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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금광은 산이 아니라 기생집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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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금광은 산이 아니라 기생집에 있었구나!"

[해방일기] 1946년 6월 28일

1946년 6월 28일

6월 27일자 <자유신문>에 미군의 군표 발행 계획이 보도되었다.

[동경 26일발 공립] 맥아더 사령부 섭외국 발표에 의하면 일본, 조선 및 오키나와에 진주하고 있는 미국군을 위하여 거의 새로운 군표가 발행된다. 이것은 돈이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27일자)

러치 군정장관은 1월 29일 기자 회견에서 "절대로 군표를 발행치 않겠다"고 확언하고 2월 5일에도 담화문에서 군표 발행설을 거듭 부정했다.

(문) 조선에는 지금 86억이나 되는 통화 팽창이 되어 있는데다가 이번에 군표를 발행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답) 이는 워싱턴에서 온 소식인 모양인데 우리는 놀라서 동경 사령부로 즉시 물어 보았더니 그 원문은 과거의 일이었다. 즉 벌써 군표를 사용하였다는 말이고 미래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여튼 조선군정청으로서는 절대로 군표를 발행치 않겠다. 지난 정월 초순의 일시 동요로 인하여 각 은행 저금이 조금 줄어졌었으나 지금은 또 다시 늘고 있다. 이와 같이 통화가 흡수되면 조선의 경제는 차차 안정되겠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30일자)

기초 없는 보도로 항간에 미군표 사용설이 나돌고 있는데 미군은 과거에 있어서도 군표를 사용한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사용치 않겠다. 팽창된 통화도 흡수하도록 노력 중이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6일자)

해방 조선에서 통화 팽창은 민생고의 근본 원인 중 하나였다. 전쟁 중의 무리한 통화 정책과 전쟁 후의 혼란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조선의 경우 종전 후 한 달 동안 발행된 기존 통화량의 절반이 넘는 거액의 조선은행권이 통화 팽창의 가장 크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 체제를 그대로 승계한다는 미군정의 방침은 통화 제도에도 적용되었다. 이미 발행된 조선은행권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종전 직후 발행된 조선은행권 중에는 인쇄 품질이 불량한 것도 있어서 위조지폐 문제를 심화시켰는데, 미군정은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라면 언제 어떤 식으로 찍은 것이든 모두 정화로 인정했다.

대다수 주민이 궁핍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일각에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기영은 <신천지> 2권 3호(1947년 4월)에 실은 수필 "모리배"에서 이 사람들을 '모리배'라고 불렀다.

우리는 한참 당년에 광업 브로커들이 요리점을 제 집 삼아 살고 분명코 금은 산에 가야 캐야 할 것을 서울 한복판 요릿집에 들어앉아 금광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헌데 지금은 금광 세월은 없는 때요, 월급쟁이는 예나 지금이나 월급쟁이인데다가 확실히 그 곤란한 생활 상태가 전날 월부로 견디던 시절보다 훨씬 더하니 이런 소비는 감불생심일 것이요, 지조의 성명(聲名) 없어진 것도 어제 오늘이 아니니, 이들도 요리점에 산재할 특권을 잃은 지가 오래다. 그러면 누구란 말인가.

두말할 것 없이 요새에 새로 생긴 모리배라는 특수 계급이야말로 그 장본인인 것이다. 생산자에게로 곧장 바로 흘러가야 할 물자가 이들의 손을 한번 거쳐서만 가게 된 세상이다. 이들의 손에 이것을 한번 거쳐 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선 한잔 먹어야 한다. 그 다음에라도 생산 공장으로 가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관문을 몇 번이고 거쳐서라야만 가게 마련된 세상이다. (<진짜 무궁화>(오기영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20~21쪽)

1909년생의 오기영은 원래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언론인인데 해방 후 3년간 경성전력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에 등대고 경제 현상을 왜곡시키는 '모리배'의 존재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축재 현상은 나중에 또 살필 기회가 있겠지만, 월급쟁이는 물론, 지주나 사업가 같은 전통적 의미의 부자들까지 무색하게 만드는 고급 소비 계층의 존재를 알려주는 글이다.

요즘 '양극화' 얘기를 하지만, 해방공간에서는 현금이 엄청난 편중 상태에 있었다. 주민의 99퍼센트가 물가 앙등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는 한편에서 1퍼센트 미만의 사람들이 통화량의 3분의 1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행정권과 관리권을 가진 미군 장교들을 매수해서 엄청난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전쟁 후의 여느 사회처럼 모든 사람이 함께 궁핍한 상태가 아니었다. 미군정 하의 조선은 투기꾼의 천국이었다.

38선 이북은 어땠을까? <동아일보>는 1946년 4월 6일에서 19일까지 12회에 걸쳐서 익명의 특파원이 쓴 "북한 답파기"를 연재했다. 이북 사정을 악선전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지만, 그 의도에 어긋나는 몇 가지 사실을 본의 아니게 담고 있다. 4월 18일자 기사 전문을 옮겨놓는다.

