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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파브르를 잇는 진짜 생명과학, 산새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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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파브르를 잇는 진짜 생명과학, 산새를 말하다!

[이렇게 읽었다] 권오준의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

둠벙마을? 서울 가까이 실제로 있는 마을 이름이다. 되지빠귀? 이건 일반 명사가 아니냐고?

사전을 들추어보거나 교과서에서만 이름을 익힌 전형적인 도시내기에게는 틀림없는 일반 명사, 보통 명사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되지빠귀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넷을 직접 관찰하고, 사진 찍고 동영상으로 그 새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백남호 그림, 보리 펴냄)의 저자 권오준에게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 명사다.

우리 생활 세계에는 일반 명사, 보통 명사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쌓아올린 상품만이 지배하는 대량 생산 체제의 자본 세상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모든 고유 명사들이 일반 명사, 추상 명사로 박제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딱딱한 걸상에 못 박혀 '강시'나 '좀비'가 되어가고, 하루하루가 24시간 동안 시계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덜 진화된 두뇌가 인공두뇌를 대신하고 있는 도시내기들 삶에는 고유 명사의 세계가 없다. 왜냐하면 고유 명사는 기계화된 두뇌 회로가 아닌 우리의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 공간에는 목숨을 주고받을 것이 없다. 목숨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가리키는 우리말 아니냐고? 이런 질문도 '목숨'을, '생명'을 일반 명사, 보통 명사로 격하시켜 결국 대량 살상 행위도 일상의 것으로, 아무렇지 않은 추상물의 하나로 바꾸는 타락한 말놀음이다.

▲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권오준 지음, 백남호 그림, 보리 펴냄). ⓒ보리
목숨은 목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들숨, 날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람만이 희망'인 문명 세계, 거대 도시(메갈로폴리스)에서 사람끼리 주고받는 목숨은 공기를 더럽히고 서로를 죽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함께 어울려 사는 자연 세계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날숨이 되어 풀과 나무의 들숨으로 바뀜으로써 숲을 살리고, 풀과 나무의 날숨이 사람의 들숨이 되어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 이렇게 자연 상태에서는 목숨을 나누는 것이 죽음의 질서에 이바지하지 않고 '살림'의 질서를 이룬다.

산새들이 도시 빌딩숲을 찾지 않고 나무숲을 찾아 날아들고 거기에 둥지를 트는 것은 숲이 새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말머리가 길어졌다.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생태 동화다. 이것은 머리에서 꾸며낸 그럴싸한 이야기가 아니다. 동화의 형식을 빌린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되지빠귀는 해마다 봄이 되면 멀리 남쪽 나라에서 날아왔다가 가을에 돌아가는 여름 철새 식구 가운데 하나다. 서울 가까이에 있는 영장산에 되지빠귀 한 쌍이 날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만히 앉아 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해"지는 권오준의 눈에 그 여름 철새 부부가 잡힌다.

되지빠귀 부부는 영장산 둠벙마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그 알에서 새끼가 깨나고 자라서 엄마 아빠와 함께 가을에 부모가 살던 먼 남쪽 나라로 날아갈 때까지의 성장 과정과 이 되지빠귀 가족들의 힘겹지만 감동스러운 삶의 모습을 권오준은 빠짐없이 관찰하여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는다.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되지빠귀의 삶도 순탄치 않다. 들고양이와 어치, 뱀과 청설모, 까치와 매, 황조롱이들이 끊임없이 되지빠귀 알과 새끼들의 목숨을 노린다. 때를 가리지 않고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람도 되지빠귀 새끼들에게는 천적들 못지않게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이다. 새끼들이 누운 똥을 내버려두면 그 냄새를 맡고 들고양이가 둥지를 덮칠 수 있다. 되지빠귀 부부는 새끼들이 똥을 싸는 족족 받아 삼켜서 둥지 밖으로 냄새가 퍼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 눈물겨운 자식 사랑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보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젖어온다.

생명의 세계, 생태계는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실험실이 아니다. 진정한 생명과학은 생명공학과 다르다. 물질과학의 가설을 밑에 깔고 실험실에서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게놈'이나 'DNA'나 그 밖의 온갖 생체 실험에서부터 '줄기세포'의 배양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반생명적이다. 그것은 '분자생물학'에 바탕을 둔 생명공학으로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물질과학에서는 구조가 기능을 결정하지만, 생명과학에서는 기능이 구조를 결정한다. 생체 세포를 관찰하고 조작하기 위해서 생명체에서 떼어내는 순간 그 세포도, 또 그 세포를 지녔던 생명체도 기능을 상실한다. 그만큼 손상을 입는다. 손상을 입은 만큼 온전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실험실에서 태어나는 생명체는 미생물에서부터 유전자가 조작된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구조를 판박이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생명체는 공장 제품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기능이 다른 고유 명사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모습을 띤 하느님도 조물주도 아니다.

한 생명체가 그 안에서 살고, 여러 생명체가 목숨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살림을 하고 있는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두고도 생명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길은 없을까? 있다. 그리고 그 길이야말로 생명과학을 온전한 과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 외길을 걸으면서도 생명과학의 금자탑을 쌓은 분들이 있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그런 사람이고, <곤충기>를 쓴 앙리 파브르가 그런 분이다.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 '빠지', '빠야', '빠우', '빠미'의 삶을 글로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고,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권오준은 이런 점에서 생명과학의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순간순간은 다 다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 생명의 시간은 이렇게 한 찰라가 우주의 모습을 바꾸어낼 만큼 무한한 다양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금 권오준은 이 고유 명사로 충만한 생명과학의 외길에 접어들었다. 이 길은 파브르가 곤충들과 함께 평생을 걸었던 길이고, 생명을 사랑하는 그 후예들이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걸어야 할 길이다.

이 땅에서 이런 책이 처음 나오고, 사람의 모습을 띤 자연의 떡잎들인 우리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생명의 숲길을 걷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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