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은 6월 30일 하지 사령관의 특별 담화를 통해 좌우 합작 지지 입장을 공표했다.
"나는 金奎植 박사와 呂運亨 씨가 남조선에 있는 중요한 정당 간에 배전의 협동과 통일을 위하여 진력하시는 것과 그 노력의 진전이 있다는 보고를 매우 흥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진정한 통일과 성실한 협력은 외계에서 부과될 것이 아니고 조선 지도자들이 인류 4대 자유의 윤곽 내에서 활동 노력하는 그것으로만 완성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췌언을 불요하고 나는 미군 사령관으로 김 박사 여 씨의 노력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전적으로 시인하고 지지합니다. 나는 벌써부터 조선 민중이 점점 더 정치 논쟁과 당파 힐책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합쳐 보면 조선 민중은 자기네 지도자들 간에 충분한 협동이 있기를 간망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나는 김 박사와 여 씨가 정당 간의 불화목을 일소하고 남조선 민중이 다 한 결 같이 동경하며 필요하고 또한 정당 지도자에게 보상을 받아야 할 친화를 지래함에 성공하리라고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1946년 6월 30일 조선주둔미군 최고사령관 육군중장 존 알 하지
(<서울신문> 1946년 7월 2일자)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중심 펴냄) 122~131쪽 "공작 차원의 좌우 합작 운동"이란 제목의 절에서 미군정의 좌우 합작에 대한 태도를 '정치 공작'으로 설명했다. 정확한 설명이다. 좌우 합작은 미군정에게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진 목적이 아니라 전술 전략 차원에서 채택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전술 전략에도 수준과 층위의 차이가 있다. 미소공위 개회를 앞두고 민주의원을 만들 때의 천박하고 노골적인 공작으로부터 큰 발전이 있었다. 그때는 우익의 공고한 통합에 주력하며 여운형 등 좌익 일부를 개별적으로 포섭하는 '끼워 넣기' 전술이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의 '영수' 체제를 만들었고, 이 체제는 좌익뿐 아니라 중도파도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을 등진 김원봉, 성주식 등 임정 요인들은 '좌익'으로 이름붙일 입장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46년 봄 조선 정계에 대한 미군정의 의도를 정용욱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지는 여운형을 민주의원에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입 공작을 펼쳤다. 또 하지는 미소공위 개막에 즈음해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탁 태도가 미국 측을 난처하게 만들자 이승만 대신 김규식으로 하여금 민주의원 의장직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러한 대응은 우익의 지지-육성이라는 이면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익의 노골적인 반탁 태도가 하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하지의 의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우선 '중간적 외양'이라는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미군정의 태도가 중간파의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열망을 포섭할 수 없었다. 여운형을 민주의원에 참여시키려는 미군정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규식은 민주의원에 참여하였지만 미소공위 개회 이전부터 민주의원의 제한성을 들어 새로운 민족 통일 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해 놓고 있었다. 하지의 행동 또한 중간파 노선에 대한 전적인 지지 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 이때만 해도 하지는 중간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123~124쪽)
미소공위의 진행을 통해 중간파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극좌(공산당)는 미국 측의 비토 대상이었고 극우(절대 반탁 세력)는 소련 측의 비토 대상이었다. 미군정 입장에서 볼 때 이승만-김구 영수 체제가 이남 정치계를 주도할 경우 미소공위의 성과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에게는 미소공위에 대한 절대적 애착도 없지만 그 파탄을 절대적 목표로 세울 자신감도 없었다. 미소공위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다른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이 단계에서 버치 중위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대충 짐작은 간다. 중도 우파 중심의 우익 확장.
극우파 중심의 영수 체제는 좌익은커녕 중도 성향의 일부 우익조차 포용할 수 없는 편협한 체제였다. 민전을 앞세워 중도파를 폭넓게 포섭한 좌익과의 경쟁에 불리한 체제였다. 극우파를 뒷전으로 빼놓고 중도 우파를 앞세우면 민전으로 넘어갔던 중도파만이 아니라 공산당의 극좌 노선에 반발하는 좌익 일부의 협조까지 얻어 현실적으로 가장 넓은 폭의 통일 전선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었다.
중도파에게는 조직력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는데, 미군정의 지원으로 그 약점을 메워줄 수 있었다. 이것은 반공주의자 하지에게도 '우익의 승리'라는 목표를 이뤄줄 수 있는 길이었다.
6월 30일 하지의 특별 성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익에게는 사령관의 의지를 보여주며 함부로 방해할 생각 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중도 우파에게는 군정청의 뒷받침을 보장하니 마음 놓고 나아가라는 격려였고, 좌익에게는 합작의 성과를 미군 측이 보장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 단계에서도 하지의 의도가 '정치 공작'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정용욱은 지적한다.
하지는 중도 좌파를 좌익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좌익 세력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또 중도 우파를 우익의 관리자로 내세움으로써 우익 블록을 강화하고자 했고, 동시에 우익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여 군정의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하지가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구사한 것은 철저한 분할 통치 방식이었다. 하지는 한국인 자신에 의한 민족 통일 전선을 해체하거나 그 결성을 방지하고, 합작에 각 정당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것만 허용하고자 했다. 하지가 의도하였던 것은 미국의 주도에 의한 정치적 통합의 관철이었고, 그러한 구도에서는 우익의 우위가 예상되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131쪽)
하지 개인의 의식이 공작 차원에 매여 있었으리라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이 의식이 좌우 합작 노력의 전개에 수시로 이런저런 제약을 가할 것도 예상한다. 그러나 "정치는 살아있는 물건"이라고 하지 않는가. 좌우 합작은 극좌와 극우의 조직력과 물리력에 묶여 생명력을 잃고 있던 남반부 조선의 정치가 모처럼 살아날 수 있는 길이었다.
