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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출몰한 괴물…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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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출몰한 괴물…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강정 마을은 평화의 미래다

어떤 풍경은 제가 태어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제주도 강정 마을 구럼비 해안은 해안 근처에서 분출한 용암이 느리게 바다 쪽으로 흘러가는 모양으로 있다. 당시 지표의 물질은 용암과 한 몸이 되어 기이한 색깔과 무늬를 이루고, 거대한 용암 덩어리가 품었을 기포들이 있던 자리에는 웅덩이가 팼다. 바다 쪽은 차가운 바닷물로부터 몸을 돌려세우기라도 한 듯 가파른 지형을 이룬다.

제주 해안 지형이 만들어진 것이 대략 10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이라 하니, 구럼비 해안도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주도의 지질학적 역사, 아니 가늠할 수도 없는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구럼비 해안은 이제 막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싱싱한 지형이다. 해도 내가 태어나 살아온 시간 따위야 바람이 여기에 모래 한 알 날아와 보탠 시간보다도 못한 하잘 것 없는 시간일지 모른다.

구럼비 해안을 걸으며 나는 말을 잃었다. 인간의 말이 이 경이로운 풍경 앞에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딱히 그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이 풍경에 덧씌워놓은 스산함 때문에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기지를 추진 중인 해군은 해안과 마을의 경계에 높다란 직각의 울타리를 세웠고, 바다 쪽으로는 구역을 표시한 듯 누런 부표를 줄줄이 띄워놓았다. 해안 한 쪽에는 거대한 크레인이 서 있고 그곳엔 테트라포트 같은 구조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구조물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까지는 한 번도 이곳에 출몰하지 않았던 음산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구럼비 해안을 기웃거리는 듯했다.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생명의 역사도 하찮을 뿐인데, 그 생명의 역사에 비해서도 정말이지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하찮은가. 구럼비 해안이 비로소 만들어지고 연산호나 붉은발말똥게 같은 뭇 생명들이 먼저 찾아와 살기 시작한 한참 뒤에야 인간은 가장 늦게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자연과 생명이 이미 조화를 이룬 이곳에서 인간은 인간대로 그 조화로움에 기대 살아왔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한낱 인간이, 그것도 그 공동체에 속해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앞세워 구럼비 해안에 권리 주장을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연산호라면 모를까, 붉은발말똥게라면 또 모를까.

▲ 구럼비 해안. ⓒredjiri.com

구럼비 해안에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구럼비 바다에 출몰한 바지선에 오르려다가 활동가 한 명이 다쳤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치 과정에서 해군과 기업체 직원이 주민과 활동가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말도 들린다. 또 강정 마을 주민 한 명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했다.

저들은 왜 자연도, 생명도, 사람도 죽이는 해군 기지 사업에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것일까. 과연 단지 국가 안보 때문만일까. 그것도 평화의 섬 제주도에서.

한편으론 그러면서 저들은, "지구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섬, 여기는 제주입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세계 7대 경관' 후보지 홍보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뻔뻔하게도 저들은 함부로 '지구'를 들먹인다. 함부로 '모든 아름다움'을 들먹인다. 저들이 생각하는 '지구'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적어도 저 광고의 '지구'와 '아름다움'과 '제주'에는 강정 마을과 구럼비 해안이 빠져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절대 보존 지역으로까지 지정된, 진정으로 '지구'와 '아름다움'과 '제주'가 우리를 압도하는 구럼비 해안을 빼고, "지구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섬, 여기는 제주입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저들에겐 있는가.

권력은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를 선점하고 언어의 본뜻을 왜곡하고 언어 뒤에 숨은 현실을 은폐하며 자신들이 선점한 언어를 지키기 위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동원한다. 4대강 '살리기' 사업 역시 그랬다. 눈 뜨고 코 베이듯이, '살리기'라는 말을 우리는 저들에게 빼앗겼다. 저들의 '살리기' 아래 강도 죽고, 강에 깃든 생명도 죽고, 사람도 죽었다.

다행히 아직 구럼비 해안은 '평화'라는 말을 저들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평화'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 그것이 지닌 무게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4·3 항쟁의 피와 고통을 이겨낸 세월은 제주도 곳곳에 어려 있다. 제주도에서 '평화'라는 말은 저들이 함부로 취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제주도가 60년 만에 되찾은 이 '평화'라는 말과 강정 마을의 '평화'는 당연히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강정 마을의 '평화'에는 자연과 생명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굳은 의지도 들어 있다. 강정 마을은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의 미래다. 그 '평화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 그대로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6월 16일 신경림 시인은 강정 마을 아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는데, 여기보다 아름다운 곳을 본 적이 없었다"며 "너희들의 부모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고 아이들을 위로했다. "이 시간을 아름답게 기억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시인의 눈이 구럼비 해안 쪽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 돌찔레가 보였다. 거센 해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낮게 엎드려 바위를 단단히 붙들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양이 꼭 강정 마을 사람들만 같았다. 반드시 그들의 가슴에도 꽃 한 송이 피울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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