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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와 싸울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프레시안 books] 하케·로렌초의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언제 한 번 '포스트 386' 세대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386 세대야 이미 그런 자리를 수도 없이 만들어왔고, 요즘에는 20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려는 자리들도 많은 것 같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포스트 386' 세대다. 대략 민주화 운동의 끝물을 타서 1991년 5월 투쟁을 인상 깊게 기억하며 1997년 외환 위기 터질 즈음 사회에 진출한 세대. 뭔가 한 시대의 주역이라기보다는 과도기적인 존재로만 느껴지는 세대. 사실은 나도 그 세대에 속한다.

그렇다고 단지 내가 그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포스트 386' 세대의 대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어딘가에 부유하는 존재들이 이쪽에도 저쪽에도 할 말이 많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다시 거리로" 하고 이야기하면서도 목에 너무 힘이 들어가지는 않고 20대 문화에 너무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으면서도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정도의 생각.

그런데 이런 생각의 '독일판'이 먼저 책으로 나왔다. 우리로 치면 '포스트 386' 세대와 가깝다고 할 독일의 '포스트 68' 세대 두 명, 악셀 하케와 조반니 디 로렌초가 나눈 대담,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배명자 옮김, 푸른지식 펴냄). 1990년대에 유행하던 운동권 후일담 소설 같은 제목이라 신뢰가 안 갈 수도 있는데, 원서의 제목은 "당신의 가치는 무엇인가?"이다. 사뭇 진지한 물음이다.

당신의 가치는 무엇인가?

▲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악셀 하케·조반니 디 로렌초 지음, 배명자 옮김, 푸른지식 펴냄). ⓒ푸른지식
두 사람은 모두 저널리스트다. 악셀 하케는 독일의 대표적인 중도 좌파 신문인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기자이자 청소년 등 다양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다. 또 다른 저자 조반니 디 로렌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귀화한 인물로서, 독일의 권위 있는 주간지 <디 차이트>의 편집국장이다.

아쉽게도 둘 다 남자다. 그래서 이 책은 아예 "두 남자의 고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리고 둘 다 1950년대 후반생이다. 1970년대에 20대를 보냈다는 이야기인데,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이 시기가 우리의 1990년대 초반과 대략 비슷했다. 한 세대의 커다란 봉기(68 운동)가 한 차례 있고 나서 그 여진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이다. 하케와 로렌초는 모두 그 여진 속에서 좌파 학생 정치 조직에 가입해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운동권 출신'이라고 해서 목에 잔뜩 힘을 주거나 알쏭달쏭한 이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두 사람은 저널리스트라는 직업도 벗어버리고 생활인으로서 발언한다. 한국어판 출판사가 굳이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로 '창조적인' 제목 변경을 한 이유도 이러한 이 책의 성격을 드
러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래 대담이라는 형식 자체가 무겁지 않은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무슨 정치인이나 사상가가 아니라 생활인의 대거리라는 점에서 독일 사회의 속살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장점까지 갖추고 있다. 저들의 역사가 배경으로 버티고 있어서 좀 낯설게 다가오는 대목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음, 얘네들도…" 하는 혼잣말이 나오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 사는 게 결국은 다 비슷비슷한 법이다. 우리보다는 경제 대국이고 복지 국가이며 통일도 먼저 했다는 독일이지만, 그쪽 사람들의 세상살이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정치를 비판하고 언론에 불만을 표하는 것도 그렇고(저자들 자신이 언론인임에도), "나는 지금까지 양심에 따라 경영하는 사장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토로하는 것도 그러하며,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우울증을 걱정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원제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두 저자는 일상의 도저한 냉소주의와 허무주의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 시대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묻고 또 물으며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려 한다. 마치 그것이 20대에 경험한 이상주의의 열정에 충실할 마지막 기회이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금융 공황 이후의 답 없는 시대에 인간됨을 견지할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일상의 허무주의를 극복할 우리 시대의 가치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의 극복 ― 그러나 그 답이 젊은 시절의 영웅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70년대의 저항을 덫에 빠뜨린 생(生)과의 괴리나 낡은 교리의 또 다른 우상화는 아니다.

두 저자가 추천하는 것은 일종의 생활인의 윤리다. 자신이 영웅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타자를 영웅으로 만들어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자기 삶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하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모범"이며, 모범이란 곧 "자기 자신 앞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거대 담론에 비하면 너무 왜소한 답변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로렌초가 드는 이탈리아의 한 젊은 저널리스트의 사례, 카모라(이탈리아 남부의 조직 폭력 집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 행각을 공중에 폭로한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경우는 이념이나 교리가 던져주는 것과는 또 다른 무게를 실감하게 해준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지난 20여 년간 베를루스코니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아래서 점점 더 벌거벗은 욕망의 사회로 치닫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이러한 작은 풀뿌리들의 결코 작지 않은 갱생의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포스트 386' 세대, 아니 한국에서 지난 번 봉기(민주화 운동 및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성인이 된 모든 세대가 우리 식으로 고민하고 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번 저항의 강렬함이 오히려 업보가 돼 새로운 세대가 '감히' 저항에 나서길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런 역사의 단절 가능성 속에서 우리가 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화로 격상되지 않은, 그래서 일상과 다시 접속할 가능성을 가진 저항의 경로를 밝히는 일이 아닐지.

이런 자극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하케와 로렌초의 대담집은 독일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반가운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나서 나는 더욱더 '한국판' <당신의 가치는 무엇인가> 식의 대담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차기 정권의 향배를 논하는 데 매몰되기보다는 조금 더 살림살이의 고민에 가까운 대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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