이 길이 '하지의 의도에 힘입어' 비로소 열렸지만, 정치의 생명력이 살아나는 데 따라서는 '하지의 의도에 불구하고' 계속 발전해 나갈 가능성도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강만길과 심지연은 중도파의 주체적 의지에 더 큰 방점을 둔다.
이처럼 정국이 좌-우로 나뉘어 양 진영이 대립과 반목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일부에서는 미-소 양국의 협조와 내부적인 단결만이 한반도의 통일을 기할 수 있으며 임정을 수립하는 선결 요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도 진영이라 불리는 이들은 좌-우가 당파를 초월하여 합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우선 중도 세력이 주축이 되어 좌-우 양 진영의 협력을 얻은 다음,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계획했다.
이와 같은 흐름의 중심에 선 것이 우사(김규식)와 몽양 여운형이었다. 우사는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의 합작으로 미소공위의 재개를 요구하고 공위가 성공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것만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좌우 합작의 길에 나선 것이다.
몽양의 경우도 "민족 분열주의와 국제 고립주의는 우리의 적"이라고 주장하고, 탁치 수용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좌익 진영과 반탁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우익 진영을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양 진영과 거리를 두며 중도적인 노선을 취해 나갔다. (<항일 독립 투쟁과 좌우 합작>(강만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89~190쪽)
중도파의 주체적 의지는 분명히 있었고, 이것이 앞으로 몇 달 동안 좌우 합작 노력을 끌고 나가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시동을 거는 단계에서 미군정의 힘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는 사실은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의 회고에 나타나 있다.
미군정 당국자들과의 친선 도모와 일상적인 정보 교환을 위한 사교적인 모임은 1차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되고 나서부터 그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하순 버치 중위가 자신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좌우의 합작으로 정체된 시국을 돌파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견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버치 중위의 이러한 알선에 힘입어 여운형과 원세훈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져 좌우 합작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규식) 박사는 좌우 합작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합작에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업인 데다가 미군정에서 그가 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합작에 임하게 된 것이었다. 합작에 나서면서 김 박사는 이승만 박사가 좌우 합작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합작을 추진하는 데 대해 반대는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합작을 알선한 이후 미군정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한 가지 예로 좌우 합작을 추진하는 데 드는 경비를 지원한 것을 들 수 있다. 미군정은 국고에서 한번에 300만 원씩 두 차례에 걸쳐 모두 600만 원을 하춘식 명의로 된 조선은행 가명통장에 입금시켜주었다.
하춘식이라는 이름은 '하'는 하지 사령관의 첫 글자이고, '춘'은 원세훈의 호인 춘곡에서 첫 자를 딴 것이고, '식'은 김규식 박사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합성한 일종의 가명이었다. (<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한 길>(한울 펴냄), 75쪽)
돈이 어떤 데 들었을까? 송남헌은 "이 돈은 좌우 합작을 추진하는 데 쓰였을 것이라고 짐작될 뿐,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얼마가 쓰였는지 나로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회고하면서, 꼭 한 차례, 1946년 10월경 50만 원을 김성숙에게 주는 것을 보았다며 "좌익 측 파트너인 몽양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사회노동당 결성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을 붙였다. (<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한 길>, 76쪽) 자금과 조직력이 큰 몫을 하던 당시 정계에서 무슨 일이든 추진하려면 방어적 목적을 위해서라도 자금이 필요했을 것 같다.
하지의 특별 담화가 나가자 우익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한독당과 한민당도 뒤이어 지지 입장을 밝혔으나 그 사이에는 온도 차이가 있었다. 7월 2일의 한독당 담화문은 확고한 지지를 보였다.
"좌우 합작이 지금 순조로이 진척되어 가므로 우리는 이 일이 재차 실패 없이 꼭 성공되기를 간망하고 이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 무용한 시의로써 유언을 조출하거나 또는 무조건으로 반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통일을 자력에 구하지 아니하고 외력에서 구하려 하며 심지어 외력에 의존하여 우리 동포의 총의를 무시하고 자가의 입장만 유리하게 하려는 일이 있었다 하면 이것은 어느 쪽을 물론하고 민족의 치욕을 더할 뿐이다. (略)" (<서울신문> 1946년 7월 4일자)
이에 비해 한민당은 5일에야 여러 사안을 언급하는 가운데 끼워 넣었고 은근히 꼬투리 잡으려는 기색이 엿보이는 언사를 내놓았다.
"좌우 합작은 결국에 있어서 국민 전체가 승복할 수 있는 조건으로 낙착될 지며 교섭하는 1·2 개인의 사견으로 좌우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 단체 혹은 개인이 합작의 원칙 또는 조건을 발표 또는 제시함은 좋으나 그것으로써 타방에서도 합의한 것처럼 인상을 주게 하는 것은 대중을 현혹케 하고 합작을 방해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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