함흥 여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여러 가지 사정을 듣고 이튿날 국제 시장이라고까지 불러오는 유락정(有樂町) 시장을 구경하니 위선 물건보다도 장사꾼이 많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장은 소련군이 진주한 뒤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왜놈들 옷감과 가구가 터져 나와 소련군에게 반가운 선물이 되었고 요즈음에는 조선 사람들 중에서도 과거의 부자들의 예금이 동결되고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당하고 수입은 없고 지출은 늘어가고 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과 38선을 넘어가 살려는 사람들의 가산 정리로 말미암아 별별 물건이 다 나오게 되어 소련군은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붉은 군표를 아깝지 않게 내어 밀어 좋은 물건을 한 아름씩 사 가지고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간다. 중년 여인들이 의복감을 팔에 걸고 "수시수시(여보세요)" 하면서, 소련군의 팔목을 연달아 잡아 나꾸곤 "호로쇼 호로쇼(좋은 것입니다.)" 하면 또한 "니나-더(싫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또 서로 무엇이라고 떠들어대는 풍경은 해삼위(海蔘威)를 연상케 한다.

부자들의 예금이 동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유 재산권 침해라는 범죄적 조치로서 고발하는 뜻일 텐데, 이남의 지나친 사유 재산권 존중이 민생을 악화시키던 상황과 대비하면 범죄적 조치가 아니라 매우 바람직한 조치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 직후에 찍어낸 뭉칫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북에서는 제멋대로 휘두를 수 없었을 것 같다.

부잣집에서도 살림이 쪼들려 별별 물건을 다 내다 팔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련인이 군표로 사들였다고 한다. 조선인의 재물이 소련인에게 넘어가는 데 독자들이 분개할 것을 기자는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고통 분담'을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남 사회 일각에 돈을 주체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보다 바람직한 상황으로 보인다.

이북 지역에서 소련군은 점령 초기부터 군표를 사용했다. 조선은행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남의 미군처럼 '절대적'으로 존중하지는 않은 것이다. 해방 직후 대량 발행된 조선은행권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거액의 신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뭉칫돈 가진 사람들은 이남으로 가져와서 이남에서 썼을 것으로 보인다.

1947년 12월 9일 조선민주당 담화문에서 이북 지역의 군표 문제를 지적한 것이 있다. 조선민주당은 원래 평양에서 조만식을 영수로 결성되었다가 1946년 초 신탁 문제로 조만식이 연금 상태에 들어간 후 간부 대부분이 이남으로 내려와 명맥을 유지하면서 이북 체제 비판에 앞장서고 있었다. 지적의 타당성 여부는 판단하지 못하겠지만, 군표 시행에 따르기 쉬운 문제임은 분명하므로 옮겨둔다. 조선은행권의 완전 퇴출이 눈에 띈다.

"소군이 진주하자 자기네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발행한다는 군표는 현재 그 발행고가 70억 원에 달하며 일반 민간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동 군표와 조선은행권을 강제 예금시키고 신화폐 중앙은행권을 매월 1세대에 800원씩 지불한다. 그리고 소군은 재목 식량 연금 등을 북조선에서 군표로 대가를 지불하고 반출하여 왔는데 결국 군표를 북조선 중앙은행권으로 교환한다면 군표 70억 원에 대한 책임은 소군이 져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북조선 인민이 그 책임을 지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0일자)

미군은 일본에서는 일본은행권을, 조선에서는 조선은행권을 유일한 통화로 인정했으나 인플레이션 심화에 따라 달러 표시 군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맨 위에 인용한 <자유신문> 기사는 며칠 후 군정부의 공식 발표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29일 군정청공보부로부터의 특별 발표에 의하면 머지않아 발행될 미군표는 조선에 주둔해 있는 미국인과 미국 육군성 군속에게만 한하여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즉 미군으로서 직접 조선 내 각 은행·상점·개인과 군표를 교환 혹은 거래할 때는 무효가 되고, 다만 군정용 매점이나 기타 미군 시설 내에서 미군인 군속 사이에 교환할 때에만 한하여 사용되리라 하며 부득이 미국으로서 조선인 상점 혹은 개인과 거래하고자 할 때에는 군 경리장교가 조선은행권과 엄중한 규칙 아래 교환해 주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군표가 민간에 통용되지 않으며 또한 최초에 발행된 대상자 이외에는 조선은행권이나 미국 화폐로 상환할 수 있다 한다. 따라서 조선인은 물품 혹은 보수에 대하여 군표로 지불될 때는 여하한 이유를 불문하고 받을 필요가 없다 한다. 그런데 이 군표를 발행하게 된 근본 이유의 하나는 조선과 조선에 주둔해 있는 미군 당국을 원조하여 암취인을 없애어 조선 경제 안정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30일자)

통화 팽창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5개월 전에도 군표 발행 가능성을 극력 부인했던 것이고, 이제 시행에 들어가면서도 국내 통화와 철저하게 격리시키겠다는 방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 안에서 두 개의 통화를 떼어놓는 것은 행정 규제만으로 완벽하게 될 수 없는 일이다. 미군표는 금과 함께 돈 있는 조선인들이 재산 가치를 보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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