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생물은 약 150만~180만 종이고 우리나라는 약 6만 종이라고 한다. 환경부의 생물자원통계에 따르면 그중에서 이끼나 균류, 조류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는 대략 4200 가지가 조금 넘는다. 한 달만의 집중 교육으로 이 많은 식물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60시간을 투자하고 산에 들어가면 식물도 나를 퍽 달리 대접해 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나도 6기 교육에 참가했다.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첫번째 실습지인 천마산에서 꽃냄새를 맡았을 때 내가 조금 흥분이 되었던가 보다. 나의 생활도 꽃 범벅이 된 듯 그 주 내내 향기가 유지되었다. 산중의 식물들이 도심의 소시민에게까지 특사를 파견했나. 꽃에 관한 한 이제야 철이 든 기분이 월요일부터 흥건해졌다. 그러니 두 번째 산행이 안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근년 들어 날씨가 하수상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4월에 들어서도 강원도에선 눈 소식이 들리고 꽃샘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봄 마중 하러 남쪽으로 서너 시간을 달려 간 사정을 배려함인가. 날씨는 홑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었다. 쌀쌀한 가운데 화사한 기운이 틈틈이 배여 있었다. 두 번째 산행지는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가 자리한 백암산.
등산을 하는 경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장비를 점검한 뒤 곧바로 산으로 냅다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꽃산행이지 않은가. 주차장을 구획하는 둔덕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수업은 시작되었다. 파릇파릇한 잔디 사이로 납작하게 올라오는 봄꽃이 많았다. 무거운 중금속 냄새가 쌓이는 주차장 근처에도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 풍기는 공중화장실 주위에도 봄풀이 무성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큰개불알풀이었다. 꽃봉오리가 막 피려는 것도 있고 활짝 핀 것도 있었다. 보라색 꽃이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무리 지어 핀 꽃에 손을 갖다 대니 손바닥이 마구 간질간질해졌다. 그리고 나도물통이, 왜제비꽃, 말냉이, 꽃마리, 광대나물 등등이 저를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산수유나무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 꽃마리. ⓒ이굴기 |
▲ 광대나물. ⓒ이굴기 |
▲ 산수유나무. ⓒ이굴기 |
산으로 조금 접어들자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좀처럼 보기 힘든 흰 얼레지도 딱 한 포기 피어 있었다. 그 옆으로 흔히 춘란(春蘭)이라고도 하는 보춘화(報春花)가 돌 틈으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른 봄에 피어 봄을 알리는 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식물이다. 이만하면 꽃산행하다가 제대로 된 봄산행까지 덤으로 얻은 셈이렸다.
▲ 흰얼레지. ⓒ이굴기 |
▲ 보춘화. ⓒ이굴기 |
서울대학교에서 한시를 가르치다가 정년하신 이병한 선생님이 엮은 <한시 365일>(궁리출판 펴냄)은 매일매일 한시 한 수를 읽도록 편집된 책이다. 그중에서 3월 6일치 한시는 이렇다.
渡水復渡水(도수부도수) 물 건너 다시 물을 건너
看花還看花(간화환간화) 꽃을 보며 또 꽃을 보며
春風江上路(춘풍강상로) 봄바람 부는 강 언덕길을 오다보니
不覺到君家(불각도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 집에 다다랐네
尋胡隱者(명, 高啓 作)
꽃사진을 찍다가, 모르는 식물은 손으로 한번 쓰다듬어주다가, 그 한시를 생각하다가, 어느덧 백암산의 사자봉 정상 가까이에 도착했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봄 소풍 나온 학생들처럼 도시락을 펴고 옹기종기 앉아서 밥을 먹었다. 장성에서 생산하는 홍길동 막걸리도 한잔 곁들였다. 멀리 백양사의 율원(律院)에서는 점심 공양을 이미 마쳤는지 조용했다.
꽃산행은 계속되었다. 사자봉을 옆으로 비켜 고개를 넘어 남창계곡으로 빠지니 개울물 소리가 자글자글했다. 가늘게 흘러가는 개울가 바위에 이끼가 돋아나고 그 푹신한 틈을 비집고 애기괭이눈이 피어났다. 겨울을 끙끙 앓고 난 빈 계곡의 자갈들이 뒤척이며 몸 씻는 소리. 겨우내 곧았던 나무의 그림자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굳은 관절을 푸는 소리.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 귀로 직방으로 뻗어왔다. 투명한 물 밑바닥에서는 나무와 나의 그림자가 포개졌다. <한시 365일>의 3월 2일치 한시가 생각났다.
空山足春雨 (공산족춘우) 빈산에 흠뻑 봄비 내리고
緋桃間丹杏 (비도간단행) 복숭아꽃 살구꽃 울긋불긋 피었네
花發不逢人 (화발불봉인) 산중이라 피어도 보는 이 없어
自照溪中影 (자조계중영) 혼자서 시냇물에 제 그림자 드리웠네
空山春雨圖 (청, 戴熙 作)
내려가는 길의 중간쯤에 있는 몽계폭포에 도착했다. 비탈에 선 층층나무가 가지를 계곡 쪽으로 층층이 수평으로 뻗고 있었다. 낙엽성 큰키나무로서 작년 잎은 다 떨어졌고 아직 새잎은 나지 않았다. 잎이 나면 이름처럼 가지의 층층한 모습이 더욱 뚜렷해진다.
▲ 층층나무. ⓒ이굴기 |
오늘 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식물을 중얼거려 보았다. 모두 62종. 한 번이라도 더 불러주면 그만큼 더 가까워지고 기억도 되고 안면도 익히는 것일 테다. 주로 여러해살이풀이 많았지만 떨기나무(관목)와 큰키나무(교목)도 두루 포함되었다. 4200가지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이다. 하지만 한두 해 혹은 여러 해 사는 이 풀들보다 그래도 내게는 시간이 더 남았다.
이윽고 돌계단이 나타나고 인기척이 났다. 저 아래 국립공원의 산림초소가 보였다. 올라갈 때 본 그 꽃, 내려갈 때도 보았다. 산자고였다. 직립형 풀이지만 두 장의 잎줄기가 난초 잎처럼 기품이 있다. 여섯 장의 흰 화피로 이루어진 탐스런 꽃에 아주 작은 벌이 들러붙어 있었다. 산자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었다. 잉잉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산자고. ⓒ이굴기 |
작은 벌은 꿀만 땄을까? 벌은 먼저 와서 산자고에게 나의 도착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지는 않았을까? 마치 <한시 365일>의 3월 6일치 시처럼!
馬蹄踏水亂明霞 (마제답수난명하) 말발굽 물 밟으니 물에 비친 그림자 흐트러지고
醉袖迎風受洛花 (취수영풍수낙화) 취한 이 소맷자락에 바람따라 꽃잎 쌓이네
怪見溪童出門望 (괴견계동출문망) 개울가 동자 어찌 알고 문밖에서 날 기다리나
鵲聲先我到山家 (작성선아도산가) 까치가 먼저 와서 알렸던 게로군
山家(원, 劉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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