그의 문학적 관심사가 집중적으로 표명된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길>에 집중하면서 선생의 주요 이론적 입장이 현실의 변화와 이론적 도전 앞에서 어떻게 견지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견지란 고수와 다르다. 고수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옛것을 유지하는 수구적 태도라면 견지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해 들이면서도 애초의 입장을 심화시키는 유연한 시각이다. 백낙청이 이 평론집에서 인용한 이장욱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외계인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곳의 삶"을 놓치지 않는 현실 감각과 현재를 넘어 "다음은 무엇?"을 질문하는 근본적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길"이라는 평론집의 제목 자체가 이런 유연한 견지를 위해 문학의 근본을 다시 질문해보는 백낙청의 비평적 자세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의 글쓰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문학의 근본을 성찰하면서도 구체적 작품에 대한 구체적 읽기를 생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에서 생산되는 문학 작품들에 대한 자신의 독서가 부족하다는 거듭된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찰을 언제나 특정 작품에 대한 자신의 독서 실감과 비평적 판단을 통해 진행한다. 큰 이야기나 추상적 이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구체적 작품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실감에 충실한 평가, 그러나 주관주의적 인상에 떨어지지 않고 객관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비평적 평가야말로 인문 교양의 핵심으로서 문학 비평의 의의이자 역할이라고 믿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미래파 시에 대한 최근 비평계의 논란을 젊은 시인들의 시와 고은, 신경림의 시를 비교해 읽으면서 이를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성과 정치성에 대한 논쟁과 연결시켜 평가하는 부분, 박민규 소설에 나타나는 공상과 판타지를 리얼리즘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현재의 지평에 폐쇄되지 않고 미래적 전망을 열어두는 대목은 최근 한국 문학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특정 시인이나 소설가 그리고 비평가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내면서 자신의 입장을 조목조목 밝히고 세세한 주 달기를 귀찮아하지 않는 그의 깐깐한 글쓰기는 구체적 증거의 제시 없이 큰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른바 대가들과 그가 얼마나 다른 지점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그가 치열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비평가라는 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점은 평론집의 2부를 구성하고 있는 영문학 작품에 대한 읽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찰스 디킨즈, 샬럿 브론테, 토머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 등 이른바 영문학의 '위대한 전통'에 들어가는 소설들에 대한 읽기는 영미학계의 주류 해석 조류들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촘촘하게 전개된다. 1980년대 이후 간간이 발표한 영문학 비평은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그의 소신이 영문학 고전에 대한 주체적 읽기와 현대 서양 문학 이론과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일견 쫀쫀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한 이런 글쓰기 방식은 그가 리얼리즘을 사실주의와 구별하면서도 사실주의적 기율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성의 재분배를 통한 새로운 감각 체험이 리얼리즘과 상통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그가 좋은 (리얼리즘) 문학은 "윤리적이고 재현적이면서 감각 체험적이기도"(80쪽)하다는 시각을 끝내 견지하는 것은 재현이라고 하면 곧바로 사실주의적 한계로 비판하는 일면적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적 재현을 넘어서는 진리의 계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주의적 재현을 포괄해 들이는 이중적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시각은 이번 평론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랑시에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리얼리즘 진영에서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적 한계로 비판되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에 대한 랑시에르의 적극적 평가, 즉 플로베르는 현실을 모사하거나 재현한 작가가 아니라 감각의 민주적 재분배를 이룩한 작가라는 평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백낙청은 전체적으로 랑시에르가 사실주의적 재현의 의의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감각성의 재분배라는 관점에서 플로베르의 글쓰기를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술(narration)'에 이르지 못한 '묘사(description)'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성의 발명이라는 각도에서 플로베르적 사실주의를 재해석하는 길을 모색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리얼리즘이라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면서 사실주의라고 알려진 글쓰기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백낙청이 일관되게 유지하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세계 문학과 민족 문학의 관계이다. 사실 그의 첫 평론집 제목이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이었을 정도로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의 관계 설정은 그의 사유와 비평 의식을 추동해온 핵심적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른바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민족주의와 민족 문학에 대한 회의가 광범위하게 제기되면서 세계 문학 논의는 최근 문학 비평계와 인문학계를 사로잡는 뜨거운 화두이다. "세계화와 문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백낙청은 자본주의적 지구화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세계적 시야를 확보한 국민/민족 문학이야말로 세계 문학의 도래를 앞당기는 일이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한다.

이런 국민/민족 문학은 "국민국가나 민족을 고정된 단위로 삼기보다 지방의 특수성이 적절히 반영된 국민/민족/지방 문학의 약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보면서, "내셔널 문학은 국민국가의 국어 문학"(93쪽)이라는 트랜스내셔널리즘의 비판을 역비판한다. 특정 언어에 뿌리를 둔 국민/민족/지방 문학이 세계 문학의 기본을 이룬다는 점이 망각되어온 점을 비판하면서 근대 세계 체제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해나가는 이중 과제의 중요성을 다시한 번 역설한다(107쪽). 이 과제를 수행하는 민족/국민/지방 문학이 세계 문학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민족/국민 문학이 과연 이 이중 과제의 수행을 하기에 적절한 단위인지, 아니면 세계 문학적 인식과 지평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민족/국민 문학의 현실적 역할과 의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문제적임은 분명하다. 민족/국민 문학이라는 구체적 현실적 계기를 부정하고 세계 문학을 말하는 것은 추상적이다.

하지만 민족/국민 문학의 세계 문학적 선도성을 일면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민족/국민 문학을 세계 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잠정적 이행의 계기로 수용하는 것은 어떨까?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은 공존과 병행보다는 갈등과 긴장에 놓일 가능성이 더 많다. 이 갈등과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양자를 소통시키려는 노력을 할 때 아직 주어지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세계 문학을 출현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